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제59회 칸영화제 중간보고 [5] - 비경쟁 부문 4편
2006-06-02
글 : 김현정 (객원기자)
글 : 이다혜
먼지 속에서 찾아낸 보석

올해 칸영화제는 지리적인 영역을 넓히고 새로운 재능을 발굴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도니 다코>의 리처드 켈리가 연출한 <사우스랜드 이야기>는 높았던 기대만큼이나 경이로운 실망을 퍼뜨렸고, 맥도널드를 긴장하게 했다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패스트 푸드 네이션>도 <스크린 칸 데일리> 데일리 평점 1.7점으로 <사우스랜드 이야기>와 꼴찌를 다투고 있다. 보석은 스포트라이트 아래가 아니라 먼지 속에 있었다. 경쟁부문의 레드 카펫은 밟지 못했지만 충격과 재미와 감정의 파장을 전해주었던 자그마한 영화들이 그것이다.

<하마카 파라과이> _ 가치있는 침묵의 세계

<하마카 파라과이>는 1978년 독재정권의 지원을 받은 영화 <세로 코라>가 개봉한 이후 파라과이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35mm 장편영화다. 아르헨티나에서 영화를 공부한 감독 파즈 엔시나는 외국에서 장비를 빌리고 스탭 25명을 모아 한없는 침묵을 담은 이 영화를 완성했다. 엔시나의 말에 따르면 <하마카 파라과이>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경계를 건드리는, 침묵의 세계다”. 늙은 농부 라몬과 아내 칸디다는 비가 오고, 개가 짖는 소리가 그치고, 전쟁에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소작농들이 지주들의 땅을 지키기 위해 동원되었던 차코 전쟁에 끌려나간 아들은 아마도 이미 죽었을 것이다. 국적뿐만 아니라 형식과 내용도 낯선 <하마카 파라과이>는 한 장면이 10분 넘게 지속되고, 장면이 바뀔 때만 카메라가 움직이기 시작하는 영화다. 지루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멈춰 있던 카메라가 라몬과 칸디다를 향해 느리게 다가가 시간이 정지한 듯한 눈빛을 담는 순간은 기다릴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열개의 카누> _ 신화의 세계, 야생의 세계

이 고요한 열대우림을 지나면 “성기를 가리는 남자는 믿을게 못된다”고 자신만만하게 떠드는 사냥꾼들의 정글이 나온다. <열개의 카누>는 열개의 카누를 저으며 1천년 전 호주 원주민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영화다. 부족의 지도자 미니구룰루는 자신의 세 번째 아내를 좋아하는 동생 다인디를 바른길로 인도하기 위해 사냥 여행 도중 형제가 등장하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아직 아내를 구하지 못한 청년 이랄파릴은 형 라지미랄리의 젊고 예쁜 세 번째 아내에게 마음이 있다. 강인한 전사 라지미랄리는 사라진 두 번째 아내가 이방인의 마을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전투에 나가면서 관습에 따라 동생을 남겨두고 간다. 형이 죽으면 이랄파릴은 형수들을 아내로 맞아야만 한다. <열개의 카누>는 이 밖에도 수없이 가지를 치며 멋대로 뻗어가는 영화다. 그러나 질투와 죽음과 유머가 하나로 뒤섞인 신화의 세계, 다큐멘터리 스타일과 무성영화처럼 매혹적인 배우들의 동작은 산만하다기보다 풍성한 야생의 세계로 다가온다. 감독 롤프 데 헤어는 어보리진(호주 원주민)의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소망만으로 전설을 수집하다가 열척의 카누와 사냥꾼들을 찍은 1930년대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구성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박제> _ 그로테스크와 유머의 공존

섹스에 목말라 각종 방법으로 자위를 했던 할아버지와 먹기대회 챔피언인 아버지, 그리고 박제사 아들로 이어지는 기이한 삼대의 이야기 <박제>는 특이하고 그로테스크한 장면들 속에 유머 감각이 잘 녹아 있는 작품이다. <박제>는 2차대전 복무 중 성적 충동에 시달리다가 연모하는 여인의 어머니이자 상관의 뚱뚱한 아내와 섹스하게 되는 할아버지, 공산당 집권하의 헝가리에서 먹기대회 챔피언이 된 아버지, 그리고 거대한 소파처럼 살이 쪄 거동조차 못하는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박제사 아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된 <박제>는 헝가리에서 주목받고 있는 교르기 팔피 감독의 두 번째 작품인데 발기한 성기에 불을 붙이며 낄낄대는 장면이나 먹고 토하기를 반복하는 먹기대회 장면, 박제사가 스스로를 박제해버리는 장면 등은 열광 혹은 혐오라는 두 가지 극단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앞의 두 이야기는 헝가리 작가인 라조스 파티 나기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것이고, 세 번째 이야기는 팔피와 그의 아내가 쓴 것. <박제>의 시나리오는 2004년 선댄스영화제에서 NHK상을 수상했지만 제작 예산을 모으는 데 난항을 겪어 제작에 들어가기까지 2년이 걸렸다.

<블레드 넘버 원> _ 꿈처럼 전하는 혼돈의 땅의 상실감

새로운 발견이라고 할 만한 영화들 중에서 시대적인 맥락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는 <블레드 넘버 원>이다. 알제리계 프랑스 감독 라바 아뫼르-자이메쉬는 프랑스에서 범죄를 저지른 알제리 청년 카멜을 주인공으로 두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그 첫 번째 영화 <웨쉬, 웨쉬>는 프랑스가, 두 번째 <블레드 넘버 원>은 알제리가 배경이다. “카멜은 이중처벌의 희생양이다. 그는 프랑스 감옥에 수감됐지만 복역 기간이 끝나고 알제리로 추방당한다. 그러므로 영화도 두편이어야만 했다.” 그러나 포커스는 다른 곳에 맞추어져 있어서, <블레드 넘버 원>은 프랑스와 알제리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추방자의 나날과 변화를 받아들여야만 하는 알제리의 현재에 관한 영화가 되었다. 알제리에 돌아온 카멜은 사촌 집에 머물지만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한다. 친정에 돌아온 사촌 여동생 루이자가 가족에게 수치를 안겨다주었다며 얻어맞자 카멜은 사촌과 싸움을 벌이고 이방인으로 못박힌다. 루이자는 여자가 노래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슬람 규율을 견디지 못해 정신병원에 들어가고 만다. <블레드 넘버 원>은 사회적인 주제를 다루면서도 알제리의 초현실적인 영혼을 차용하여 여러 개의 이질적인 덩어리가 뒤엉켜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카멜의 고향이지만, 혼돈의 땅이 되어버린 알제리. <블레드 넘버 원>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그 상실감을 꿈처럼 전해주는 영화다.

스무개의 사랑이 모인 도시, 파리

<파리, 주뎀므>

파리에는 모두 20개의 구(區)가 있다. <파리, 주뎀므>는 스무명의 감독을 그곳에 데려다놓고 자유롭게 만든 스무개의 사랑 이야기다. 판타지와 멜로와 모노드라마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이 옴니버스 프로젝트는 몽마르트르와 마레 지구처럼 지명만으로도 마음을 흔드는 도시 파리에서 외롭고 슬프고 로맨틱한 다채로운 색채를 찾아낸다. 구스 반 산트는 말없는 남자를 보고 첫눈에 반한 게이 청년의 로맨스를 담았다. 그는 묵묵부답인 남자를 향해 쉬지 않고 말을 건네다가 전화번호를 적어주지만, 놀라운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코언 형제는 얼굴만 보아도 동정심이 절로 이는 스티븐 부세미와 함께 사랑 싸움에 휘말린 가엾은 미국인 관광객의 고생담을 찍었고, 거린다 차다는 이슬람 교도 소녀와 백인 소년의 귀여운 로맨스가 시작되는 순간을 바라보았다. 파리에 사는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이국 감독들과는 반대로 파리를 찾아온 미국인 여배우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빈센조 나탈리의 이야기는 파리 밤거리를 헤매다가 아름다운 뱀파이어 여인과 사랑에 빠진 관광객의, 행운인지 불행인지 모를 로맨스. 이 밖에도 스와 노부히로와 톰 티크베어, 알렉산더 페인처럼 구(區)이름 못지않게 매혹적인 감독 리스트가 이어지는 <파리, 주뎀므>는 화려한 이름만으로 장식한 이벤트에 그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를 떼어놓고 남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미혼모의 애틋한 심정과 거리에서 죽어간 이민 노동자를 위한 눈물, 홀로 파리를 헤매던 중년 여인에게 다가온 희열은 스무명 감독들의 재능이 낭비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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