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9회 칸영화제 중간보고 [3] - 작가 4인의 신작①
2006-06-0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이다혜

과거는 여전히 살아있다

켄 로치의 <보리를 흔드는 바람>

아일랜드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영국 대령 버나드 몽고메리는 “반군이 스스로 붕괴하도록 만들기 위해 어느 정도 자치를 허용할 필요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1920년대 게릴라 전술로 영국군을 공격했던 아일랜드 반군은 그의 말처럼 분열하여 동지를 향해 총을 들었고, 아일랜드의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켄 로치의 신작 <보리를 흔드는 바람>는 그 시절 자신을 버리고 전쟁터에 뛰어들었던 젊은이들의 투쟁과 상처와 선택을 조용하게 응시하는 영화다.

젊은 의사 데미안(실리언 머피)은 런던의 병원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영국 군대의 횡포를 목격하고 고향에 남기로 결정한다. 반군이 된 데미안은 그의 형 테디와 친구이자 연인인 시니드 등과 함께 아일랜드의 독립을 얻기 위한 싸움을 계속한다. 그러나 영국이 아일랜드 일부 지역을 제외한 자치를 허용하겠다고 발표하자 피가 섞인 형제와도 같았던 군대는 내부 분열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데미안은 진정한 독립은 아일랜드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협정을 받아들인 테디는 내부 반대 세력을 처단하려 한다.

켄 로치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었던 아일랜드 젊은이들을 그저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들은 거의 평생을 알고 지냈던 공동체의 일원이었지만 배신자를 처단하겠다고 같은 마을 청년을 총살했고 끝내는 서로의 적이 되고 만다. 그러나 <보리를 흔드는 바람>가 지니는 울림은 거기에서 나오는 것이기도 하다. 같은 꿈을 공유했던 이들은 어째서 그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을 눈앞에 두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서로를 죽여야만 했던 것일까. “현재를 사고하는 방식은 언제나 과거에 의해 결정된다. 90년 전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아직도 울림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켄 로치는 <랜드 앤 프리덤> 이후 다시 한번 묻는다. 대가없이 생명을 바쳤던 이상주의자들의 서글픈 종말, 영국군이 어머니의 눈앞에서 죄없는 아들을 살해했던 농장에 그 아들의 친구였던 아일랜드인들이 들이닥쳐 반대세력을 사살하는 아이러니, 결코 보상받지 못할 죽음과 남겨진 이들의 눈물의 의미를. <보리를 흔드는 바람>는 이처럼 마음과 이성에 호소하며 과거가 아직도 살아남아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켄 로치 감독 기자회견

"어느 시대나 존재하는 투쟁과 독립의 이야기다"

-<보리를 흔드는 바람>는 1920년대 아일랜드가 배경이다. 동시대의 쟁점 대신 역사적인 사건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미디어는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보도하면서도 그 원인과 맥락은 언급하지 않는다. 지금 영국이 다른 국가와 맺고 있는 불법적인 관계나 그로 인해 빚어지는 충돌을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겠지만, 아일랜드 독립전쟁은 현재 영국을 바라보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건이다. 1920년대 초반 영국이 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했던 것은 제국주의적인 식민정책을 유지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리를 흔드는 바람>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투쟁과 독립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데미안과 테디의 정치적인 선택은 스페인 내전을 다룬 <랜드 앤 프리덤>이 그랬듯이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당신은 영국과의 협정을 받아들인 테디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테디가 타협했다고 생각해야 하는가, 아니면 뒷날 전진하기 위한 전술이라고 보아야 하는가. 나는 무엇보다도 그저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그리고 그 선택은 삶과 죽음 중에서 하나를 결정해야만 하는 지독한 것이었다. 우리는 테디가 처했던 지극히 광적인 상황을 고려해야만 한다. 예전에 영국 군대가 군인을 스파이로 만들기 위해 죽음으로 위협한 일이 있었다. 명령을 거부한 군인은 전쟁터에서 곧바로 사살당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대적인 상황과 부모 형제를 책임져야 하는 젊은이의 처지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데미안과 테디는 정말 어려운 선택을 했던 것이다.

-데미안은 이상주의자이면서도 폭력을 사용한다. 이상과 폭력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인들은 나치의 법에 대항하여 폭력을 사용했다. 이는 저항하기 위해서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저항과 폭력이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보리를 흔드는 바람>를 보았다면 알 수 있겠지만 죽음을 기념하는 음악 따위는 흐르지 않는다. 다만 저항과 폭력이 상호 관계를 맺는 원인에 대해선 생각해보아야 한다.

여성성을 위한 다정한 영화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볼베>

어린 페드로 알모도바르는 라 만차에 살았다. 라 만차는 안달루시아어를 쓰는 스페인 중부지방으로, 그곳 사람들은 플라멩코를 추고 노래하길 좋아했다. 어린 알모도바르는 어머니와 함께 강가에서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제 그는 그곳으로 돌아가 <볼베>를 만들었다. 픽션이지만, 이 영화에는 어린 시절 그가 경험했던 어머니와 누이들과의 시간과 라 만차의 문화가 살아 있다. ‘귀환’ 혹은 ‘귀향’을 뜻하는 ‘볼베’라는 제목은 자신의 뿌리로 돌아간다는 알모도바르의 메시지다.

경쟁부문에서 상영된 알모도바르의 <볼베>는 라 만차와 그의 어린 시절을 공유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다정한 영화다. 최근 알모도바르 영화들에 즐겨 따라붙던 ‘성숙한’이라는 형용사는 (여러 사람의) 죽음을 다루는 이번 영화에도 해당되는 말이지만, <볼베>는 최근작들보다 가볍고 따뜻하며 유머러스하다. <하이힐>이나 <신경쇠약 직전의 여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볼베>는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톤으로 스릴과 웃음을 안긴다.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즈)는 무력한 남편 파코와 함께 딸 파울라를 키우고 있다. 라이문다의 여동생인 솔레는 미용사로, 역시 혼자 살고 있다. 그들은 고향 라 만차를 떠나 도시에 살고 있는데 자매의 부모는 몇년 전 화재사고로 모두 숨을 거두었다. 나이든 이모는 여전히 고향에 살고 있는데, 그 이모를 돌봐주는 사람은 옆집에 사는 아우구스티나. 어느 날, 라이문다는 딸이 남편을 죽인 사실을 알게 된다. 조용히 뒷수습을 하느라 정신없는 라이문다는 이모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솔레는 이모의 장례를 치르러 고향에 갔다가 어머니의 유령을 만난다.

소피아 로렌을 연상시키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등장한 라이문다는 정말 소피아 로렌처럼 강인한 어머니로 보이지만 그녀가 안고 있는 상처는 베일에 가려져 있다. 알모도바르는 그저 의뭉스럽고 해학적인 방식으로 라이문다 모녀, 라이문다와 솔레 자매, 그리고 그들의 어머니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준다. 영화에서는 여러 사람의 죽음이 그려지고, 여러 번의 화해와 눈물이 이어지지만, 알모도바르는 감정을 극한까지 몰아가지 않고도 깊은 공감을 남긴다.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 라이문다 역의 페넬로페 크루즈와 탱고 선율로 영화에 리듬감을 더해준 카를로스 가르델은 <볼베>의 화룡점정. 영화에는 남자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여자들은 남자의 부재 대신 어머니의 부재에 슬퍼한다. <볼베>은 알모도바르가 이해하고 있는, 그리고 그 안에 품고 있는 여성성이 가장 다정하게 표현된 작품으로 기억될 것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기자회견

"영화는 내 청춘과의 화해였다"

-<볼베>의 무대가 된 라 만차는 당신의 고향이다. <볼베>는 당신이 뿌리로 귀환함을 보여주는 것인가.
=<볼베>는 나 자신으로 근본적으로 회귀하는 영화다. 뿌리로 귀환하는 것에 관한 이 이야기는 라 만차로 돌아가는 내게 많은 감동을 주었다. 어떤 의미에서 나 자신과의 화해를 구하는 것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 청춘과의 화해였다. 젊은 시절에 행복했든 불행했든 그 시절을 정리한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죽음에 대한 시선을 그리고 있기도 하다.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는가.
=가능성은 있지만, 지금까지 제안받은 시나리오들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무엇보다 할리우드에서 작업한다면, 나의 독립적인 제작방식이 침해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영어영화를 만든다 해도 할리우드가 아닌 곳에서 만들게 되지 않을까 한다. 제작방식이 덜 엄격한 곳에서.

-당신은 스페인에서 가장 잘 알려진 감독이다. 스페인 개봉 당시 개봉관이 많았다고 들었는데.
=필름 150벌을 찍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다빈치 코드>는 필름 700벌을 찍었다. 당연히 극장에서 오랜 기간 상영될 것이다. 언론에서도 많이 다루기 때문에 당연히 관객 수도 더 많다. 큰 배급회사가 극장을 장악하기 때문에 스페인에는 작은 규모의 영화가 오랫동안 상영되는 일이 흔치 않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영화를 보기란 더 어려운 일이다. 주목할 만한 점은 스페인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의 80%가 할리우드영화란 것이다. 나머지 20%에는 스페인영화와 다른 나라 영화들이 섞여 있다. 스페인에서 스페인영화를 상영하는 일이 어려운 게 현실이다.

-젊은 시절의 기억과 어머니라는 존재, 다시 말해 보편적인 인류의 기억이기도 한 어머니에 대한 시선이 영화를 만들면서 어떤 영향을 끼치나.
=나는 과거에 내가 겪은 사람들을 영화 속 픽션의 인물로 만든다. <볼베>는 분명히 픽션이긴 하지만. 내게 영화란 미래에 일어날 일의 한 지표로 존재한다. 픽션과 현실의 관계는 복잡하지만, 내게 픽션은 미래의 가능한 상황을 의미한다.

-<볼베>는 환상적인 느낌도 상당히 강한데.
=판타스틱한 세계를 보여주는 게 내 소망이다. <볼베>가 초현실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유령이 등장한다는 설정이 지나치게 환상적이라는 면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나는 유령이라는 존재가 대단히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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