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3] - 1996년
2005-05-04
글 : 이영진
부산국제영화제 출항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6천여명에 달하는 거대 인파가 개막식장인 부산 수영만 야외극장으로 모여들었다. “13일의 금요일”이라는 수군거림은 기우였고, 9월13일은 “한국 영화사 최대 길일”이 됐다. 시네필들의 환호 속에 마이크 리의 <비밀과 거짓말>이 눈을 떴고, 27개국에서 날아든 170여편의 영화들이 9일 동안 연달아 기지개를 켜는 동안, 남포동 극장가는 넘쳐나는 관객으로 매일 흥청거렸다. 총관객 수 18만4071명. 매표 수익은 애초 기대했던 3억원을 훨씬 뛰어넘는 4억5천만원이나 됐다. 좀처럼 만날 수 없었던 미지의 영화들과 조우한 관객의 함성은 부산을 찾은 외국 게스트들의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축제는 밤에도 이어졌다. 특히 해운대 앞 포장마차는 코리안 펍의 대명사가 됐고, 김동호 집행위원장은 좌판에 자리깔고 앉은 파란 눈의 외국인들에게 소주잔 돌리기 바빴다. 관객의 부산영화제 애호증은 식지 않았다. 올해 10회 행사를 앞두고 지금까지 부산국제영화제를 다녀간 이들은 모두 155만1165명. 특히 해외 영화인들에게 “아시아영화를 보려면 부산에 가야 한다”는 공통된 인식을 심어준 부산국제영화제는 이후 새로 생겨난 국제영화제들의 벤치마킹 모델이 되는 권세를 누렸다.

1996년의 영화

할리우드처럼 해볼 만하다_<은행나무 침대>

할리우드에 대한 한국영화의 오랜 콤플렉스를 불식시키진 못했지만, <은행나무 침대>는 한번 붙어볼 만하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게임의 법칙>의 시나리오 작가 출신인 강제규 감독은 “이번에 컴퓨터그래픽에 성공하지 못하면 한국영화에서 컴퓨터그래픽은 없어질 것이다”라는 각오로 시공을 초월한 러브스토리를 완성했다. 160일 동안 75회 촬영은 당시로선 찾아보기 어려운 기록. 서울에서 45만2580명이라는 관객을 끌어들이며 <투캅스2>에 이어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2위에 랭크됐고, <씨네21> 올해의 영화에 꼽혔으며, 연말부터 홍콩을 비롯, 동남아시아에서 개봉했다. 한국영화가 홍상수를 만난 날_<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한국영화가 홍상수를 만난 날_<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홍상수 감독의 등장은 골방소년이었다는 그의 유년 시절만큼이나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3억5천만원 들여 만든 저예산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파장은 실로 컸다. “우연성과 즉흥성과 권태와 비극과 부조리가 한데 응축된” 서울에 관한 그의 디테일한 묘사는 “한국영화의 현대화를 선포했다”는 주장을 끌어내기에 충분했다. 흥행은 서울관객 3만7103명에 그쳤지만, 해외에서의 반응은 뜨거웠다. 대종상 본선에도 오르지 못하고 찬밥 대접 받았던 영화는 도쿄영화제에 초청됐고, 이어 밴쿠버영화제 용호상과 로테르담영화제 타이거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이 겹쳤다.

TREND

검열은 위헌

헌법재판소가 ‘영화사전심의는 위헌’이라는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가위질 옹호론자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등급외전용관 설치를 반대하며 검열을 의무화한 청소년보호법 입법을 서둘러 추진했고,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 논리는 결국 휴짓조각이 됐다.

<애니깽> 파문

“붐마이크가 10번 이상 나오는” NG컷을 서둘러 붙여 예심을 통과했던 <애니깽>이 작품상과 감독상을 차지하자 대종상은 걷잡을 수 없는 공정성 시비에 휩싸였다. 이 파문으로 삼성문화재단이 대종상에서 발을 뺐고, 이듬해 대종상은 스폰서를 구하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언픽스>

해외합작 붐

<제이슨 리>(미국), <하드 라이너스>(미국), <언픽스>(홍콩), <더블 크로스>(영국), <빅또르 최>(러시아), <달빛 맹세>(프랑스), <이방인>(폴란드) 등이 해외합작을 선언했다. 해외 틈새시장을 확보함으로써 평균제작비 상승을 만회하려고 했으나 일부 작품 제작이 암초에 걸리는 등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검찰, 영화계 비리 수사

8년 전 씨네하우스 방화 사주 혐의로 서울극장 곽정환 대표를 구속한 검찰은 수사를 영화계 비리 전면수사로 확대했다. 10개 영화사 대표들이 줄줄이 소환됐고, 결국 이태원 태흥영화 대표가 탈세 혐의로 구속됐다. 곽정환과 이태원, 충무로 두 실력자의 구속 사태는 토착자본과 힘겨루던 대기업의 파워를 배가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국산 애니메이션의 성과

<아기공룡 둘리>의 선전은 침체 일로의 한국 애니메이션에 숨통을 열어줬다. 어린이 및 유아를 대상으로 적극적인 마케팅을 펼친 끝에 30만명 가까운 관객을 끌어모았고, 15만장이 팔려 비디오 판매 1위에 올랐다. 그러나 국내 흥행만으로 제작비 20억원을 메우지 못했고, 애니메이션 제작이 만만치 않은 도전임을 일러줬다.

1996년 흥행 5걸

(당해 개봉작, 서울 기준, 단위: 명)

1. <인디펜던스 데이> 92만3223

2. <더 록> 90만6676

3. <투캅스2> 63만6047

4. <미션 임파서블> 62만2337

5. <쥬만지> 54만402

NUMBER

<코르셋>

65 한국영화 제작편수

23.1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229 공윤이 장면삭제 등 딴죽 건 영화 편수

15 이혜은이 <코르셋> 촬영을 위해 불린 살(kg)

75 <은행나무 침대> 촬영횟수

5,000,000 이자벨 아자니 선발대회 대상 수상자인 최지우가 받은 상금(원)

1,500,000,000 <꽃잎> 프리세일 최소 개런티(원)

CHARACTER

동정없는 남자_<악어>의 용패

어디서도 본 적 없었다. <악어>의 나쁜 남자 용패는 생경하다 못해 외계인 같았다. 그는 보통 ‘나쁜 남자’들과는 급이 달랐다. 무엇보다 동정을 구하지 않았다. “80년 광주에 투입됐던 공수부대원이라는 설정”마저도 “악(惡)에서 (영화를) 시작하고 싶었다”는 김기덕 감독의 뜻에 따라 용패의 과거사는 제거됐다. 한강에 투신한 이들의 육체를 파먹고 사는 부랑자 용패를 세상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가학과 피학의 난동을 부리는 용패에게서 사람들은 악취가 난다며 구토했다. 그러나 구원을 향한 용패의 몸부림은 세상 어디서도 들은 적 없는 야성의 울부짖음이었다. 용패로 시작한 김기덕의 나쁜 남자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할까.

말말말

“당시 가짜 미제 지퍼라이터가 정말 유행했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안성기, 제1회 <씨네21> 영화상 시상식장에서 ‘성냥으론 불가능했다’는 박광수 감독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한 관객이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의 분신장면에서 ‘왜 미제 지퍼 라이터를 썼느냐’고 집요하게 묻자)

“해서는 안 될 말이 있는 법이다. 그런 말은 장세동이나 할 소리다.”(장선우, <꽃잎> 시사 직후 “주제가 노래 <꽃잎>밖에 건질 것이 없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기자가 전하자)

“한국의 영화제가 이런 거냐?”(일본의 저명한 평론가 사토 다다오, 대종상 심사를 끝내고 난 뒤)

“뽀빠이 아저씨는 끝까지 어린이를 즐겁게 해줘야지, 김동건씨처럼 점잖은 국민 MC 되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박중훈, 코미디영화만 하는 게 지겹지 않느냐고 묻자)

“우리의 아집과 독선은 두 가지. 한국영화가 상업적 단견들과 외세의 침략으로 멸종 장르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 그리고 어떤 명분으로도 더이상 설득하기 어려운 영화에 대한 가위질 사전심의가 세상 밖으로 사라지도록 하는 것.”(조선희, <씨네21> 지면개편호 ‘편집장이 독자에게’에서)

PEOPLE

흥행제왕 재등극_강우석

강우석 감독에겐 1996년이 생사의 고비였다. 시네마서비스를 창립한지 1년. 제작영화 <엄마에게 애인이 생겼어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의 흥행 실패는 “점 백짜리 고스톱 치면서도 1천원만 잃으면 머리가 돌 지경”이라던 그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투캅스> <마누라 죽이기>의 흥행을 기억하는 이들은 “3억원 연출 제의를 던졌지만”, 기업형 감독을 꿈꾸는 그에게는 그저 푼돈일 따름이었다. 그런 그가 꺼내든 카드는 <투캅스2>. 속편의 성공을 의심하는 시선들이 없지 않았지만, 그는 보란 듯이 1996년 한국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하며, 흥행제왕의 귀환을 충무로에 알렸다. 이듬해부터 내리 8년 동안 그는 충무로 파워 NO.1의 자리를 고수했다.

단편영화 스타감독_장준환+봉준호

단편영화계에도 스타 감독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영화아카데미 11기였던 장준환 감독과 봉준호 감독이 대표적인 케이스. 이들의 졸업작품 <2001 IMAGINE>과 <지리멸렬>은 개시되자마자 클레르몽 페랑 단편영화제 등과 같은 해외영화제 순방에 나섰다. 이후 두 사람은 충무로 데뷔 1순위 후보로 매번 물망에 올랐다. 재밌는 건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의 연출부로 일하던 봉준호 감독과 영상원 기술조교로 일하면서 자신의 첫 번째 영화를 꿈꾸던 장준환 감독이 당시엔 해외영화제 초청 소감을 묻자 무척이나 부끄러워했다는 것. 2003년 화제작 <살인의 추억>과 <지구를 지켜라!>로 충무로 스타감독 대열에 올라선 지금 모습과는 천차만별이다.

월력

1월
김광석 자살
전두환 비자금 수사 난항
<본 투 킬>, 고가 파나비전 카메라 첫 촬영 영화
서태지와 아이들 은퇴

2월
삐삐 보급 10만대 돌파
대우, 영화 직접 제작 선언
<CNN>, 80년 광주 다루면서 <꽃잎> 비중있게 소개
리안, <센스, 센서빌리티>로 베를린영화제 금곰상 수상

3월
<맥주가 애인보다 좋은 일곱가지 이유>에 관객, ‘기념비적 실패작’이라며 야유
영화관람료 6천원 인상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르네 클레망, 마르그리트 뒤라스 타계
성룡의 <홍번구>, 오우삼의 <브로큰 애로우> 할리우드 박스오피스 수위 다툼

4월
연세대생 노수석군 시위 도중 사망
공륜이 심의보류한 양윤호 감독의 <유리> 로테르담영화제 초청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 일본 순회상영 중 우익으로 보이는 괴청년으로부터 테러 위협 받아

5월
허영만 인기만화 <비트> 영화화 결정
영화 보고 25건 범죄 저지른 20대 구속
LG, 쌍용 이어 현대도 영화사업 진출 선언

6월
2002 월드컵, 한·일 공동 개최 결정
부산국제영화제 현판식
푸른영상 대표 김동원 감독, 사전심의 받지 않은 비디오테이프 제작 판매했다며 긴급구속
윤도현, 신성우, 김재희 등 록가수들 잇단 영화 데뷔
스크린쿼터 감시단 1년 만에 활동 재개

7월
김종학, 고석만, 황인뢰에 이어 이진석, 이장수 등 중견급 PD들 영화제작 러시
왕년의 주먹 용팔이, <보스> 관람 뒤 조양은에게 무릎 꿇은 영화장면을 문제삼아 제소 으름장
신씨네, 3억원 들여 015B 뮤직비디오 <21세기 모노리스> 제작 발표
<세계영화기행> 비디오 출시

8월
삼성영상사업단, 흥행 위해 44분 삭제 뒤 <히트> 상영하려다 반대 여론에 부딪혀 원상복구. 하지만 포 항, 전주 등 지방에선 30여분 삭제 뒤 상영
소설가 이창동, <초록물고기>로 데뷔 발표
<체인지>, 표절 논란 뒤에야 일본영화 리메이크 사실 밝혀

9월
검찰, 금품 갈취 및 영화제작진과 아내에게 폭행 휘둘렀다는 혐의로 조양은씨 다시 구속
경찰, 여성 과다노출 단속 방침 밝혀
홍상수 감독, 국립영상원 전임교수 임명
부산영화제 데일리 씨네PIFF 발행

10월
마카레나 열풍
인권영화제 개최 일정 발표
LG, 영화산업 철수
제일제당, 홍콩의 골든하베스트, 호주의 빌리지 로드쇼와 손잡고 멀티플렉스 사업 뛰어들어

11월
지존파 이어 생매장 자행한 막가파 일당 구속
제3회 서울단편영화제에 관객 몰려
박중훈 할리우드영화 <아메리카 드래곤> 출연 위해 캐나다 밴쿠버로 출국

12월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 UIP와 이십세기 폭스에 이어 <랜섬>으로 전국직배 돌입
민가협의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에서 여균동 감독의 <외투> 상영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첫 심야영화제 개최

사진 <씨네21> 사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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