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점유율 40% 시대의 고민 [3]
2001-08-17
글 :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고민2 : 볼수있는 영화가 없다?

배급독과점 - 스크린 216개 개봉작 7개, 시장논리가 다양성을 죽인다

지난해 배급사별 시장점유율 1, 2위를 차지한 CJ엔터테인먼트와 시네마서비스는 연초에 상반된 전망을 내놓았다. “올해는 할리우드영화들이 세다. 피해가는 게 상책”이라는 게 CJ의 입장이었던 반면 시네마서비스 대표 강우석 감독은 “여름 극장가까지 한국영화가 휩쓸 것”이라고 자신했다. 결과는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의 흥행으로 드러났다. 요즘 시네마서비스 배급팀은 행복한 고민에 휩싸여 있다.

<신라의 달밤> <엽기적인 그녀>에 이어 <세이 예스>까지 개봉시키자니 극장잡기가 만만치 않다. <엽기적인 그녀>를 걸기 위해 <신라의 달밤>을 종영시킬 수도 없고 <세이 예스>를 위해 <엽기적인 그녀>에 양보를 부탁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영화 1편 걸기도 만만치 않은 시기에 3편을 배급하는 지금 상황은 1년 전만 해도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시네마서비스 배급팀 이사 최용배씨는 격세지감을 느낀다. 1999년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자귀모>를 여름에 개봉시키면서 불안해하던 생각을 하면 흥행확률 90%가 넘는 영화들이 줄지어 서 있는 지금 상황이 낯설 수밖에 없다. 90년대 중반 대우 영화사업부에서 일했던 그는 한국영화가 지금과 같은 힘을 갖게 된 데는 “메이저 배급사의 출현이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말한다. “개별 영화사가 1년에 1∼2편 제작해서 직접 배급하던 시절엔 1년치 배급물량을 확보한 직배사와 경쟁이 안 됐다. 시네마서비스, CJ로 대변되는 한국영화 메이저 배급사가 생긴 뒤로 직배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사실 시네마서비스가 탄탄한 1년 라인업을 짤 수 있었던 것도 불과 2년 전 일이며 CJ도 지난해 비로소 안정적인 한국영화 배급체계를 갖췄다. 강우석 감독은 한국영화를 배급하는 메이저가 1∼2개 더 생기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올 상반기 1위를 차지한 <친구>의 코리아픽처스, <엽기적인 그녀>의 아이엠픽처스, <파이란> <수취인불명> 등을 배급한 튜브엔터테인먼트 등이 그 후보로 떠오르는 상황이다.

<친구> 제작사도 극장을 못 잡는다

그러나 <신라의 달밤>과 <엽기적인 그녀>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눌렀다는 사실만으로 배급시장이 제대로 굴러가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시장논리가 다양성을 죽이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선택의 폭이 넓은 메뉴를 제공하리라 기대했던 멀티플렉스는 올 여름 한 영화가 3∼4개관씩 차지하는 극약처방을 택했다. 무려 16개관을 갖춘 메가박스에서 7월 첫주 볼 수 있었던 영화는 5편에 불과했으며 7월 첫주와 둘쨋주 극장에 새로 걸린 영화는 통틀어 7편이었다. 이런 현상이 빚어진 1차적 이유는 ‘무조건 개봉관을 많이 잡겠다’는 와이드 릴리스(Wide Release) 배급전술 탓이다. 지난 6월1일 여름영화로서 가장 먼저 개봉한 <진주만>은 서울시내 전체 스크린 수 216개 가운데 3분의 1에 해당하는 72개 스크린을 확보했다. 이에 뒤질세라 <미이라2>가 65개, <툼레이더>가 59개, <슈렉>이 50개, <신라의 달밤>이 48개, <엽기적인 그녀>가 45개, <쥬라기공원3>가 44개 스크린에서 개봉했다. 영화 1편당 스크린 수가 40개를 넘다보니 극장에 걸릴 수 있는 영화 편수가 10편을 넘지 못하는 상황이 됐다. 5대 직배사와 시네마서비스, CJ, 튜브 외에 중소배급사 가운데 7월에 영화를 개봉한 곳은 거의 없다. <친구>로 상반기 점유율 1위를 기록한 코리아픽처스조차 끼어들 엄두를 못 낼 만큼 올 여름 극장잡기 경쟁은 치열했던 것이다. 스크린 확보전쟁은 영화의 수명을 단축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전국 200만명을 넘긴 <진주만>이 개봉 5주 만에 메가박스 1개관을 제외하고 전부 간판을 내린 것은 상징적이다. 이처럼 영화의 회전율이 빨라진 것은 배급사의 와이드 릴리스 전술과 극장쪽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극장은 되도록 빨리 간판을 바꿔줌으로써 수익을 극대화하고 배급사는 초반에 왕창 벌고 빠진다. 배급사와 극장 모두 만족스럽지만 관객 입장에선 괜찮을 수 없다. 입맛대로 선택할 폭이 좁아지고 그나마 선택을 하더라도 서두르지 않으면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시내 216개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영화가 7편에 불과했던 건 여름 시즌에 한정된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이런 경향 자체는 지속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견해다. 비수기에 상대적으로 틈새가 많다 해도 와이드 릴리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와이드 릴리스 일변도의 배급방식은 제작에도 영향을 끼친다. 미국에서 블록버스터라는 개념이 생기면서 보편화된 와이드 릴리스는 작품의 질보다 마케팅에 신경을 쓰는 영화를 양산했다. 덕분에 전체 관객 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반대급부로 질적 하락을 동반할 가능성도 크다. 당연히 미국에선 와이드 릴리스하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가 확연히 갈리고 각각에 맞는 배급전술을 구사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선 와이드 릴리스 외에 다른 배급방식이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인다. 개봉주말 성적에 따라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심정이 되는 제작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와이드 릴리스를 선호한다. 여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다. 영화의 회전율이 빨라진 탓에 개봉 첫주 성적이 나쁘면 바로 간판을 내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극장들도 와이드 릴리스하는 영화를 선호한다. 결국 중소규모의 영화, 작가영화, 예술영화 등이 끼어들 자리가 좁아지고 제작하기도 힘들어지는 악순환이 이뤄지는 것이다. 2000년 1월 개봉한 <박하사탕>이 서울관객 30만명을 넘긴 것은 요즘 상황에 견주어볼 때 놀랍다. 당시 익영영화사 배급담당으로 <박하사탕>을 배급한 코리아픽처스 배급팀장 김길남씨는 개봉관 수를 줄이고 장기상영하는 배급방식이 주효했다고 말한다. 시네마서비스 최용배 이사도 다양한 배급방식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주유소 습격사건>은 개봉 첫주보다 둘쨋주에 관객이 더 많이 들었고 뒷심을 발휘한 덕에 장기흥행에 성공했다. 두 영화 모두 올해 개봉했다면 상황이 달랐겠지만 와이드 릴리스가 능사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예이다.

<타인의 취향>이 주는 교훈

최근 <타인의 취향>의 성공사례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씨네큐브 한 극장에서 개봉한 이 영화는 평균 좌석점유율 70%를 넘기며 지금까지 2만7천여명의 관객을 모았다. 백두대간 이사 마상준씨는 “<타인의 취향>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아무리 블록버스터 시즌이라도 이런 유의 영화를 보려는 관객은 존재한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문화학교 서울 주최로 아트선재센터에서 열린 에릭 로메르 회고전이 6천명 넘는 관객을 동원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에릭 로메르 회고전이 성황을 이룬 배경엔 극장가의 과도한 편식 때문에 갈 곳이 마땅치 않은 관객이 많았던 점도 작용했다. 한 가지 희망적인 것은 스크린 수가 급속히 늘고 있다는 점이다. 서울, 피카디리, 단성사, 신영, 대한극장 등이 증관 또는 멀티플렉스화를 시도하고 있어 서울 시내 스크린 수는 머지않아 300개에 이를 것이다. AFDF 배급팀장 김선호씨는 “올 여름의 집중현상은 과도기적 현상”이라며 “스크린 수가 300개가 되면 중소규모 영화에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내다본다. 하지만 그도 “시장논리에 모든 걸 맡기는 건 위험”하다는 데 동의한다. 명필름의 이은 이사는 “지금은 제작비 규모가 얼마가 됐든, 예술영화든 상업영화든 같은 배급망을 탈 수밖에 없다. 예술영화전용관, 독립영화전용관 등 차별화된 극장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정책적 배려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백두대간 마상준 이사는 현재의 지원방식이 유명무실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술영화전용관에 문예진흥기금 환급 혜택을 주는 정도인데 그나마 내년부터는 문예진흥기금 자체가 없어진다. 빨리 다른 방식의 지원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분명한 건 영화시장이 지금 새로운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엔 직배사의 독점에 맞설 만한 규모있는 메이저 배급사가 절실히 요구됐지만 이제는 규모가 작은 영화도 빛을 볼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게 시급해졌다. 한국영화라는 사실만으로 지지와 응원을 끌어낼 수 없는 지금은 ‘다양성의 확보’라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배급방식의 변화이든 정책적 지원이든 여러 종류의 영화가 고루 빛을 볼 수 없다면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의외로 짧게 끝날 수도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부율, 이제는 말할 때

“한국영화도 외화처럼 대접해달라”

극장에서 한국영화는 오랫동안 찬밥신세였다. 스크린쿼터제가 없었다면 명맥을 유지하기 힘들었을 한국영화가 그나마 극장에 걸릴 수 있던 데는 부금비율(부율)이 극장쪽에 유리하다는 점도 작용했다. 현재 배급사와 극장은 외화는 6:4, 한국영화는 5:5라는 부율을 지키고 있다. 한국영화를 걸면 극장이 취하는 몫이 많다는 얘기다. 마지못해 한국영화를 걸던 시절에 만들어진 부율이 지금도 그대로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흥행 순위 앞머리를 한국영화로 도배하는 상황에서 이런 부율은 당연히 불합리하다.

한 배급사 관계자는 “제작자들이 아직 별다른 얘기를 꺼내지 않는 게 의아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지금까지 제작가협회, 영화인협회, 영화인회의 등 어느 단체에서도 부율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일은 없다. 제작가협회 회장인 기획시대 대표 유인택씨는 “배급사, 투자사, 제작사가 한목소리를 내야 되는 데 극장의 힘에 밀리는 듯한 인상이 있다”고 말한다. 극장쪽 반발을 무마할 만한 조직력이 필요한 일이라는 것. 하지만 부율조정의 필요성에 동의하지 않는 제작, 투자, 배급 관계자는 없다. 메이저 제작사들과 배급사가 공조하면 의외로 쉽게 해결될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누군가 먼저 얘기를 꺼내고 공동대응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점. 명필름의 이은 이사는 “제작가협회가 됐든 메이저 영화사 관계자들의 모임이 됐든 빨리 부율문제를 공론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에선 부율을 좀더 탄력적으로 운용하자는 주장도 있다. 상영기간이나 영화의 성격에 따라 부율이 달라지는 것이 지금처럼 외화 대 한국영화라는 단순한 이분법에 비해 훨씬 합리적이라는 얘기. 상영기간에 따른 부율조정이 자유로워지면 장기상영이 수월해지고 그러면 와이드 릴리스 배급방식에만 매달리지 않아도 된다. 한국영화 부율을 외화와 동등하게 만든 뒤에 고민할 문제이긴 하지만 지금이 부율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필요한 시점인 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