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씬 시티> 미리 보기 [2] - 코믹북에서 영화로
2005-06-21
글 : 박혜명
글 : 김도훈
프랭크 밀러의 원작만화 <씬 시티>가 영화화되기까지

프랭크 밀러, 그래픽 노블 <씬 시티> 창조

프랭크 밀러의 원작 <씬 시티>

1988년, <데어데블>로 명성을 날리고 있었던 만화가 프랭크 밀러는 배트맨의 어린 시절을 재구성한 그래픽 노블 <배트맨-영년>을 내놓았다. 배트맨은 더이상 영웅이 아니었고, 선과 악의 경계에서 구원을 찾아 헤매는 영혼이었다. 그로부터 1년 뒤에야 팀 버튼의 극장판 <배트맨>(1989)이 등장했다. 팀 버튼의 작품이 프랭크 밀러의 새로운 해석에 빚지고 있다고 주장한 미국 만화광들의 이야기도 일리가 있어 보였다. 어쨌든 때는 왔다. 돈과 명성을 얻은 프랭크 밀러는 어릴 적부터 꿈꾸어왔던 이야기를 그래픽 노블로 탄생시키기에 적절한 시절이 왔음을 깨달았다. “마침내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릴 수 있는 명성과 자유를 얻었을 때, 나는 14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상상했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었다. 트렌치코트를 입은 거친 남자들과 빠른 차를 탄 화끈한 여자들의 세계로.” 1991년에 출간된 <씬 시티>는 레이먼드 챈들러에 열광한 14살 소년이 품었을 만한 도시에 대한 어두운 동경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씬 시티>가 유아기적인 폭력에의 경도로만 가득 찬 사춘기 소년들의 전유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프랭크 밀러는 뒷골목의 필름 누아르 속에서 도덕과 윤리의 이야기를 보았다. “좋은 멜로드라마와 범죄소설은 주인공이 선과 악의 사이에서 도덕적인 결단을 내려야 하는 순간들을 항상 보여준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서 볼 수 있듯이, 누아르의 주인공들은 추악한 기사(騎士)와도 같다”는 프랭크 밀러의 말처럼, <씬 시티>의 주인공들은 선과 악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갈등하고 갈구한다. 이렇듯 거친 도시의 죄악을 그려내기 위해 프랭크 밀러는 공장직조 코믹스의 반듯한 그림체를 버리고 종잇장이 찢어질 듯한 거친 흑백의 손맛을 되살려냈다. 프랭크 밀러의 작풍은 뒤에 토드 멕퍼레인(<스폰>) 같은 코믹스계의 후배들에게도 큰 영향력을 끼쳤고, 미국 코믹스는 더이상 건전한 슈퍼히어로의 영웅담으로 복귀할 수 없었다.

로버트 로드리게즈, 영화 <씬 시티> 창조

입술과 옷만 레드로 처리한 <씬 시티>의 한 장면. 원작을 충실히 재현한 결과다.
원작의 마브와 영화 <씬 시티>의 마브.

2004년, 92년부터 <씬 시티>를 수집해온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프랭크 밀러의 원작을 영화화하려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문제는 영화화 불능 딱지를 진작에 붙이고 있었던 <씬 시티>의 배배 꼬인 플롯과 강렬한 비주얼이었다. 궁리를 거듭하던 로드리게즈는 원작을 각색하지 않은 채 스크린에 그대로 옮기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할리우드의 전문 각색가에게 맡긴다면 원작을 완전히 변형시켜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프랭크 밀러는 손쉽게 로드리게즈의 열정을 받아들일 만큼 관대한 영감이 아니었다. 그러나 “할리우드는 나의 보배로운 아기를 빼앗아가서 해피엔딩으로 장식된 액션영화로 망가뜨릴 것이 분명하다”는 창조주의 고집 앞에서도 로드리게즈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서 만든 5분짜리 클립을 보여주면서 고집 센 아이처럼 프랭크 밀러의 설득을 얻어냈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워런 비티가 체스터 굴드의 4컷짜리 만화를 색채까지 인쇄하듯 만들어낸 <딕 트레이시>(1989)의 선례가 있기는 하지만, 로드리게즈의 꿈은 “코믹스를 영화화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코믹스로 바꿔버리는 것”이었다. 원작자의 적극적인 참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만화가와의 공동감독을 금지하는 미국감독조합(DGA)에서 탈퇴하면서까지 프랭크 밀러를 공동감독 자리에 올리는 과감함을 보였다(결국 그는 DGA로부터의 탈퇴로 또 다른 오랜 꿈인 고전 SF <화성의 공주>의 영화화를 포기하고 만다). 로드리게즈가 현장의 총책임을 맡고 진행하는 동안, 프랭크 밀러는 창조주의 습성대로 자신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꼼꼼하게 감수했다. 두 사람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스토리보드였던 원전을 충실하게 담으려는 고집을 우직하게 밀어붙였고, 프랭크 밀러의 말처럼 “원작의 대사가 그대로 살아 있고, 이미지와 이미지, 순간과 순간으로 과감하게 뛰어넘는 점프컷으로 가득한 낯선 영화 <씬 시티>”는 마침내 영화화 불가능성의 딱지를 떼고 생명을 얻었다.

8인8색 주요 캐릭터 & 캐스팅

마브 _미키 루크

프랭크 밀러는 마브를 “트렌치코트를 입은 코난”이라 표현했다. 문명에 길들여지지 않은 캐릭터 마브는 법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법을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에게 먹이사슬 같은 것이다. 돈을 주고도 여자를 살 수 없을 만큼 흉악하게 생긴 마브는 “당신이 필요해요”라며 따뜻한 미소로 다가온 여인을 위해 잔인한 복수를 시작한다. 역설적이게도, 마브는 영화 <씬 시티>를 통틀어 가장 인간적이다. 특수분장과 CG 때문만은 아니다. <나인 하프 위크> 이후 줄곧 할리우드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못하고 알코올 중독과 마약복용 등으로 험난한 삶을 지속해온 배우 미키 루크의 개인적 시간들이 마브의 짐승 같은 실루엣 안에 입체적인 온기와 고독을 채운 것이다.

하티건 _브루스 윌리스

유능한 형사들은 대개 은퇴를 앞둔 시점에서 인생 최대의 고비를 만나곤 한다. 하티건도 그렇다. 그는 열한살짜리 소녀 낸시 캘러핸을 로어크 주니어로부터 구하려고 나섰다가 8년간 철창 신세를 지고 만다. 하티건은 <씬 시티>에서 가장 나이 많고 로맨틱한 영웅이자 배우 그 자체가 가장 많이 드러난 캐릭터이다. 브루스 윌리스는 로드리게즈가 만들어둔 5분짜리 푸티지(이것은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로 쓰였다)를 절반도 안 보고서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밀러는 브루스 윌리스가 "누아르 영화의 모든 레퍼런스를 완벽하게 이해한 배우"라며 만족해했다. "그는 이미 챈들러의 이론에 따라 만들어진 현대적 기사의 모습을 가졌다. 미키 루크가 우리의 디오니소스였다면 브루스 윌리스는 우리의 아폴로였다."

낸시 _제시카 알바

“초라한 살롱을 상상해보라. 늘 맡는, 구린 냄새가 나는 곳. 거기 무대가 있다. 불이 들어온다. 당신은 최악을 상상한다. 그런데 나와서 춤추는 건 천사다. 완벽하다. 우아하게 아름답다. 현실로 이뤄진 꿈. 낸시. 낸시 캘러핸. 그녀는 놀랍다.” 술집 댄서 낸시에 관한 밀러의 묘사는 캐릭터의 전체를 담고 있다. 베이신 시티 따위에서 볼 수 없는 순수함을 가졌고 숫처녀인 그녀는 하티건을 사랑한다. TV시리즈 SF물 <다크 엔젤>로 스타덤에 오른 제시카 알바는 “내가 이제껏 해보지 않은 영역이라 끌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원작에서만큼 과감한 의상과 누드를 보여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아빠 때문에 절대로 할 수 없다. 위아래 둘 중 하나만 벗어던져도 아마 아빠는 날 호적에서 파고 집에서 내쫓을 거다.”

케빈 _엘리야 우드

케빈은 식인을 하는 남자다. 그의 얼굴은 침착하고 고결한 지식인의 풍모를 가졌지만 그의 열 손가락 끝엔 늑대의 것보다 단단하고 날카로운 손톱이 갈퀴처럼 뻗어 있다. 순수한 호빗족을 위해 쓰일 것만 같았던 엘리야 우드의 매끈한 피부와 선한 눈빛은 이 캐릭터가 가진 이중성을 부각시킨다. <패컬티>에서 우드와 작업한 바 있는 로드리게즈는 "엘리야 우드에게서 늘 킬러의 모습을 보곤 했다"고 캐스팅 배경을 밝혔다. "<패컬티> 때 그의 강렬한 파란눈을 보면서 맨날 생각했다. 언젠가는 싸이코 역할로 꼭 캐스팅할 거야."

드와이트 _클라이브 오언

베이신 시티에 사는 또 하나의 마초 캐릭터 드와이트는 사진기자 출신의 사립탐정이다.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말쑥한 얼굴은 외로운 미녀들의 몸과 마음을 사로잡지만, 폭력을 탐식하는 내면은 부패와 범죄로 너덜너덜해진 도시를 닮았다. "혼란에 빠진 남자"라고 밀러가 설명하는 드와이트는 <킹 아더>나 <클로저>를 보지 않은 두 공동감독이 유난히 까다롭게 캐스팅한 인물이기도 하다. 프랭크 밀러는 인터넷에서 우연히 BMW 광고를 보고 오언을 로드리게즈에게 추천했다.

셸리 _브리타니 머피

셸리는, 음울한 베이신 시티의 웨이트리스만 아니었다면 훨씬 생기발랄한 소녀였을 것이다. 그녀는 과격한 애인에게 얻어맞은 다음날에도 단골 손님들에게 애교있는 인사말을 건네고 새로온 손님들에게 섹시한 윙크를 날리는 여자다. 브리타니 머피는 로드리게즈가 <패컬티> 때 거의 함께 작업할 뻔 했다. 로드리게즈는 "셸리를 연기할 배우는 하나밖에 없다"고 밀러에게 단언했고, 셸리를 그리면서 허스키한 음성을 늘 상상했던 밀러는 브리타니 머피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설득당했다.

재키 보이 _베니치오 델 토로

발랄한 닉네임 재키 보이의 본명은 잭 래퍼티다. 그는 밤이 되면 거칠고 난폭한 깡패집단 두목 재키 보이로, 낮에는 그런 깡패들을 쓸어담는 형사 잭 래퍼티로 산다. 분열증적인 캐릭터 재키 보이에 대한 설정은 <씬 시티>의 공간이 의도하는 양면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로드리게즈는 애초 이 역할을 조니 뎁에게 주려고 했었다. 조니 뎁도 승낙했는데, 그의 다른 영화 촬영이 지연되면서 합류가 늦어지는 동안 로드리게즈는 "완벽한 재키 보이" 베니치오 델 토로를 오스카 시상식 자리에서 조우하고 말았다 한다.

옐로 배스터드 _닉 스탈

악당 옐로 배스터드는 오로지 탐욕과 집요함과 잔인함만 가졌다. 그는 부패한 상원의원이자 베이신 시티의 최고 권력자인 로어크가 멋대로 키운 아들이다. 끔찍한 꼴로 변한 그의 노란 피부에서는 지독하게 구린내가 난다. 밀러는 “코믹북은 한번도 아동용인 적이 없음을 상기시키려고” 이처럼 소름 끼치는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배우 닉 스탈은 인간 로어크와 (비인간 같은) 옐로 배스터드를 연기할 때 서로 전혀 다른 목소리를 낸다. 로어크 주니어와 옐로 배스터드의 캐스팅을 분리해야된다고 생각했던 로드리게즈는 닉 스탈이 자동응답기에 남겨놓은 목소리 연기를 듣고 이튿날 그를 캐스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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