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
프랑스의 검은 영화 속으로, 시네 프랑스
2006-03-15
글 : 홍성남 (평론가)
하이퍼텍 나다, 4월25일까지 프랑스 범죄영화 8편 상영 중

장 피에르 멜빌은 언젠가 프랑스 범죄영화에는 알랭 들롱과 장 폴 벨몽도라는 두개의 포맷만이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영화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이라면, 현상을 다분히 단순화한 이 말을 (맥락을 놓친 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대략 루이 푀이야드의 <팡토마>나 <쥐덱스>에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는 프랑스산 범죄영화들이 스타일화한 폭력을 그리거나 사회비판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식의 다양한 하위범주들을 만들어내며 다수의 스타들과 주요 감독들을 끌어들이거나 배출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하이퍼텍 나다의 시네 프랑스 두 번째 시리즈인 ‘프렌치 캅스, 범죄현장을 가다’는 프랑스 범죄영화의 다채로운 맛을 볼 수 있는 기회다. 3월7일부터 4월25일까지 매주 화요일 저녁에 상영되는 여덟편의 영화가, 흔히 폴라(polar) 혹은 폴리시에(policier)라 불리는 프랑스 범죄영화만의 독특하게 쿨하며 멜랑콜리한 세계를 보여줄 예정이다.

<함정>

우선 장 들라누아 감독의 <함정>(Maigret tend un piege, 1957년, 116분, 흑백, 4월18일 상영)은 프랑스영화가 가장 영광을 누리던 시절에 우수(憂愁)의 아이콘 역할을 했던 장 가뱅을 만날 수 있는 영화다. 여기서 그는 조르주 심농의 유명한 소설 속 인물인 메그레 경감이 되어 여자들만 살해하는 연쇄살인범을 추적하는 일을 맡는다. 들라누아의 수작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이 영화는 숨막힐 듯한 분위기를 창조하고 긴장의 상승과 증폭을 통제하는 연출력도 돋보이지만 영화의 중심에는 무엇보다도 가뱅의 묵직한 존재감이 놓여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아무리 작품들마다 질적인 편차가 크다고 할지라도 클로드 샤브롤이 프랑스 범죄영화의 대표적 영화감독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데는 이견이 있을 수 없다. 샤브롤의 86년작인 <형사 라바르뎅>(Inspecteut Lavardin, 100분, 컬러, 4월4일 상영)은 그만의 유희의식이 잘 배어 있는 범죄영화다. 영화는 <닭초절임>(1985)의 속편 격에 해당하는 만큼 또다시 괴짜에다가 호전적인 라바르뎅을 출연시켜 살인이 연루된 미스터리의 장소로 파견한다. 그래서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즉 피살자의 아내이자 자신의 옛 연인이기도 한 여인, 그녀 가족과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이들이다. 유머를 곁들여 이 상황을 가로지르는 과정이 정체성의 전도를 차츰 드러내는 것이란 점이 특히 흥미롭다.

<357 구경>(Police python 357, 1976년, 125분, 컬러, 4월25일 상영)은 프랑스 범죄영화의 전개를 보여준 또 다른 감독, 바로 알랭 코르노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이브 몽탕이 연기하는 주인공 페로 형사는 자신과 연인 관계를 맺었던 젊은 여인 실비아가 살해당하자 그 사건을 담당하게 된다. 그런데 수사의 과정은 범인을 페로 자신쪽으로 몰고 가고 만다. 그는 자신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위해 수사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빠진 것이다. 덫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는 그의 몸부림을 긴박감 넘치게 그린 <357 구경>은 흥미진진한 엔터테인먼트의 형식 안에 소외된 실존의 문제를 넘치지 않게 융합해낸 영화라 할 만하다.

베르트랑 타베르니에 감독 스스로 “스릴러 장르 고유의 양식적 효과들을 거부하려” 했다고 말한 것처럼, 그의 91년작인 <L.627>(145분, 컬러, 3월28일 상영)은 앞의 영화들이 속한 장르적 틀을 많이 벗어난 범죄영화다. 영화는 직업적 의무에 충실한 마약단속반 경찰 룰루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지만 여느 범죄영화와는 달리 그의 호쾌한 ‘활약’이 아닌 반복되는 나날의 경찰 작업 과정과 그 상황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방식의 시선으로 들여다본다. 그렇게 함으로써 영화는 궁극적으로 그 이상의 빛이 바래고 만 사회의 상태를 영화로서 정의하고 ‘시스템’의 무능함과 부패함을 문제삼으려 한다. 덕분에 <L.627>은 정부쪽으로부터 “불공정하고 허위에 가득한 희화화”를 제시했다는 비난을 듣는 등 이런저런 논란에 휘말려야 했다.

이번 상영회에는 프랑스 범죄영화의 ‘옴므 파탈’(homme fatal) 알랭 들롱이 발하는 차가운 매력을 접할 기회도 마련되어 있다. 그가 딸의 죽음에 복수하는 경찰로 나오는 <형사의 명예>(Parole de flic, 조제 피네이로 감독, 1985년, 96분, 컬러, 3월14일 상영)는 들롱이 각본 작업에 참여했을 뿐 아니라 주제가도 불렀다는 점에서 눈길을 끄는 영화이기도 하다. 한편, 사립탐정과 그의 여자친구가 한 항구마을에서 겪는 이야기를 다룬 <문어>(Le Poulpe, 기욤 니쿨루 감독, 1998년, 100분, 컬러, 4월11일 상영)와 <쎄븐>의 자장 안에 놓인 듯한 살인 이야기 <범죄 현장>(Scene de crimes, 피에르 쇤도르페르 감독, 2000년, 100분, 컬러, 3월21일 상영)은 프랑스 범죄영화의 최근 경향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영화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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