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씬 시티>는 범죄영화 버전의 <스타워즈>”라는 프랭크 밀러의 말처럼, <씬 시티>는 디지털로 창조된 신천지이며 블루 프린트의 마법이다. 특수효과 슈퍼바이저 역할까지 떠맡은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밀러의 책으로부터 뜯어낸 이미지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기는 것을 원했다. “원작이 지닌 경천동지의 비주얼을 온전하게 보존하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였기 때문이다. 프랭크 밀러가 그려놓은 이미지 속의 조명과 비주얼을 디지털의 도움없이 창조하는 것은 완벽하게 불가능한 미션이었다.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모든 장면을 그린 스크린 앞에서 촬영해 디지털 배경과 합성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촬영기간 단 2주, 밀러의 원작과 합성
사실, 영화 전체를 그린 스크린에서 찍어서 디지털 배경과 합성하는 방식은 2004년작 <월드 오브 투모로우>에서 약관의 케리 콘랜이 먼저 시도한 것이다. 하지만 <씬 시티>는 그보다 더 까다로운 작업을 요하는 프로젝트였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가 완벽한 상상의 현실화라면, <씬 시티>는 이미 완성된 세계의 재현이다. 로드리게즈와 밀러는 오스틴의 ‘트러블메이커 스튜디오’로 들어가 단 2주 동안 모든 실사 연기를 그린 스크린 앞에서 찍어냈다. 로케이션의 제약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2주의 시간이면 충분했던 것이다. <스타워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그린 스크린 앞에서 허공을 마주보고 연기를 해야 하는 배우들이 제몫을 해내리란 보장은 없다. 다만 로드리게즈는 그와 상반되는 견해를 피력한다. “그린 스크린 앞에서 작업하면 배우들의 연기가 탄성과 신선함을 잃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배우들이 세트나 외부환경의 변화에 노출되지 않는다면 연기에 더욱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로드리게즈는 그린 스크린의 연기를 신속하게 담아낸 뒤, 거기에 프레임 바이 프레임으로 몰핑한 밀러의 원작 이미지를 덧입혔다(효율적인 작업을 위해 사용한 디지털카메라는 <스타워즈 에피소드3: 시스의 복수>에서 조지 루카스가 사용했던 소니의 HFC-950s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로드리게즈가 색채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특수효과팀은 컬러로 찍힌 장면들에서 컬러를 제거하고, 그렇게 흑백으로 변환된 화면에 인공적인 색채를 입혔다. 이런 작업은 코믹스의 인공적인 색채와 조명을 살려낼 수 있는 동시에, 강렬한 상징적 의미들을 장면에 부여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예를 들어, ‘옐로 배스터드’는 흑백화면 속에 빛나는 그의 노란색 피부 덕분에 더욱 강렬해 보인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피의 색깔이다. 로드리게즈는 캐릭터들의 피를 붉은색으로 칠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심화시키고, 피를 매우 만화적인 하얀색으로 칠함으로써 끔찍한 장면의 역겨움을 순화시킨다. 이런 색채의 사용은 고전적인 필름 누아르의 무대 속에서 인물들의 욕망을 뚜렷이 전달하는 동시에, 이야기를 끌어가는 도구로서도 능동적인 효과를 거둔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가 그린 스크린 영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면, <씬 시티>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만이 할 수 있는 방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로드리게즈의 디지털 실험이 그저 기술적인 경도에만 머무르지 않았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는 <펄프 픽션>처럼 3개의 이야기가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이야기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세팀의 각기 다른 특수효과팀을 고용하기도 했다. 이런 비전형적인 방식은, 각각의 스토리가 감성적으로 고유의 완결성을 지닐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트러블 메이커 스튜디오, 정말 트러블하군
<씬 시티>의 디지털 실험은 모두 로드리게즈가 설립한 텍사스주 오스틴의 ‘트러블 메이커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졌다. “트러블 메이커 스튜디오에서 우리는 사람들의 꿈속에서 빠져나온 이미지와 세상을 그대로 창조해낼 수 있었다”는 로드리게즈의 의기양양한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의 명령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것은 무한한 창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과 동의어였다. 로드리게즈가 <씬 시티>를 만드는 동안 트러블 메이커 스튜디오에 들렀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는 “내가 그토록 공들 들였던 조에트로프 스튜디오의 최종적인 꿈이 바로 이런 것이었다. 많은 예술가들을 데리고서 다양한 프로젝트들을 실험하고 창조하는 장소 말이다”라며 감상에 젖었다고 전해진다. 원작자인 프랭크 밀러 역시 도무지 흥분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고 회상한다. 자신이 펜끝으로 창조한 인물과 도시가, 아무런 제약없이 움직이는 이미지로 화하는 순간을 목도한 조물주의 기쁨이었을까. 그러고보니, 로드리게즈가 자비를 들여가면서까지 트러블 메이커 스튜디오를 설립한 취지는 다음과 같았다고. “창조적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세우는 것! 그럼으로써 주류 영화계에 커다란 문제(트러블)를 일으키는(메이커) 것!”
그린 스크린 앞에서 연기하기
“그린 스크린 연기 수업 과목, 개설하라!”
헤이든 크리스텐슨은 <스타워즈 에피소드> 시리즈 촬영을 마치고 “배우들을 위한 그린 스크린 연기 수업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다. <씬 시티>의 배우들은 그 마음이 오죽했을까. 그린 스크린 연기는 없는 것들을 상상하는 연기의 문제다. 그 녹색의 무대 위엔 배우의 신체가 닿는 소품들을 제외하고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테이블은 있지만 문은 없다(열고 나갈 게 아니면). 창틀은 있고 벽은 없다. 베니치오 델 토로는 “그런 상황에서는 모든 것이 내 상상 속에만 있을 뿐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오로지 그린 스크린에 대한 관심을 끄고 내 마음속에 그 공백을 채워넣는 것”이라고 말한다.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원작을 현장 모니터 옆에 갖다놓음으로써 배우들이 감각을 잃지 않게 도왔다.
또한 이것은 ‘부재하는 환경을 상상하는 문제’만이 아니다. 그린 스크린 연기는 디지털 촬영을 전제로 한다. 배우들은 필름카메라보다 몇배 빠른 촬영 속도를 감당해야 한다. 심지어 로드리게즈는 현장 진행 속도가 굉장히 빠른 감독에 속했다. 디지털카메라의 속도에 로드리게즈의 속도까지 떠안게 된 배우들은, 현장을 엄청난 기억력으로 덤비는 수밖에 없었다. 브루스 윌리스는 “감독은 컷도 안 부른다. 내 분량도 10일 만에 촬영이 끝났다. 다른 영화 같았으면 6주 내내 촬영했을 분량이다(로드리게즈는 <씬 시티>의 세개의 에피소드를 각각 2시간 버전으로 확장해 DVD로 출시한다는 계획을 갖고 촬영에 임했다. 각 파트의 배우들은 영화 1/3편이 아닌 온전한 한편을 찍은 셈이다). 카메라는 계속 돌리면서 주문은 또 엄청나게 해댄다. 엄청난 양의 기억에 의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하소연하기도 했다.
브리트니 머피나 제시카 알바처럼 젊은 배우들은 적응이 빠른 편이었다. 제시카 알바는 “그린 스크린 액팅은 굉장히 자유스럽다”고 말했다. “집중을 흩뜨리는 배경 요소들이 완전히 벗겨진 무대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문제되는 것은 연기다.” 베니치오 델 토로가 그 적응력에 감탄한 브리트니 머피는 브루스 윌리스가 불평해 마지않은 ‘쉴 틈 없는 촬영’을 “이 현장에서 가장 훌륭했던 점”이라고 표현했다. “필름이 얼마나 남았나 신경쓸 것 없이 많은 창조력을 계속 발휘해볼 수 있다.”
비단 그린 스크린 연기가 아니더라도 <씬 시티>는 배우들의 연기를 제한하는 틀이 많은 영화다. 만화니까 가능한 앵글과 미장센, 지나치게 양식화된 캐릭터, 도저히 범인(凡人)들의 말 같지 않은 대사, 대사만큼 많은 내레이션 등등. 평소보다 더 많은 종류의 테크닉과 동물적 감각을 요구받은 배우들이 그린 스크린 연기와 관련해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로드리게즈에 대한 평가다. 배우들은 로드리게즈 감독이 낯선 테크놀로지로 가득한 현장을 아주 편하게 만들어주었다고 말했다. 스튜디오 트러블 메이커의 공동설립자이자 <씬 시티>의 프로듀서인 엘리자베스 아벨란은 이렇게 부연한다. “로드리게즈는 언제나 테크놀로지를 사랑해온 사람이다. 그는 모든 가능한 것들의 최첨단에 있어왔고 늘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내고 싶어했다. 규모를 키우고 무모한 실험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의 사용을 합리화한다. 그것은 예산의 문제에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최대한의 독창성을 끌어내는 문제에도 적용된다.” 이런 로드리게즈를 믿고 미키 루크는 “난생처음”이라는 그린 스크린 앞에서 마브를 연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