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특별한 배우, 변희봉 [1]
2006-08-01
글 : 문석
사진 : 서지형 (스틸기사)

변희봉은 어느 날 홀연히 날아온 외계인 같은 배우가 아니다. 1970년부터 우리와 만나기 시작한 그는 TV와 영화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는 익숙한 존재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너무 늦게 알아봤다. <수사반장>과 <113 수사본부>의 악역이나 사극드라마의 단골 조연, 영화 속의 개성 강한 캐릭터 정도로만 생각했던 변희봉을 우리가 제대로 알아차리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7월27일 개봉하는 <괴물>은 그를 새삼 ‘발견’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변희봉은 이 영화에서 따뜻한 부정(父情)과 강인한 카리스마를 동시에 드러내면서 기억에서 지울 수 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줬다. 너무도 낯익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잘 모르고 있었던 변희봉의 연기인생을 돌아본다.

한국 영화계에서 변희봉은 독특한 존재다. 최근 들어 영화계에서 주목받는 ‘실버 연기자’의 경우 TV에서 주연급으로 확고한 지위를 굳힌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변희봉은 오히려 정반대다. 2000년 <플란다스의 개>에서 경비원 역할로 출연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방송에서 조역과 단역을 전전하고 있었다. 하지만 영화쪽으로 물꼬가 트인 뒤로 변희봉은 물 만난 고기처럼 새로운 전성기를 열고 있다. 특히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변희봉 연기의 정점을 보여준다. 그동안 어딘가 허술하거나 삐딱한 캐릭터로 출연했던 그는 <괴물>에서 자식들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아버지이자, 한 가족의 리더로서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가 괴물을 노려보는 비장한 모습은 최근 한국영화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대목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변희봉이 6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새로운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현장에서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한때는 쉬기를 밥먹듯 했”고 오랫동안 밝은 조명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가 뒤늦게나마 영화를 통해 발견된 것도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그저 묵묵하게 꾹꾹 쌓아왔던 그의 공력이 뒤늦게나마 폭발하고 있는 덕분이리라.

악역으로 돌파구를 찾았던 데뷔시절

“<수사반장>에서는 항상 잡범으로 나왔고, <113 수사본부>에서는 고정적으로 간첩, 그것도 아주 아랫 것으로 출연했다고. 하지만 지금 이런 역을 잘 소화해내면 언젠가 좋은 역할이 오겠지, 하는 희망을 품고 정말로 열심히 했어요.”

변희봉은 1965년 MBC 라디오 성우 공채 2기로 합격하면서 방송과 연을 맺었다. 친척이 운영하는 제약회사에서 한동안 일했지만 객지인 서울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외롭고 고달픈 나날을 보내던 그에게 위안을 준 것은 라디오 연속극이었다. 그는 선망하던 성우가 되기 위해 성우 연수과정을 밟았고, 시험까지 통과해 당당히 정식 성우가 됐다. 사실, 당시 변희봉 자신은 감지하지 못했지만 그 안에는 연기자의 끼 같은 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어린 날 집안 사정으로 누이와 함께 외지에서 홀로 생활했다. “내 초등학교 시절 별명이 울보였어요. 아주 어릴 때 외로움 같은 것을 늘 갖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우는 연기를 하라고 하면 아주 선수지.” 게다가 그는 성대모사에는 나름의 자질을 갖고 있었다. 성우 시절, 이승만 전 대통령의 유해가 한국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생중계할 때 그는 “국민 여러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같은 성대모사를 실감나게 연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성우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고향인 전라도의 사투리 때문이었다. 라디오에서 사투리가 조금도 용납되지 않던 당시 분위기 속에서 변희봉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다. “동기였던 전운, 송재호씨는 경상도 출신이었는데도 사투리를 전혀 안 썼어요. 근데 나는 안 되더라고.”

그런 갈증에 대한 돌파구는 엉뚱한 곳에서 열렸다. 당시 MBC 라디오국 제작부장은 얼마 전 타계한 차범석씨였다. 차범석씨는 당시 극단 산하의 단장이기도 했는데, <진흙 속의 고양이>라는 작품을 준비하던 중 배우 한명이 중도하차하게 되자 그 자리에 변희봉을 기용했다. 극중에서 전운의 비서 역할을 맡았던 그는 익살맞은 연기를 펼치며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산하의 단원이 돼 코믹한 연기를 펼쳤다. 그리고 얼마 뒤 TV가 활성화되면서 그 또한 부름을 받게 된다. 1970년 1월에 방송한 <홍콩 101번지>는 그의 드라마 데뷔작이다. 그러나 TV에서도 그는 곧바로 중심부로 나아가지 못했다. 빼빼 마른 몸과 광대뼈가 보이는 개성 강한 얼굴, 그리고 카랑카랑한 목소리 때문이었는지 그는 <수사반장>과 <113 수사본부>가 아니더라도 악역을 도맡아 하게 됐다. “삼일절이 되면 왜놈 앞잡이, 6·25가 돌아오면 인민군 조무래기, 8·15 특집극에서는 이완용의 인력거꾼을 연기했으니까.” 반면, 악역은 그에게 새로운 기회를 열어주기도 했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라디오 방송극 <법창야화>에서 그는 ‘강진 갈갈이’ 유시환 역을 맡아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문제가 됐던 전라도 사투리가 이번에는 득이 된 것이다. 그는 이어서 ‘무등산 연쇄살인사건’, ‘이종대, 문도석 사건’ 등에 출연하며 성우로서도 주가를 날렸다.

"이 손안에 있소이다~" 유행시킨 <조선왕조 500년> 유자광 역

“<안국동 아씨>에서 궁내 점쟁이인 당상복자 역을 맡고 고민을 많이 했다. 서울 시내를 돌며 이 점쟁이, 저 점쟁이를 다 만났다. 그러다가 아주 용한 점쟁이를 발견해서 오랫동안 이야기도 나누고 경 읽는 법도 배우곤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집에만 가면 안 되더라. 그래서 하루는 그 점쟁이를 밥이나 먹자고 집에 불러다가 문을 걸어 잠그고 ‘제대로 가르쳐주기 전까지는 못 돌아간다’고 윽박질러서 ‘영업비밀’까지 다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도무지 어떤 어조로 대사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더라. 녹화 하루 전날 밤, 잠을 자는데 이승만 전 대통령이 갑자기 떠올랐다. 그래서 그 말투를 따라서 했는데, 한마디로 대박이었다.”

변희봉은 TV에 집중하기 위해 라디오와 외화 더빙 일을 버렸지만,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고단한 생활과 집안의 반대로 2년 동안 연기를 그만두고 낙향하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다가 우연찮은 인연에 휘말려 다시 방송으로 복귀한 그에게 첫 기회가 찾아왔다. 김영란 주연의 <안국동 아씨>에 비중있는 역으로 출연하게 된 것이다. 점쟁이 연기는 힘들여 익힌 만큼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의 말투는 남녀노소가 다 따라하는 장안의 유행어가 됐다. 그런데 방송을 시작한 지 두달도 안 될 무렵,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며 드라마 중단을 요청했고, 방송사도 그의 역할을 없애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아쉬웠지만 그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뒤 다시 기회가 찾아온다.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의 <설중매> 편에서 유자광 역할을 맡은 것이다. 문지기 출신으로 숙적 한명회를 꺾고 연산군을 부추겨 무오사화를 일으키는 이 극적인 인물을 연기하면서 그는 “이 손 안에 있소이다~”라는, 당시로선 전무후무한 유행어를 만들어냈다. 덕분에 백상예술대상 인기상까지 받았던 그의 주가는 급상승해 모 음료의 CF까지 맡게 됐고, ‘밤무대’쪽에서도 유혹의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밤무대쪽에서는 선·후배는 물론이고 방송사 간부까지 동원해 그를 꼬셨지만,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기자의 길을 선택한 그로서는 눈앞의 거액보다는 명예를 지키는 것이 중요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시달리고 있는 와중에 미국에서 동포 상대로 위문공연이 있다고 하기에 도망도 칠 겸해서 절대 술집에서 공연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이선희, 심형래씨와 미국으로 갔어요. 그런데 워싱턴 공연이 술집에서 한다는 거예요. 또 공연 벽보를 봤더니 ‘유자광 미국에 오다’라는 제목인 거예요. 그래서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죠.” 시간이 흐르면서 유자광에 대한 기억은 잊혀져갔다.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 대원군 등 비중있는 역할을 맡기도 했지만, 갈수록 나이 든 연기자에 대한 출연 요청은 줄어들어갔다. 자칫, 그의 연기생활도 막을 내릴 터였다.

충무로 불신 지운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

“유자광 역의 인기가 남아 있을 때인데, <색깔있는 남자>라는 영화에 출연 제의를 받았어요. 영화사 회장님이 내 고향을 잘 아는 분이고 전무가 후배이고 해서 출연하기로 했어요. 집에 돌아와서 시나리오를 보는데 완전 포르노인 거예요. 나는 방송에 나가는 사람이라 섹스신은 곤란하다고 했더니 감독이 시나리오를 고쳤어요. 그래서 섹스 대신에 채찍을 들고 일본도로 쑤시고 하는… 색광, 변태가 됐죠. 그런데도 한 장면만 섹스신을 해달라고 해요. 그래서 팬티를 안 벗는다는 조건으로 찍었는데, 나중에 한컷만 팬티를 벗고 찍어달라고 하더라고요. 감독이 불쌍해서 그렇게 해줬는데, 그게 내겐 평생에 안 좋은 기억이에요.”

<플란다스의 개>

변희봉의 충무로에 대한 불신은 대단했다. 이두용 감독과의 <내시> 정도만이 좋은 기억인 셈이었고, 다른 영화의 경우 그리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중학교 동창인 남기남 감독과도 <씨내리>를 찍으면서 의가 상했을 정도다. 게다가 1999년 무렵은 아예 연기인생을 접으려고 할 때였던 탓에 어느 날 한 젊은 감독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달가웠을 리 없다. 전화 속 감독은 자신이 봉준호라고 하면서 <플란다스의 개>란 영화에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정중하게 거절했다. 거듭되는 전화공세에 지친 그는 결국 마포의 한 호텔에서 봉 감독을 만나게 됐다. 잘 알려졌다시피 이 자리에서 봉 감독은 <수사반장> <안국동 아씨> 등을 상세하게 읊으며 변희봉에 대한 애정을 피력했고, 그 열정에 탄복해 그는 승낙 결정을 내렸다.

막상 영화를 한다고는 했지만, 시나리오는 “<베스트셀러극장> 같았”고, 경비원 배역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일러 돌아간다, 잉~” 하면서 그로테스크한 유머를 보여준 ‘보일러 김씨’ 장면도 변희봉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가운데 촬영됐다. “나는 영화니까 근사하게 찍어줄 줄 알았다고. 비록 개는 잡는 몸이지만, 지하실도 아주 웅장한 분위기에다 오싹한 분위기가 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 아파트 지하실로 끌고가더라고. 스탭들이 다들 마스크를 쓰고 있는데, 먼지가 조명빛에 비쳐지는데 아주 연기 같았어요.” 어찌어찌 촬영을 마쳤지만, 그는 영화를 보지 않았다. 아예 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가 봉 감독이 하도 설득을 하기에 “맨 정신으론 못 보겠기에” 소주 한병을 걸친 상태에서 그는 영화를 보게 됐다. “아이고, 깜짝 놀랐어요. 영화를 기가 막히게 만든 거예요. 대한민국 영화 중에 이런 영화가 다 있냐 하는 생각이 들었죠.”

"나는 감독 복, 배우 복이 있는 사람"

“촬영 도중에 봉준호 감독이 지나가는 말처럼 한마디 슥 던집디다. 손녀를 잃었을 때 아버지와 할아버지 중 어느 편이 더 슬플까요, 라고. 우리는 금방 알아듣죠. 그러니까 현서에게 가는 마음은 아버지, 그러니까 송강호에게 넘기라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내 마음은 송강호에게 맞추고, 그러다보면 자연 저 괴물을 처절하게 응징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게 되죠. <괴물> 연기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면 그런 데서의 변화일 텐데,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봉 감독 것이라는 거죠.”

<살인의 추억>
<선생 김봉두>

<플란다스의 개> 이후 변희봉은 서서히 충무로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이어진 <화산고>에서는 비열한 교감 역할을 했고, <선생 김봉두>에서는 괴팍하지만 다정스런 내면을 가진 노인으로 나왔으며, <살인의 추억>에서는 전근대적인 수사관행을 상징하는 구희봉 반장으로 등장했다. 또 <불어라 봄바람>에서는 로맨스 그레이를 꿈꾸는 작가로, <시실리 2km>에선 겉과 속이 다른 잔인한 마을의 이장으로, <공공의 적2>에서는 사립학교에서 잔뼈가 굵은 교육자로, <주먹이 운다>에서는 죄수들을 상대로 무뚝뚝하게 권투를 지도하는 코치로 출연했다. 영화의 인기는 TV로도 이어져 최근 방송한 <위대한 유산>에서는 그동안의 이미지를 깨고 사장 역할을 맡기까지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만을 바꾼 게 아니다. 그와 함께 작업했던 감독, 배우들은 “변희봉은 정말 철저하게 준비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플란다스의 개> 때는 촬영 시작 한달여 전부터 ‘보일러 김씨’ 대사를 줄줄 외고 다녔고, <시실리 2km>를 위해서는 공사장에 3~4일 동안 출입하면서 시멘트 바르는 일, 즉 미장일을 손에 익혔다. <주먹이 운다>를 위해서 직접 권투를 배웠으며, <괴물> 준비과정에서는 태릉사격장에서 사격 연습도 했다. <안국동 아씨> 때 그랬듯, 그는 여전히 자신이 맡은 캐릭터를 찾아내기 갖은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작은 역이라도 맡게 되면 어딜 가도 그놈 생각만 나는 거예요. 혼자서 고민도 해보고, 길을 가면서 사람 얼굴도 유심히 보고, 혼자 거울을 보며 별 지랄도 다 떨어보고…. 그런데 그건 배우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는 거잖아요.” 그는 배우가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하더라도 감독이 그것을 깎아가며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야 보석이 된다며, 모든 공을 감독에게 돌린다. “배우의 변신은 결국 감독이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렇게 보면 나는 감독 복, 배우 복은 있는 사람이여.”

아직도, 주연의 꿈은 사라지지 않았다!

“솔직히 배우 얼굴은 아니지. 평범하지 않은 건 나도 알아요. 게다가 지금은 목소리가 쉬었지만 예전에는 아주 카랑카랑했다고. 그렇게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항상 염두에 둬요. 그래서 입을 이렇게 벌렸다가 다시 오무리고, 눈도 이렇게 치켜떴다가 내리깔기도 하고. 지금도 눈동자 운동을 하루에 200번, 300번을 합니다. 되든 안 되든 표정을 풍부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는 거죠. 할 수 있는 건 다 해보는 겁니다.”

변희봉의 매력 중 하나인 독특한 마스크도 절반은 타고난 것이지만, 절반은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형성된 그의 얼굴은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분위기와 인자하고 편안한 느낌을 동시에 품고 있다. 표정 짓기에 따라 그는 악동도 될 수 있고, 괴팍한 영감으로 변신하기도 하며, 처절한 영웅이 되기도 한다. 결국, 변희봉의 진정한 매력은 이러한 변화무쌍함이다. 이미 안정적인 틀을 갖추고 비교적 고정된 이미지만을 보여주는 여타 중장년 연기자들과 달리 변희봉은 언제든 파격을 실행할 수 있는 준비가 돼 있는 것이다. 그동안 그가 평범한 아버지 역할이나 올바르게 살아가는 노인 역할을 거의 해본 적 없는 것도 그의 장점을 극대화하려는 연출자들의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괴물>에서 그는 비로소 3남매의 아버지이자, 한 가정의 큰 어른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동안 형성된 변희봉의 이미지를 역이용하려는 봉준호 감독의 전략의 산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물론 변화와 변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나를 변신시켜주는 감독들을 만났으면 좋겠다”고 거듭 말하는 변희봉의 열정에서 비롯된 바다. 그런 면에서 “변 선생님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기 때문에 훨씬 좋은 연기자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어디까지 나아가실지 아직은 모르겠으니까”라는 장항준 감독의 이야기는 이해가 된다.

그는 <플란다스의 개> 때부터 다시 시작된 연기인생을 행운 또는 덤이라고 생각한다. “그때 내가 거듭 거절해서 봉 감독이 포기했다면 과연 지금 나는 무엇을 하고 있겠습니까.” 그가 거듭 자신을 채찍질하고 더 높은 곳을 향해 몸을 가누고 있는 것은 어쩌면 그 행운에 대한 보답인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그는 언젠가 찾아올 주연의 기회를 준비하고 있다. “아직 꿈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주 좋은 주연 작품이 한번은 걸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도 간혹 노인 얘기를 소재로 한 시나리오가 들어오는데 아직은 무르익지 않았다고 생각하지만, 언젠가는 기회가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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