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7일에 개막한 제59회 칸영화제는 같은 영화제의 감독주간과 비평가주간 개막식에서도 비웃음을 받은 개막작 <다빈치 코드>를 시작으로 불길한 징조를 보여왔다. 기대작이었던 <사우스랜드 이야기> <패스트 푸드 네이션>이 혹평을 받았고 주목할 만한 시선도 이렇다 할 수작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시작된 지 반세기가 넘은 세계 최대 영화제가 실망만 안겨주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것이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와 켄 로치를 비롯한 유럽의 작가들은 건재한 신작을 선보였고 때로 젊은 감독과 낯선 국적의 보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감독주간에서 상영된 봉준호 감독의 <괴물>도 경쟁부문 영화보다 낫다는 호평을 받으며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영화제가 폐막을 향해 가고 있는 지금 기대에 걸맞은 재능을 보여준 기성 감독들의 신작과 발견이라 할 만한 낯선 영화들을 소개한다. 베일에 싸여 있다가 마침내 공개된 <괴물>의 정체와 언론의 평가,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도 함께 싣는다. 칸영화제 한편에서 침묵 시위를 해왔던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원회의 활동과 성과에 관한 보고는 레드 카펫에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의 그늘에서 얻어낸 결과다.
가라앉은 칸 경쟁, 희망을 기다린다
경쟁작 기대에 못 미쳐, <볼베> <바람이 보리를 흔들 때> <기후> 등 호평
칸영화제가 시작된지 6일째. 칸 비치에는 날마다 눈부신 태양이 내리쬐고 있다. 덕분에 경쟁부문 심사위원장인 왕가위뿐 아니라 영화제를 찾은 많은 사람들도 숙소를 나서면서부터 선글라스를 꺼내 찾는다. 날씨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좋으니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해변에 누워 일광욕을 하거나 근교에 여행을 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개막작 <다빈치 코드>가 칸영화제 데일리 중 하나인 <필름 프랑세> 별점에서 폭탄 세례를 받은 뒤 칸영화제 소식을 다루는 각종 매체에서 놀림감이 된 것이 칸영화제가 겪게 된 수모의 시작이었다. 유달리 많은 할리우드영화들이 칸을 찾은 해답게 레드 카펫 위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은 별들의 향연이 이어졌지만, 경쟁작들이 하나하나 상영될수록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경쟁작 악평 행렬, 수상 결과 예측 어려워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귀향>과 켄 로치의 <바람이 보리를 흔들 때>는 현재까지 황금종려상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그 이유는 두 감독의 전작에 비해 특별히 새롭거나 완성도가 뛰어난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로우예의 <여름궁전>은 심사위원장인 왕가위가 중국인이고 이번 경쟁부문의 유일한 중국영화라는 점을 제외하면 거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난니 모레티의 <카이마노>는 평작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경쟁부문의 유일한 신인감독 안드레아 아놀드의 <붉은 길>은 평가가 엇갈리는 가운데, 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는 전작들과 다른 유머러스한 분위기로 호의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도니 다코>로 인상적인 데뷔를 한 리처드 켈리의 <사우스랜드 이야기>는 2시간40분에 달하는 상영시간보다 문제가 된 정신사나운 분위기 탓에 상영 중반에 극장을 나가버리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사우스랜드 이야기>에 쏟아진 악평은 대체 어떤 기준으로 경쟁부문 선정작을 심사하는지의 문제까지 도마 위에 올랐다. <버라이어티> 칸 데일리는 누가 이런 영화를 배급하겠으며 그렇다면 리처드 켈리의 미래는 이제 어떻게 되겠느냐는 호들갑스런 분석을 1면 기사에 실었을 정도다. 한마디로 만장일치의 “꽝”은 널렸지만 좋다는 영화는 제각각이니 수상 결과를 예측하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켄 로치와 페드로 알모도바르, 누리 빌게 세일란이 딱 예상만큼 준수한 영화를 들고 칸을 찾았을 뿐이다. 남은 일은 그저, 남은 경쟁작 중에 눈에 확 들어오는 작품이 있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칸 마켓 세일즈, 역대 최저 우려
덕분에 칸 마켓의 분위기도 침체되고 있다. <버라이어티> 칸 데일리 5월22일자에 따르면, 현재 마켓에서 가장 좋은 반응을 얻은 영화들은 주목할 만한 부문에서 상영된 두 작품, 롤프 드 히어의 <열개의 카누>와 교르기 팔피의 <박제>다. 리처드 켈리의 <사우스랜드 이야기>는 칸 개막 전 마켓 바이어들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영화였으나 마켓 관계자들도 실망했다는 반응을 감추지 않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강도 높은 섹스신으로 화제가 된 존 카메론 미첼의 <숏버스>는 상영 등급 문제로 광고를 할 수 없고 대규모 극장 체인들에서 상영하지 못할 것이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마켓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살 영화가 없다”는 마켓 관계자들의 푸념만이 들려오는 가운데 최근 몇년간 침체일로를 겪던 칸 마켓 시장이 올해는 가장 저조한 마켓 세일즈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냐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작은 사건 사고들도 이어지고 있다. 감독주간에서 상영된 HPG의 <우리는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는 영화 상영 중에 갑자기 불이 켜졌는데, 관객의 야유에도 불구하고 불이 들어온 극장에서는 그대로 영화가 상영되었다. 상영장인 노가 힐튼 호텔에 화재 경보가 울렸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 상영은 그대로 중단되었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된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5월19일에 있었던 첫 상영 때 극장 안에 빛이 새어들어오는 바람에 첫 1시간 정도를 제대로 상영하지 못했다. 비경쟁 부문에서 단편 <스탠리의 여자친구> 상영 때 극장에 입장하려던 몬티 헬먼 감독은 기자만 입장이 가능하다는 진행요원에게 자신이 곧 상영할 영화의 감독임을 설득하느라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
영화제 일정의 절반이 끝난 지금, 즐거운 마음으로 소개할 수 있는 몇편의 영화를 꼽아 소개한다. 코미디와 스릴러 등 알모도바르가 장기를 보였던 장르의 혼합인 <귀향>, 켄 로치의 일관된 정치사회 문제의식이 돋보인 <바람이 보리를 흔들 때>, 남녀관계에서 지식인의 허위를 드러내 웃음을 자아내는(그리고 홍상수를 연상시키는) 누리 빌게 세일란의 <기후>, 전쟁에 휩쓸린 젊은이들을 건조하지만 강렬한 방식으로 그려낸 브루노 뒤몽의 <플란더스>는 영화를 보는 즐거움이 칸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경쟁부문은 아니더라도 앞서 말한 <열개의 카누>나 <박제>, 라바 아메르-자이메크의 <블레드 넘버 원>, 파즈 엔시나의 <파라과이 해먹> 같은 영화들은 앞으로 기억해야 할 이름들이 어떤 것인지를 귀띔해준다. 개막일부터 진행된 레드 카펫 행사장 근처에서의 침묵 시위가 칸영화제 이사회 만장일치로 스크린쿼터 사수 영화인 대책위원회에 대한 지지를 이끌어낸 소식도 빼놓을 수 없겠다. 무엇보다 5월21일과 22일, 두번에 걸친 상영에서 뜨거운 반응을 이끌어낸 봉준호 감독 신작 <괴물>에 대한 소식은 국내 개봉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에게 반가운 뉴스가 될 것이다.
윤종빈 <용서받지 못한자> 현지 반응
‘지적이다’ vs ‘지루하다’ 반응 엇갈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받은 윤종빈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는 5월19일이 첫 번째 상영이었지만 창문 블라인드가 고장나서 극장 안에 빛이 새어들어오는 사고를 겪었다. 그 때문에 영화 초반부를 집중해서 보지 못한 관객의 항의로 상영이 한번 더 마련됐고, 뒤늦게 현지와 외국 언론 리뷰가 발표됐다. 군 시절 같은 내무반에 있었던 세 젊은이의 이야기인 <용서받지 못한 자>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조, 외국에는 낯선 군대 문화 때문에 호오가 뒤섞인 반응을 얻었다. <리베라시옹>은 한때 프랑스에도 징병제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서두에 언급하면서 “심도 깊은 철학적 증오 속에서 진행되는 영화다. … 가장 약한 이들을 절망에 빠뜨리고 자살에 이르게 하는 기계적인 복종에 대한 세심하고 고집있는 분석”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영화제 둘쨋날 이미 리뷰와 감독 인터뷰를 데일리에 실은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서울의 밤장면이 허술하다는 약점을 지적했지만, 그조차도 인물들의 정신적인 상처를 효과적으로 보여주는 결과가 되었으며, “지적이고 고요한 감정을 지닌 영화다. 장르영화가 아닌, 좀더 정교한 한국영화를 찾던 바이어들을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역시 칸영화제 데일리를 발행하고 있는 <버라이어티>와 <할리우드 리포터>는 영화가 다소 지루하다는 평이다. <버라이어티>는 상영시간이 지나치게 긴 듯하다는 입장이고, <할리우드 리포터>는 유머와 성찰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지루하게 흘러간다고 썼다. 특히 인물들의 반응이 극단적으로 보인다는 <할리우드 리포터>의 리뷰는 문화적인 차이를 생각게 하는 지점이다. 사전정보가 거의 없이 극장을 찾은 관객의 반응도 비슷하다. 영국의 한 남성관객은 “군대처럼 결코 쉽게 변하기 어려운 시스템의 한계를 보면서 답답했다. 서사가 빠르게 전개된다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리듬이 너무 느렸다거나 지루하지는 않았다. 한국사회의 단면을 이해할 수 있었던 기회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 주연배우인 하정우, 서장원과 함께 칸영화제를 찾은 윤종빈 감독은 제작사 청어람에서 다음 영화를 연출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