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요하게 파고드는 한 남자의 마음
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
대학교수 이사(누리 빌게 세일란)는 방송국에서 아트디렉터로 일하는 연인 바하(에브루 세일란)와 여행을 하다가 갑자기 이별을 통고한다. 그가 내세우는 이유란 바하가 자신에 비해 너무 젊다는 것뿐이다. 이스탄불로 돌아와서 홀로 한 계절을 보낸 이사는 지금은 자신의 친구와 사귀고 있는 옛날 여자친구 세랍을 찾아가 정사를 가진다. 겨울을 맞은 이사는 바하가 드라마 촬영을 하고 있는 터키 동부로 휴가를 떠나고, 자신이 변했다며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지겠으니, 다시 만나달라고 애원한다.
<우작>으로 2003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던 누리 빌게 세일란은 <기후>에서 아내와 함께 주연을 맡았다. 오랫동안 일해온 <우작>의 배우 에민 토프락이 사고로 죽은데다가 터키 전역을 돌아야 하는 촬영에 참여하겠다는 배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사진작가였던 세일란처럼 카메라로 유적을 찍는 이사는 그의 분신처럼 느껴진다. 시나리오를 촬영 도중에 쓰고 리허설을 거의 하지 않은 채 연기를 했다는 세일란 또한 자신의 감정과 이사를 완전히 분리하기는 어렵지 않았을까. <스크린 인터네셔널>은 “이사가 세일란과 닮았다면 <기후>는 영화사에서 냉혹한 자화상 중 하나일 것”이라고 썼다.
그 때문에 <기후>는 세일란의 전작처럼 시적인 풍경과 서사의 여백이 많은데도 한 남자의 마음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바닥에 떨어진 땅콩을 여자에게 억지로 먹이는 데 몰두하거나 헤어진 연인과 하룻밤을 보낸 다음 하품을 하는 이사는 분명 치사한 인물이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 등장했던 몇몇 남자들처럼. 그러나 “시도는 해봤지만 도무지 나의 스타일을 버릴 수가 없었다”는 세일란은 수평으로 펼쳐지는 터키의 풍경과 오랜 시간 머물며 인물의 마음에 다가가는 클로즈업에 기대어 자신만의 감정을 창조한다. 애정은 아니지만,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동정과 공감을 희미하게 흩뿌리는 것이다. 세일란은 아직 이별을 깨닫기도 전인 바하가 멀리서 사진찍는 이사를 바라보며 왜 눈물을 흘리는지 결코 알려주지 않지만 그 마음은 대사가 아닌 공기를 통해 스크린 너머 관객에게 스며든다. 그 침묵의 연기는 감독이 바하와 이사, 혹은 에브루 세일란과 자신에 관해 잘 알고 있지 않다면 얻어내기 힘든 결과였을 것이다.
누리 빌게 세일란 감독 기자회견
"나의 관심은 내적인 풍경에 있다"
-당신은 아내인 에브루 세일란과 함께 연인을 연기했다. 그 때문에 <기후>는 당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로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배우를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고 다만 배우를 느낄 수 있을 뿐이다. <우작>을 찍으며 이미 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엄두를 내지 못하다가 HD카메라 덕분에 결심했다. 모니터로 내 연기를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 스타일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카메라를 고정하고 정지된 미장센을 찍는 방식 덕분에 나는 나의 연기를 컨트롤할 수 있었다.-<기후>는 당신의 전작인 <우작>에 비해 사적이고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영화다. 이런 변화는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우작>은 터키의 정치·경제적인 상황에 영향을 받는 인물들이 주인공이어서 그런 요소가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기후>도 바하가 동부로 떠나는 설정을 보며 많은 터키인들이 그곳으로 이주하고 있는 현재 상황과 연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나의 관심은 내적인 풍경에 있었고, 인물이 자신의 내면에 머무르기를 바랐다. 나는 지나치게 감상적이 되었다고 느끼면 외국으로 여행을 가곤 했는데, 그곳의 풍경은 텔레비전을 보는 것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기후>의 여행도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감정과 드라마의 표현이 모호한 편이다. 이사가 바하와 헤어지는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이사의 감정이 변하는 대목도 느닷없을 때가 많다.
=<기후>의 시나리오는 촬영을 하며 즉흥적으로 쓴 것이다. 처음엔 그저 단순하게 연인이 다투었다고 생각했고, 그 이유를 찾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관계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본질적인 문제보다 눈에 보이는 현상에 관해서만 떠들어대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대부분의 남자들이 이사처럼 감정을 표현하지 않다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격렬한 반응을 보이곤 한다고 생각한다.
실재하지 않는, 그러나 실체가 있는 전쟁
브루노 뒤몽의 <플란더스>
<플랑드르>는 실재하지 않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 실체가 분명한 어떤 전쟁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의 이라크전 참전을 암시하는 건조한 사막으로 파병된 플랑드르 지방의 청년들과 그들 뒤에 남겨진 한 여인의 이야기를 그린 <플랑드르>는 풍성한 녹색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플랑드르의 풍경과 대비되는 메마른 사막의 풍경과 인물들의 건조한 섹스, 건조한 시선, 건조한 표정들로 이루어진 영화다. 플랑드르에 살고 있는 데메스테는 바르브와 어렸을 때부터 친구로 지내고 있다. 둘은 가끔 섹스를 하기도 하지만 연인 관계는 아니다. 바르브를 좋아하고 있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데메스테는 어느 날 전쟁터로 떠나게 된다.
브루노 뒤몽은 시나리오보다는 이미지와 사운드, 배우들에 의존해서 영화를 만든다. 비전문 배우를 즐겨 기용하는 그는 이번에도 주인공 데메스테 역에 플랑드르에서 살고 있는 사뮈엘 보아댕을, 바르브 역에 아델라이드 르루를 캐스팅했다. 뒤몽은 “그들은 예측이 불가능하다. 내가 그들에게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는 그는 배우들의 표정과 몸짓을 있는 그대로, 감정에 충실하게 드러내게 하는데, 이러한 시도는 전작들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랑드르>에서도 성공적으로 표현되었다. 플랑드르와 전쟁이 일어나는 사막이 주요 무대로, 이 장소들은 인물이 겪고 있는 감정을 드러내는 구실을 한다. 카메라가 데메스테의 시선으로 전장인 사막을 바라볼 때 데메스테 마음속의 황량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플랑드르>는 보기 편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 속 전쟁에 대한 설명은 구체적으로 등장하지 않고, 데메스테의 무표정은 그의 마음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데메스테와 그의 동료들이 파병된 사막에서 적은 쉽게 눈앞에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윤간에 대한 보복은 잔인하게 이루어진다. 살상은 대개 무의미하게 벌어지고, 인물들의 이동경로는 쉽게 생략된 채 불친절하게 다음 장소로 넘어가버린다. 뒤몽은 “TV는 전쟁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매우 끔찍한 일이다. 나는 영화감독으로서 텔레비전으로 본 전쟁의 이미지를 표현한 것이다. 이라크 전쟁을 암시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배치하면, 관객은 이 전쟁을 믿게 된다”고 영화 속 전쟁을 설명했다. 지옥을 경험하고 나서야 데메스테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전쟁을 겪고서야 욕망에 솔직해질 수 있는 것이다.
브루노 뒤몽은 99년 두 번째 작품 <휴머니티>로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지만 천재적 재능이라는 극단적 찬사와 역겨운 현학주의라는 극단적 비판을 동시에 들었다. 사막에서 펼쳐지는 기괴한 에로틱스릴러인 <29 팜스>(2003) 이후 3년 만에 내놓은 <플랑드르>는 그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한번 되짚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브르노 뒤몽 감독 기자 회견
"내 작업은 암시이고, 감정이며, 시선이다"
-<예수의 생애>와 <휴머니티>에 이어 <플랑드르>로 다시 칸영화제를 찾은 소감은.
=작업의 출발점은 제목인 플랑드르에서였다. 내 영화에서 풍경은 첫 번째 요소인데, 이는 배경이면서 하나의 몸이고 토대이며, 이야기의 시작이기도 하다. 풍경은 영감을 주는 결정적인 요소다. 플랑드르는 내게 익숙한 풍경임에도 늘 낯설고 신비스럽게 다가오며 또한 깊은 감동을 준다.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배우들의 존재인데, 주인공 데메스테 역에 사뮈엘 보아댕이라는 플랑드르 지역 사람을 배우로 선택한 이유는 그의 몸과 시선이 이 풍경과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영화다. 조화를 이루는 것. 그 두 요소에서 나는 이야기를 만들기 시작했다.-“사랑해”라는 대사로 마무리되는 <플랑드르>는 당신의 다른 작품들과 매우 다른 것 같다.
=왜 사랑영화냐 하면…. 내 인생에 사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을 찾고 있다. 전쟁은 무엇인가? 전쟁은 욕망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을 말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사랑이란 여자를 욕망하는 것이고,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 영화는 화산 같은 이야기이다. 내가 해야만 했던 영화이기도 하다. 감독은 화가와 같다. 나는 시나리오에는 관심없다. 이미지로 영화를 만들기 때문이다.-북아메리카 관객은 <플랑드르>를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연결지을 것 같다. 영화 속에 낯선 나라에 참전하기 위해 떠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이런 설정은 현재 미국의 상황과 관련이 있는가.
=영화에서 특별한 것은 한 군인을 사막에 놓기만 해도 된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전쟁은 불확실하지만, 내 작업은 일으키는 것이며 암시하는 것이며 확실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는 이라크 전쟁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의 관심은 오직 시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