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학교 안, 황폐한 십대들의 하얀 누아르, <브릭>
2006-12-21
글 : 황수진 (LA 통신원)

전통적인 필름 누아르가 도시의 뒷골목,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어두운 가로등을 보여준다면, <브릭>은 캘리포니아 교외의 한 고등학교, 오후의 내리쬐는 햇살을 잡아내고 있다. 시간이 선사하는 과거의 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에 <브릭>의 주인공들은 26살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지는 십대들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어 유들유들하기까지 한 누아르 속 탐정 대신 오프닝의 잔잔하면서도 애잔하기까지 한 음악과 함께 화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헝클어진 머리, 제대로 닦지 않은 와이어 안경, 낡아빠진 청바지, 때묻은 재킷을 입고 소녀의 시체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브랜든(조셉 고든 레빗)이다. 브랜든의 시선은 소녀의 엉망이 된 금발 머리, 갈색 구두, 그리고 그녀의 파란 팔찌로 침착하게 옮겨진다. 한때 브랜든의 여자친구였던 소녀의 이름은 에밀리. 브랜든은 이틀 전, 그녀와의 대화를 떠올린다. 자신의 사물함에 남긴 쪽지를 따라 찾아간 도로변 공중전화 박스에 걸려온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헤어진 연인의 목소리는 어색하고 다급하다. 그녀가 도와달라고 횡설수설하며 알 수 없는 말들을 할 때 도로 위를 고속으로 질주하는 지나가는 자동차의 굉음과 함께 전화는 끊긴다. 도로에 혼자 남겨진 브랜든이 땅바닥에서 집어올리는 것은 자동차 창문을 통해 던져진 누군가의 담배꽁초. 그리고 이틀 뒤 에밀리는 지하도 앞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이제 브랜든은 의뢰한 모든 정보를 예외없이 제공해주는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인 유일한 동료(이들의 관계는 친구라기보다는 확실히 동료의 느낌이 강하다) 브레인과 함께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브릭’의 진실- 고등학교에서 벌어지는 마약 거래- 에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한다.

<브릭>이 성취한 필름 누아르 전통의 성공적인 재가공은 감독·각본을 맡은 신예 라이언 존슨의 재능에 상당 부분 기대고 있다. 브랜든이 단서들의 조각을 하나하나 섬세하게 짜맞춰가는 과정은 라이언 존슨의 치밀하게 계산된 장면 전환과 맞물려 하나의 호흡으로 끝까지 내달려간다. 영화학교 시절 코언 형제의 <밀러스 크로싱>에 심취해 있었으며 스스로 필름 누아르의 열혈 팬임을 숨기지 않는 라이언 존슨의 눈부신 시나리오는 대시엘 해밋(Dashiell Hammett)의 탐정소설을 그 모태로 해 다른 시대, 다른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전통적인 누아르의 장르적 장치를 치밀하게 따르고 있으며 동시에 그 정서 역시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배경은 오늘날 미국 교외의 한 고등학교지만, 이상한 느낌이 날 정도로 정교하게 구성된 학교 안 교실 밖의 세계이다. 사물함, 쓰레기통, 무대 분장실 등 철저히 계산된 공간들과 독특한 캐릭터들이 만들어내는 영화 특유의 묘한 분위기에선 데이비드 린치의 세계가 연상된다.

<브릭>에서 누아르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해주고 있는 사운드와 음악과 함께 또 하나 언급할 만한 요소는 유난히 신발들만을 잡은 로앵글(low-angle) 컷이 자주 보인다는 점이다. 얼굴을 볼 수는 없지만, 인물들의 존재감과 특성(현대를 배경으로 하지만, 스니커즈가 아닌 빈티지 구두들이 화면을 장식하고 있다)들을 적당한 긴장과 함께 보여줌으로써 필름 누아르 특유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 영화가 더 매력적인 것은, 전반에 깔려 있는 한번쯤 겪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묻어둔 십대의 기억과 정서이다. 선망받는 무리에 끼고 싶었던 마음, 서로의 세계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때의 씁쓸함, 잃어버린 사랑·우정에 대한 집착, 그리고 한껏 어깨를 움츠리고 뒤돌아서던 기억. 브랜든 역을 맡은 조셉 고든 레빗은 <솔로몬 가족은 외계인>(3rd Rock from the Sun)에서의 코믹한 이미지를 벗고 하얀 누아르의 비밀스럽고도 황폐하기까지 한 주인공의 정서를 잘 전달함으로써 <미스테리어스 스킨>(Mysterious Skin)에 이어 이 작품에서도 연기파 배우로서 제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이제 또 다른 진실을 알아버린 주인공은 다시 홀로 남아 이제는 익숙해져버린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보이고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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