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6] - 1999년
2005-05-04
글 : 이영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흥망

“아니, 저게 뭐야?” 1월14일, 전국의 50여개 극장에는 권총 든 한석규의 전신 사진이 실린 <쉬리>의 대형 스탠디가 배치됐다. 영화홍보용 입간판을 말하는 스탠디는 그때까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전유물이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50분의 1도 안 되는 제작비로 만들어진 한국영화가 극장에 거금을 들여 스탠디를 세운다는 건 상상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쉬리>는 똑같이 했다. 얼마 뒤, ‘1999년 1급 프로젝트’라는 <쉬리>의 홍보 문구는 거짓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좀처럼 깨지지 않을 것 같던 <타이타닉>의 흥행 기록을 <쉬리>가 뛰어넘으면서 다윗이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 있음을 영화인들은 목격했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기이한 범주는 그렇게 탄생했다. 1998년은 강제규 감독의 말처럼 “10억원을 들여 30억원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30억원을 들여 5억원을 벌어야 하는”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홍콩영화의 퇴조는 아시아에서 한국영화가 맹주로 설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쉬리> 이후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 <유령> <자귀모>가 줄줄이 개봉했고, <비천무> <아나키스트> <2009 로스트 메모리즈> <천사몽>이 대작 선언 뒤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형 블록버스터는 불안정한 자본 상황에 휘둘리고, 부실 프로젝트가 속출하기도 했지만, “더 크게”라는 구호의 단맛을 본 이상 증식을 멈출 순 없었다.

1999년의 영화

이명세표 액션영화_<인정사정 볼 것 없다>

“한국에서 액션영화가 뭘 부수고 하는 효과를 내긴 힘들지. 난 영화 자체의 리듬을 살려보려고 해요. 카메라와 연기자의 움직임으로 화면 자체의 힘을 증폭시키는 거지.”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그동안 쌓아왔던 이명세표 미장센을 허물되, 디테일을 소중히 하는 자신의 스타일을 극단으로 밀어붙인 독특한 영화였다. 부산 용두산에서 은행나무 60부대를 공수해 와 40계단 살인장면에 까는 수고는 헛되지 않았다. 서울에서만 68만7천명의 관객을 모으며, 같은 날 개봉한 한국형 블록버스터 <유령>의 추월을 멀찌감치 따돌렸다.

“음란성이 과도하다”_<노랑머리>

검열이나 다름없는 공진협의 3개월 등급보류 조치가 떨어진 첫 번째 타깃은 장선우 감독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거짓말>로 개봉)가 아니었다. “여자 2명과 남자 1명의 혼음을 그리는 등 음란성이 과도하다”는 이유로 김유민 감독의 저예산영화 <노랑머리>가 윤리의식 투철한 분들의 먹잇감이 됐다. 98년 하반기 영진공 판권담보융자작이었던 <노랑머리>는 정부에서 빌려준 4억원으로 촬영을 개시할 수 있었지만 결국 개봉을 앞두고 대기해야 했다. 일각에선 장선우 감독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사전 선전포고라는 추측도 나왔다. 결국 두 장면 자진 삭제 뒤에야 18세 관람가 등급을 받고 개봉했다.

TREND

일본영화 2차 개방

정부는 일본영화 개방 범위를 국제영화제작자연맹이 인정하는 70여개 영화제 수상작으로 넓혔다. 또 수입영화가 국내에서 전체 관람가 등급을 받은 경우에 한해 일본영화를 개봉하기로 했다. 개봉 1순위로 꼽혔던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는 서울에서 59만9350명의 관객을 끌어들였다

<용가리> 헛소동

<용가리>를 사전판매해 272만달러를 거둬들이게 됐다는 언론의 보도는 심형래를 일약 IMF 영웅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1년 뒤 15분짜리 데모 테이프 시사를 앞두고 독일과 계약 파기 소식이 들렸고, 대만, 러시아도 ‘나 몰라’ 분위기에 가세했다. 뭣보다 개봉을 앞두고 해외로부터 송금받은 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용가리>를 대하는 언론의 태도가 전같지 않았다.

금융자본 시대 개막

연초 삼성영상사업단이 해체를 공식화하고, 대우 또한 영상음반사업부를 없앴다. 대기업 철수가 가시화하자 창투사에 대한 충무로의 의존도는 더욱 커졌다. 이 공백을 일신창업투자, 미래에셋, 산은캐피탈, 국민기술금융 등이 나서서 채웠고, 제일제당도 재기를 선언하며 충무로에 뛰어들었다.

한국영화 점유율 40% 육박

35.8%. 한국영화의 비약적인 성장이 이뤄진 한해였다. <쉬리>가 기적 같은 수치를 만들어내는 1등 공신임을 부정할 수 없지만, 이보다 93년 15.9%, 94년 20.5%, 95년 20.9%, 96년 23.1%, 97년 25.5% 등 한해도 쉬지 않고 관객점유율을 높인 한국영화의 상승세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파동

5월8일 민간기구인 영화진흥위원회가 출범했지만 위원인 영화인협회 김지미 이사장이 위원회 구성에 불만을 품고 보이콧했고, 결국 문화부가 위원장과 부위원장을 보수적인 인사로 교체하는 인사를 단행하는 해프닝을 벌였다. 이에 정지영, 문성근, 안정숙 3인 위원이 사퇴했고, 결국 새 위원장도 12월 사퇴함에 따라 전면적인 재구성이 불가피해졌다.

1999년 흥행 5걸

1. <쉬리> 244만8399

2. <미이라> 111만4916

3. <주유소 습격사건> 90만5500

4. <매트릭스> 89만7882

5. <식스 센스> 79만7761

NUMBER

2037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 오디션 응모자 수. 조승우, 이효정이 결국 낙점

117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하며 삭발한 영화인들 수

11,000 한국의 에드우드 최야성 감독이 <파파라치> 촬영에 쓴 필름양(자)

950,000,000 <쉬리> 흥행으로 기본 개런티 외에 한석규에게 돌아간 러닝개런티 액수(원)

CHARACTER

묻지마 양아치_<주유소 습격사건>의 캐릭터

근처에 현금 많은데도 왜 하필 여길 터느냐고? 그냥! 통제불능의 전직 야구선수 노마크(이성재), 얼굴과 인상만으로도 기선제압이 가능한 단순무식 무대포(유오성), 음악 없인 못살 것 같은 얼치기 록가수 출신 딴따라(강성진), 전위 화가를 꿈꾸는 뻬인트(유지태)는 편의점에서 라면 먹다 말고 주유소를 습격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들에게 ‘왜 주유소냐’고 묻는 건 의미없다. “그냥” 그러고 싶었단다. 원색의 옷차림과 독특한 헤어스타일의 소유자인 이들 네 인물은 단순, 무식, 과격의 기준에서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고약한 행패에 가까운” 행위들을 이들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자행한다. 이들의 난동극에 휩쓸려 웃다 보면 결국 불쾌함이 남지만 앞뒤 재지 않고 세상을 휘젓는 가학성에 관객은 빠르게 전염됐다.

말말말

“미국에서 총과 공포탄 수입하는 데 1억원 가까이 들었다. 지금 시대에 꼭 그걸 수입할 필요가 있는가. 만약 우리 군이 빌려줬으면 K1, K2 같은 국산 총기가 알려질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한데 결국 미국 총기 선전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강제규 감독, <쉬리> 제작 에피소드)

“글쎄, 감독이라는 호칭은 차범근 감독에게나 어울리지.”(장진, 두 번째 영화 <간첩 리철진>을 만들었지만 아직도 감독이라고 부르면 어색하다며)

“역대 어느 정권도 영화인 100명이 삭발을 하도록 하지는 않았다.”(명계남, 스크린쿼터 축소 저지를 위한 범영화인 규탄대회 사회를 보다)

“나 스스로 자신을 인터뷰해 108개의 질문을 던지고 총점검한 다음에 다시 출발하겠다.”(박광수, <이재수의 난> 개봉 앞두고 앞으로 저예산영화를 하겠다며)

“상상력을 직접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데 콘티를 보면 영호의 슬픈 엉덩이라고 쓰여 있다.”(설경구, <박하사탕>의 영호 연기가 만만치 않았다며)

“싫으면 안 보면 되고, 보면 잊어버리면 그만인데.”(임상수, 공진협의 <거짓말> 등급보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며)

PEOPLE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장본인_강제규

<쉬리>는 강제규 감독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대명사로 만들었다. 그러나 먼저 그가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게임의 법칙> <장미의 나날> 등의 시나리오를 써 촉망받던 작가 출신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대중적으로 어필할 수 있는 소재를 척 물어내는 감각과 드라마를 중심에 두고 영화를 촘촘히 짜는 능력이야말로 <은행나무 침대>의 CG를 빛나게 하고, <쉬리>의 특수효과를 돋보이게 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할리우드영화 메이킹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가려 찍었다”는 <쉬리>는 일본시장에서도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한국영화 해외시장 공략의 첨병이 됐다. 과작 감독인 그가 5년 뒤 내놓은 <태극기 휘날리며>는 모든 국내 기록을 갈아치웠고, 신기록 제조기라는 타이틀이 그에게 따라붙어 있다.

진짜 전성기의 시작_최민식

잘 알려져 있듯이, 최민식은 <넘버.3>에 출연하기 위해 한석규에게 자리 좀 알아봐 달라고 했다. 한석규가 추천해서 최민식에게 송능한 감독이 마동팔 검사 역을 맡긴 것은 아니겠지만, <조용한 가족>의 삼촌 역을 맡았을 때까지만 해도 최민식은 충무로에서 개성적인 조연에 머물렀다. 그에게 주어진 캐릭터는 평소 지론대로 그가 신명 부리며 놀기에 너무 좁은 울타리였을지 모른다. 그랬던 그가 <쉬리>의 박무영으로 단번에 폭발했다. 영화 <쉬리>에 대해선 찬반 논란이 있었지만, 북에서 내려온 박무영의 이글거리는 눈빛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총 없이 걷기만 해도 원자폭탄 하나가 걸어가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연기했다”는 그는 이후 <해피엔드> <파이란> <올드보이> <주먹이 운다>에서 잃을 것 없는 밑바닥 남자의 울부짖음을 맘껏 들려줬다.

월력

1월
완전등급제 조항 삭제된 영진법 개정안 국회 본회의 통과
<쉬리> 크랭크업. 6개월 동안 80회 촬영

2월
남북합작영화 <아리랑> 감독 임권택, 배우 최민수 내정설 기사 나왔으나 해프닝으로 밝혀짐
1회 영상원 영상제 개최

3월
백두대간 등이 수입한 예술영화, 편당 관객 1만명 이하로 하락
스탠리 큐브릭 타계
공진협, 조PD 노래에 청소년 유해 판정
미 영화협회 잭 발렌티 회장 스크린쿼터 축소 요청했으나 DJ 사실상 거부

4월
클래식 상영관 오즈, 판권자의 허락 받지 못해 <오발탄> 상영 취소
동양 영화전문 케이블 채널 DCN, 메가박스 인수 결정

5월
어린이날 용인 에버랜드를 폭파하겠다는 ‘간첩 류철진’ 소동, 해프닝으로 밝혀져
<매트릭스>, 개봉 첫날 전회 매진 사례 기록하며 첫주 서울에서만 관객 수 26만 돌파
송일곤 감독의 <소풍>, 칸영화제 단편 경쟁부문 심사위원 대상 수상

6월
명보극장, 금·토·일에 <스타워즈 에피소드1: 보이지 않는 위험> 24시간 상영
<딴지일보>, 조회 수 1천만 돌파

7월
<거짓말>, 예상대로 등급보류 판정

8월
<거짓말>, 베니스영화제 경쟁부문 진출
저예산 <블레어 윗치>, 미국에서 제작비 100배에 해당하는 2850만달러 수익 거둬
<유령>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티저 예고편 선보이며 경쟁 가열

9월
<타이타닉> 주제가 <마이 하트 윌 고 온>,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음악으로 선정
젊고 진보적인 영화인들 중심으로 영화인회의 출범
검찰, 거액의 고객 신탁자금 해외유출 혐의로 삼부파이낸스 양재혁 회장 수사. 영화계 자금경색 우려

10월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 드러나
부산국제영화제 예매 첫날 20분 만에 <거짓말> 2회 상영 매진

11월
<원더풀 데이즈> <텔미썸딩>, 예고편 시사만으로 대만에 판매
원로배우 최무룡 타계
CJ엔터테인먼트,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거듭나기 위해 한국영화 제작에 500억원, 극장사업에 2500억원 투자하겠다고 발표

12월
전국 13개 대학 연극영화·영상 관련 학과, 국립예술대학교 설치법안 반대 시위

사진 <씨네21> 사진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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