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한국영화 점유율 40% 시대의 고민 [4]
2001-08-17
글 : 이영진
고민3 : 배우가 없다

캐스팅난 - 스타급 배우에겐 시나리오 200편, 캐스팅 좌절로 프로젝트 무산 속출

한국영화의 1편 평균 제작편수가 60편을 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돈이 없어서? 감독이 없어서? 촬영감독이 없어서? 시나리오가 없어서? 다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는 요소지만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배우가 없어서다. “배우가 없어 영화 못한다”는 소리야 하루이틀 듣던 게 아니지만 최근 스타급 배우를 확보하려는 충무로 제작사들의 구애는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열명 안팎의 스타급 배우들에게 200여편의 시나리오가 몰리다보니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손에 꼽는 배우들이 많아야 1년에 2편, 평균적으로 1년에 1.5편씩 출연하고 있는 게 고작이다. 시나리오는 나왔는데, 배우들로부터 확답이 없으니 제작자들은 모였다 하면 푸념뿐이다. 배우와의 만남조차 갖기 어려울 정도인 신생 또는 군소 제작사의 경우, 그 불만의 톤은 매우 높다. 혹시 그 배우가 시나리오를 읽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확답을 안 주는 경우도 다반사다. 그러는 동안 프로덕션 일정은 늦추어진다. 캐스팅 불발로 인해 보류되거나 아예 폐기되는 프로젝트도 속출한다. 한국영화 시장점유율 40% 시대, 캐스팅 전쟁은 한국영화가 떠안아야 하는 또 하나의 고민이다.

캐스팅이 펀딩 여부 결정

표면적으로는 공급과 수요의 불균형에서 제작자들의 고민이 온다. 금융, 벤처자본이 유입되고, 제작환경이 나아지면서, 기획중인 영화들은 늘어났지만 정작 그 영화를 만들기 위한 자본들은 캐스팅이라는 또 하나의 난관을 넘기 전까지 좀처럼 붙지 않는다. 캐스팅이 일단 관건인 것이다. 다다필름의 유영식 프로듀서는 “고의가 아니라고 믿지만 매니저들이 장난치는 경우도 많다. 그런데도 제작사는 매달릴 수밖에 없다. 캐스팅 여부에 따라 프로덕션이 들어갈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시나리오가 좋다고 하더라도 배우 입장에서는 덥석 집진 않는다. 투자, 배급 등 안전장치까지 다 따지고 이후 이미지 관리까지 신경쓴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가닥 희망(?)을 버릴 수 없는 이유는 뭘까. 한맥영화의 김형준 대표에 따르면, “캐스팅 여부가 투자사로부터 펀딩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가름하는 중요한 작업”이라는 것. 그가 보기에 투자자본의 규모나 성격이 다르지만, 10여년 전 비디오 판권을 넘긴 뒤 받은 돈으로 영화를 만들던 당시 비디오업계에서 최민수를 선호했던 것처럼, 투자사가 흥행을 담보로 한 캐스팅을 투자의 전제조건으로 내건다는 것이다. 무한기술투자의 최재원 이사는 스타급 배우들이 흥행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판’이라고 말한다. 그는 “투자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흥행수익 및 제작비 회수에 대한 고려를 할 수밖에 없다”며 “캐스팅 능력은 시나리오와 함께 제작사가 프로덕션을 진행할 수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하다”고 덧붙인다.

제작사와 배우간의 이같은 비대칭적 구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주연급 배우들의 개런티 상승폭이다. 특히 지난 2∼3년간 주연급 배우들의 개런티가 대폭 오르면서, 제작비 상승의 상당부분을 차지했다. 현재 남자배우 중 가장 높은 출연료는 3억원대. 불과 세 작품 만에 1500만원에서 1억5천만원으로 10배 이상 뛴 배우도 있다. 상대적으로 완만하지만 여자 톱배우의 경우도 작품마다 50% 이상씩 상승하고 있다. 투자사인 KTB의 하성근 팀장은 “시장규모가 커질수록 작품당 제작비 규모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물론 배우들이 가져가는 몫 또한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50억원 규모의 영화에서 요구하던 바를 10억원짜리 영화에서 요구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에 반해 송강호, 최민식, 김석훈 등의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는 전영민 마니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논의할 생각은 있으나, 오히려 철저히 시장 중심으로 끌어가야 하는 게 옳고, 배우들의 개런티에 있어 상향선을 두지 않는 만큼 하향선도 없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한다.

이제 스타를 만들자!

산업화를 위해 필수적인 거대 매니지먼트사의 등장도 아직 안정화된 단계가 아니다. 미국의 경우 매니지먼트사와 제작, 배급사가 철저히 전문화돼 있지만 국내 상황은 두 가지가 혼재해 있다. 싸이더스, 강제규필름 등 제작사나 투자사가 매니지먼트를 포괄하는 경우나 매니지먼트사가 제작에 욕심을 내는 경우 모두 과도기적인 현상이라는 지적이다. 특히 매니지먼트사가 벤처캐피털의 자본을 끌어들이고 소속 배우들을 내세워 직접 제작에 참여하는 것은 배우 캐스팅이 제작여부를 가늠하는 결정적 열쇠가 되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경우가 이영애, 안재욱, 송윤아, 이나영, 고호경 등이 소속되어 있는 대규모 매니지먼트사 에이스타스로, 자체 영화사업부를 두고 11월에 <라이터를 켜라>라는 작품의 크랭크인을 준비중이다. 스타급 배우들을 보유하고 있는 이들로서는 영화제작 투자에 뜻을 두고 있으나 마땅히 끈이 없는 벤처자본을 끌어들이기 유리한 상황. 한 관계자는 “아직도 영화제작에 뜻을 둔 벤처캐피털은 많다. 장기적으로 갈 생각이라 아직은 제한을 두고 있다”면서 “자사영화에만 소속 배우들을 출연시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장동건과 신은경 등이 각각 소속된 MP엔터테인먼트와 윌스타엔터테인먼트가 영화제작에 뛰어들 준비단계를 갖추고 있고, 이미숙과 박제현 감독이 차린 메이필름이 <유리케이크>, 한석규의 형이자 매니저인 한선규씨가 만든 힘픽쳐스가 등의 영화제작에 배우를 앞세워 직접 뛰어든 터라 충무로에서 스타급 배우를 캐스팅하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

지금의 배우 기근이 단기간에 쉽사리 해소될 것으로 보는 이들은 거의 거의 없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신인들을 발굴, 육성하는 정책적인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시장 내에서 정면으로 문제를 풀어가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하이컨셉의 영화라면 굳이 스타가 필요없어도 성공할 수 있다”(명필름 심재명 대표), “오히려 지금 각 제작사들이 좀더 꼼꼼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을 만들어내는 게 필요한 것 같다”(기획시대 유인택 대표), “세련된 장르영화를 개발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스타 의존도가 적기 때문이다”(청년필름 김광수 대표) 등의 지적처럼 다양한 체질 개선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관객이 존재하는 한 스타가 있게 마련이고, 제작사가 이를 쫓는 것 또한 당연하다. 문제는 스타 역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이다. <초록물고기>에 출연한 송강호와 <복수는 나의 것>에 출연한 송강호는 개런티로 따지면 수십배 차이가 나지만 <초록물고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송강호도 없었을 것이다. <조용한 가족>이 최민식을 재발견하지 않았다면, <접속>이 전도연을 캐스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스타 캐스팅에 목을 매는 지금이야말로 스타를 기다리는 영화보다 스타를 만들어내는 영화가 절실한 때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 인터뷰

“캐스팅엔 피도 눈물도 없다”

명필름은 캐스팅이 쉽겠다고? 아니다. 우리도 힘들다. 요즘은 옛날처럼 의리 따지는 시대가 아닌 것 같다. 정말 피도 눈물도 없다. (웃음) 돌아보면, 명필름에서 제작한 작품 중 가장 캐스팅 때문에 애를 먹은 건 <접속>이었다. 이미 시나리오는 물론이고 스탭 구성까지 마친 상태에서 한석규, 전도연 캐스팅하는 데만 6개월이 걸렸다. 요즘은 더 힘들다. 다들 다작은 안 하려고 하니까. 배우들 입장에서는 신중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생명력도 고민해야 할 테고, 자기 플랜도 세워야 하고, 또 자신이 속한 매니지먼트사와 이미지에 대해 지향점을 맞추기도 해야 할 테고. 그러니 자본에 비해 스타가 없는 셈이다. 다행히 명은 메이저라고 불러줘서 투자사의 입김에 휘말릴 정도는 아니다. 그랬으면 <와이키키 브라더스>나 <욕망>은 힘들었겠지.

송강호씨? 좋은 배우이고 무게도 있고.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흥행을 100% 보장하는 배우는 없다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인지도야 도움이 되긴 하겠지. 그렇다고 <시월애>의 전지현과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은 다르지 않나. 그 차이가 뭐라고 생각하나? 사회적인 트렌드를 반영하고 분명한 장르가 있고 대중적인 이슈를 제기할 수 있는 소재라면 사실 유명하지 않은 배우라도 된다. 결과는 자신있다. 캐스팅하는 데 시간 오래 뺏겨서는 안 된다. 최근에 그런 적이 한번 있는데, 괜히 그런 후회가 들더라. 막연히 기대하지 말고 공격적인 캐스팅을 애초부터 생각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나마 2개월 정도에서 막을 내렸지만 좋은 교훈 하나 얻었다. 우리의 원칙과 할 일? 완벽한 시나리오가 나오기까지는 캐스팅 작업에 안 들어간다는 것이 하나. 아 그건 스타일이라고 보는 게 정확할 듯싶고. 두 번째는 <와이키키…>나 <라이방> 등 작지만 다양한 시도들이 성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 정도.

싸이더스 정훈탁 매니지먼트 담당 이사 인터뷰

“캐스팅보다 전체 프로덕션 상황이 중요”

배우들이 너무 많이 받는 건 아니다. 전체적인 수익구조를 따져보면 안 그렇다는 걸 알 거다. 설령 많다 치고, 시원하게 인센티브로 가자고 해도 받아들일 만한 제작사는 많지 않다. <엽기적인 그녀>? 처음에는 은근히 걱정했었다.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라 배우가 소모품이 되면 어떡하지 했었는데, 두 배우가 먼저 그러더라. 재밌는 원작 이기는 영화 못 봤다고.

캐스팅 디렉터라는 이름이 처음 붙긴 했는데,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배우가 적절할지를 연구하는 거라고 보면 된다. 지금 <화산고> <정글쥬스> <달마야 놀자>에서도 비슷한 일을 하고 있다. 각각의 배우들을 배치하고 붙여보는 것이 재밌다. 캐스팅보다는 전체적인 프로덕션 상황이 중요한 것 같다. 특히 캐릭터만큼은 먹힐 정도로 쥐어짜야 한다. 캐스팅은 그 다음 문제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매니지먼트 사업은 덩치 키우기 하느라 정신없잖은가. 큰 그림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린 배우들을 난처럼 돌본다. (웃음) 우리에겐 배우 보는 눈 같은 게 있다. 영화사에서는 잘 모르겠지만, 우린 잠재력까지 보고 쓴다. 매니지먼트사 돈 못 번다고 좀 하지마라. 큰 산업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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