[스페셜1]
발견! 올해를 빛낸 남자 조연 6인 [7] - 박철민
2004-11-17
글 : 김현정 (객원기자)
사진 : 정진환
<목포는 항구다>의 가오리 박철민

“희극적 카리스마로, 잔인하고도 넉넉한 웃음을 주고 싶다”

박철민은 제대로 이름이 붙은 배역을 맡아본 적이 거의 없다. 시민 K, 웨이터, ‘우리들’, 직장 선배. 그리고 그는 마침내 <목포는 항구다>에서 가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라면에 개사료를 섞어 먹으면서 일류 깡패가 되기 위해 정진하는 가오리는, 박철민의 고향인 전라도 사투리로 표현한다면, ‘짠한’ 웃음을 주는 깡패다. 얄미운 짓만 하면서도 진정한 악당은 될 수가 없고 욕심 많아도 넘보지 않는 선이 있다. 노동자와 학생들의 집회를 이끌던 ‘민주 대머리’로 더 깊이 남아 있던 박철민. 그는 <목포는 항구다>로 이름은 모르되 얼굴은 잊기 힘든 배우가 되었다. <혈의 누>를 찍으며 난생처음 악한이 되어 “분장한 내 얼굴을 보니 정말 나쁜 짓을 하며 살아왔나 싶더라”는 그를, 전라남도와 서울을 오가는 스케줄 틈에서, 잠깐 낚아채 만날 수 있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다

박철민은 문제가 많은 학생이었다. “좀더 잘 싸우고 싶어서” 격투기까지 배웠던 그는 패싸움을 하다가 학교에서 쫓겨날 뻔한 적도 있었다. 그 위기의 순간에, 연극이 그를 구했다. 고등학교 연극반 시절부터 눈에 띄었던 박철민은 대입원서를 직접 들고 상경한 아버지 때문에 연극영화과에 진학하려던 꿈을 꺾어야 했지만 길은 얼마든지 있었다. 연극 동아리방에서 먹고 자며, 학교에 사는 비둘기를 사냥하고 호수의 물고기를 낚던 대학 시절. 그는 자연스럽게 80년대라는 시대의 흐름을 탔고, 공장과 집회 현장에 활기를 불어넣는 노동극단의 배우로 서른을 맞았다. 그러나 목마름은 남아 있었다. 둘째아이가 태어날 무렵, 과일장사를 했던 몇달을 빼면, 외도 한번 못해본 배우. 그처럼 고지식한 그는 “좀더 많은 대중을 만나기 위해”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대한민국 김철식> <밥> <늘근 도둑 이야기> 등에서 “한번 놀기 시작하면, 누가 말리지 않는 한, 끝까지 가는” 희극연기를 해왔다.

내가 나온 명장면을 말한다

“쉭쉭! 이것은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여.” 가오리가 자신만을 믿고 따르는 천진한 부하들에게 복싱을 선보이는, 나름대로 롱테이크. 박철민은 <목포는 항구다>의 김지훈 감독이 믿고 맡긴 이 장면을 위해 3분에 달하는 연기를 준비했지만 꼭 참고 2분으로 줄여 리허설을 했다. 반응은 좋았다. 그러나 영화는 냉정했다. 감독은 그에게 컷을 나누지 않고 찍는 이 장면이 지나치게 길면 몽땅 들어내야만 하는 경우가 생길지도 모른다고 털어놓았다. 다시 1분으로 줄인, 오로지 그에게 주어진 한 장면. “피눈물이 나더만.” 그가 피눈물을 흘리지 않도록, 그 장면은 살아남았고, 가오리 혹은 박철민도 함께 살아남았다.

나를 스크린으로 이끈 것은

박철민의 첫 번째 영화는 <부활의 노래>였다. 연출부를 하던 후배가 “개런티는 못 줘도 사우나비는 줄게”라면서 섭외한 이 영화는 그에게 연극과 영화는 다르더라는 교훈만을 남겼다. <키스할까요> <꽃잎> <일단 뛰어> 등에 가끔 출연하던 박철민은 그의 연극을 꼬박꼬박 보고 그럴 때마다 함께 술을 마시곤 하던 김지훈 감독과 일을 하면서 진짜 영화의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처음 <목포는 항구다> 시나리오를 보는데, 지문 사이사이로, 여백이 보였다. 애드리브를 할 수 있는 공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박봉곤 가출사건>에 웨이터로 출연하면서 처음 자신의 캐릭터와 맞는 연기를 해보았던 그는, 자신을 알고 자신을 믿는 감독을 만나, 스크린에서도 뛰어놀 수 있는 연못을 얻은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와의 인연은 좀더 오래되었다. “용돈을 벌려고 빈병을 모았는데, 빈병이 제일 많은 데가 극장이었다. 그래서 <새벽의 7인>을 몇번이나 보면서 진짜 멋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보려고 극장 담넘은 사람은 있어도 빈병 모으려고 담넘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걸?”

내가 스크린에서 살아내고 싶은 사람은

박철민은 언젠가 연극 <대한민국 김철식>을 다시 한번 무대에 올리고 싶다. 한국 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시대를 살았던 김철식은 순수하고 곧은 마음을 포기하지 못했던, 그래서 4·19 시위행렬에서 홀로 죽어간 인물. 슬픈 사연이지만, 그 슬픔에 이르기까지는, 웃음을 더 많이 주는 남자였다. 박철민은 그처럼 무대와 관객, 스크린을 압도하는 희극연기를 하고 싶어한다. “희극적이면서 카리스마를 가지긴 힘들다. 하지만 나는 희극적인 카리스마로, 잔인하면서도 넉넉한 웃음을 주고 싶다.” 그는 이제 됐다 싶은 마음이 들 어느 날, 김철식이 되어 무대로 돌아갈 것이다.

관련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