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특별한 배우, 변희봉 [2]
2006-08-01
글 : 문석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젊은 영화인들이 말하는 배우 변희봉

“깊이가 새겨진 마스크, 창의적 자극을 주시는 존재”

봉준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괴물>에서 연출자로 만남

<안국동 아씨>의 점쟁이 역이나 <조선왕조 500년-설중매>의 유자광 역으로 출연하시기 전부터 변희봉 선생님의 팬이었다. <수사반장>이나 <113 수사본부>에서 선생님은 범인이나 간첩으로 나오곤 했는데, 그게 그렇게 인상 깊었다. 가장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수사반장>의 ‘할렐루야 교주’ 편이다. 변 선생님은 러시아 스타일의 모자와 두루마기 같은 것을 걸치고, “할렐루야, 렐루야, 렐루야”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신도를 이끌었다. 좌우를 보면서 손을 가슴에 엑스자로 모으는 무용 동작을 하면서. 그때 형언할 수 없는 그 느낌에 압도당했던 것 같다. 사실 <플란다스의 개> 초고에는 경비원 역할이 없었다. 그러다가 어릴 때 좋아하던 변희봉 선생님이 경비원 옷을 입고 지하실을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래서 아예 변 선생님을 염두에 두고 경비원 캐릭터를 만들었다. ‘보일러 김’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장면도 처음부터 머릿속에 있었다. 변 선생님의 독특한 굴곡이 있는 얼굴에 아래에서 올려치는 조명을 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살인의 추억> 때 논두렁에서 구르는 장면을 찍을 때는 못할 짓을 한 것 같아 죄송스럽다. 그때가 11월인데다가 몸이 안 좋으실 때인데, 13번을 굴러서 넘어지게 했다. 결국 촬영을 마치고 서울에 올라가 입원하셨다. 그런데도 촬영할 때는 싫다는 내색 한번 않으셨다. <괴물> 때는 나도 좀 놀랐던 게, 완성본을 보는데 선생님의 이미지가 달라지셨더라. <반지의 제왕>에서 간달프 역의 이안 매켈런이나 숀 코너리처럼 마스크에 영화적인 깊이가 새겨진 것이다. 하여간 어릴 적부터 팬인 나로서는 변 선생님이 현장에 함께 계시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리고 선생님을 보고 있으면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른다. 내게 변희봉 선생님은 창의적인 자극을 주시는 존재인 듯하다.

“영화 전체의 느낌을 살려내는 아이디어”

장규성/ <선생 김봉두> <여선생 vs 여제자> 때 연출자로 만남

<선생 김봉두> 때 처음 뵀다. 죄송하게도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현장이었다. 계약 과정에 약간 문제가 있어서 선생님의 첫 촬영분이 있던 날 현장에서 처음 인사를 드리고 바로 찍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에는 굉장히 당황했다. 나도 생각하는 연기의 선이 있는데, 캐릭터 설정이나 연기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너무 열정적으로 고민해오시는 것이었다. 그래서 굉장히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선생님의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중반 이후로는 간략한 연기 디렉션만 드렸고, 알아서 하시게끔 했다. 큰 범위를 벗어나는 것만 지적하는 정도였다. 마지막 부분, 최 노인이 김봉두(차승원)에게 ‘촌지’를 건네는 장면도 모두 선생님의 아이디어에서 나왔다. 봉두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살인미소’를 지으시는 연기는 미처 내가 생각지 못했던 것이었다. 변희봉 선생님 덕분에 최 노인은 생각보다 굉장히 귀여운 캐릭터가 됐고, 기분 좋은 엔딩신의 영향으로 전체적으로 굉장히 밝은 영화가 된 느낌이다. <여선생 vs 여제자> 때는 여선생(염정아)이 자리를 비운 동안 대신 수업을 하는 장면에서 내가 “노래를 불러주셔야 한다”고 하자 “부담스러워서 못하겠다”고 하시더라. 그런데, 막상 촬영이 시작되니까 촬영장이 뒤집어질 정도로 재밌게 노래를 해주셨다. 8월에 촬영을 시작할 <이장과 군수>에서도 선생님께서는 이장과 군수 사이를 오가는 지역 유지인 백 사장 역할로 나오신다. 얼마 전 이 영화를 놓고 선생님과 열띤 토론을 벌였는데, 요즘 들어 다작이라면 다작을 하시는 편인데도 작품마다 열정을 불태우시는 것 같아서 감사할 따름이다.

“‘점 연기’로도 앵글 안으로 파고드는 내공과 열정”

류승완/ <주먹이 운다>에서 연출자로 만남

<플란다스의 개>에서 변희봉 선생님이 연기한 보일러 김씨 시퀀스를 굉장히 좋아한다. 오죽하면 승범이와 그 장면을 말투까지 흉내내면서 그대로 외우는 장난을 치고 했겠냐. 그 뒤 <살인의 추억>도 그렇고 워낙 다양한 스펙트럼의 연기를 보여주셔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주먹이 운다> 때는 제작사와 계약할 때 변희봉 선생님과 천호진, 나문희 선생님이 출연해야 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내세우기까지 했다. <괴물>에서도 그렇지만 나는 변 선생님이 어떤 대상을 뚫어지게 쏘아보는 눈빛이 굉장히 매섭다는 생각을 해왔다. 승범이의 권투 코치 역을 부탁드린 것도 그런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실제로 편집할 때 사용하게 되는 컷도 선생님이 뭔가를 응시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잠깐일지라도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열정도 대단하시다. 코치 역이라 굳이 권투를 배울 필요가 없는데도 배우들을 지도하는 코치들을 ‘괴롭혀가면서’ 하나하나를 다 배우셨다. 심지어 앵글 뒤편에서 ‘점 연기’를 하는데도 끊임없이 카메라 앵글 안으로 파고들곤 하셨다. 그건 아마도 수십년간 조·단역을 하시면서 자연스럽게 익혀온 습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다른 중년급 연기자들과 비교할 때 변 선생님은 테이크를 많이 가는 것을 좋아하신다는 차이점이 있다. 욕심이 많아서 그런지 다양한 연기를 하길 원하시는 듯하다. 오히려 테이크를 적게 가면 불만스러워하시는 눈치다. 어쩔 때는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서 고민이 될 정도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알쏭달쏭한 상황에서 일단 다양한 소스를 얻고 싶은데, 배우가 지치면 연기를 요구하기 힘들다. 하지만 변 선생님은 아무리 테이크를 한번 더 가자고 말씀드려도 “어, 오케이” 하면서 오히려 즐기는 모습이다. 변희봉 선생님은 테이크를 거듭할 때마다 지치는 게 아니라, 뭔가 새로운 것을 획득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젊은 배우에 비할 바 없는 적극적이고 욕심 많은 ‘선배님’”

장항준/ <불어라 봄바람>에서 연출자로 만남

변희봉 선생님을 워낙 어릴 적부터 좋아했다. <조선왕조 500년-설중매> 때 유자광으로 출연하셔서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고 말씀하시던 것은 아직도 기억난다. 뭔가 표정을 지을 때 한쪽 눈이 조금 커지는 듯한, 그런 모습이 어린 마음에 멋있고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불어라 봄바람>에서는 노 작가 역으로 변희봉 선생님을 애초부터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를 써서 드렸는데, 할 말이 있으시다면서 굳이 사무실로 오셨다. 역할이 비교적 작은데 편집까지 당하면 아예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있으셨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겠노라고 맹세 비슷하게 했다. 오히려 선생님은 <베사메무쵸> 부르는 장면을 만들어내는 등 큰 도움을 주셨다. 정말이지 변 선생님은 적극적이고 욕심이 많은데, 젊은 배우 저리 가라다. 그때 인연으로 지금도 간혹 연락을 주고받곤 하는데, 솔직히 선생님께서 안부를 여쭤오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죄송스럽기 짝이 없다. 어찌나 열려 있으신지, 언젠가는 “선배라고 불러주십시오. 선생님이란 호칭 이상합니다”라고 하셔서 지금까지 ‘선배님’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도 첩보영화 시나리오를 쓰고 있는데 거기에서도 변 선생님을 중심인물로 설정해놓고 있다. 부디 이 시나리오를 잘 봐주셔야 할 텐데….

“캐릭터를 좀더 입체적으로 완성하시는 분”

송강호/ <살인의 추억> <괴물>에서 함께 연기

함께 연기하는 배우 입장에서 볼 때 변희봉 선생님은 우선 기본기가 탄탄하다는 인상을 준다. 특히 선생님의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그저 받은 대본을 그대로 연기하는 게 아니라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오래전부터 연기활동을 하셨던 분들이 함께 호흡을 맞추는 앙상블 연기엔 조금 인색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변 선생님은 내가 애드리브를 던졌을 때 아주 편안하고 노련하게 받아주신다. 나에겐 아버지뻘인데도 선생님은 연기를 할 때만큼은 나이 차이가 무색할 만큼 편안하게 대해주신다. <살인의 추억>의 초반부, 논바닥에서 시체가 발견되는 롱테이크 장면에서도 주어진 대사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변 선생님은 내가 만들어낸 애드리브를 생생하게 맞받아주면서 봉준호 감독이 원하는 영화의 느낌을 살려냈다. 단지 상대방의 연기를 잘 받아줄 뿐 아니라, 그 안에서 자신이 노리는 바를 정확하게 만들어내신다는 점이 더욱 놀랍다. 그런 연기는 정말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고민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후배 연기자 입장에서는 그런 기본기를 배울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변 선생님과 함께 출연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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