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웅장한 정원에 피었던 청나라의 번영과 몰락, <원명원>
2006-12-21
글 : 김희정 (베이징 통신원)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불후의 명작 <마지막 황제>의 엔딩은 이미 관광지가 되어버린 자금성에 들어가 쓸쓸히 그곳을 둘러보는 푸이의 모습이다.

중국 청왕조의 마지막 황제 푸이가 그토록 돌아가고 싶었던 곳은 자금성이었겠지만, 그곳은 그가 몰락하는 왕조의 마지막 계승자였다는 태생적 비극의 무대일 뿐이다. 2천여년간 중국 황제 통치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찬란하게 빛난 청대 황실의 주무대는, 사실 자금성이 아니라 ‘원명원’이었다. 원명원은 우리에게 자금성만큼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중국 청대의 번영기가 한눈에 드러나는 정치의 중심지이자 중국 고대 도서와 문물의 보고였으며 중국 전통 문화와 서양 문화가 혼합된 건축양식과 각양각색의 원림들이 전시돼 있는 일종의 박물관 같은 곳이다.

다큐멘터리 <원명원>은 그 창건부터 폐허로 남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면서 그 속에서 펼쳐진 청왕조의 생활상과 황제들의 정치이념 그리고 청왕조의 몰락 배경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올해 10월 중국 전역 극장에서 개봉돼 인민폐 1천만위안이라는, 다큐멘터리로서는 기대 이상의 극장 수익을 거두며 중국 영화시장에 다큐멘터리 장르의 진입 가능성을 낙관하게 만든 작품이다.

영화는 황실 화가로 와 있던 프랑스 랑스닝이라는 화가가 바라본 청대 최고 번영기를 다룬 앞부분과, 영국군을 따라 들어온 영국 선교사가 원명원의 파괴와 청조 몰락과정을 바라본 후반부로 나뉜다. 이들의 증언과 더불어 황제들의 생활모습과 역사적 사건을 재연하며 드라마적인 요소로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시도는 기존의 다큐멘터리 기법을 극복해보려는 제작팀의 새로운 도전이었다. 또한 철저한 고증과 뛰어난 컴퓨터그래픽 기술 덕에 온전한 자기 모습을 복원한 원명원의 웅장한 면모는 관객에게 충분한 시각적 즐거움을 선사한다. 모란꽃 활짝 핀 원명원, 황실미술관인 ‘여의관’, 중국 강남의 자연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갖가지 화원, 동해의 용궁을 옮겨왔다는 ‘방호승경’,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의 것을 본뜬 화려한 분수, 로마식 기둥과 바로크식 아치가 어우러진 고대 건축물 등 원명원의 장관을 이루는 모든 건축물과 정경들은 그대로 영화 속에서 되살아난다. 원명원 안의 건축물들이 보여주듯이, 서구의 문화까지도 황실의 정원 안으로 가져올 수 있다는 중화사상에 가득 찬 청조의 황제들은, 그러나 세계 역사가 근대화로 나아가는 격동의 시기를 알아차리지 못한 탓에 서구 열강의 침략을 무방비 상태에서 맞게 되고 마지막 제국은 운명을 다하게 된다. 아편전쟁 뒤 1860년과 1900년 두 차례에 걸쳐 영국군과 프랑스군에 치명적인 침탈을 당한 원명원은 오늘날 그 본래 모습의 2%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역사적 사실에 대한 기록으로서의 다큐멘터리 특성을 고려해본다면, 이 영화가 부딪혔을 가장 큰 난제는 원명원의 재현이다. 그 엄청난 규모의 원명원의 실제 모습을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기록에 따르면 150여년에 걸쳐 완성된 원명원의 최종 모습은 1천여개의 궁전과 100여개의 원림 경관, 600여개의 크고 작은 축구장 등이 있었고 총면적은 5천묘(약 100만평 정도)에 달하는 크기였다고 한다. 2세기에 걸쳐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등 청대 전성기를 이룬 황제들의 정치이념, 사상, 제국에 대한 신심은 고스란이 원명원의 웅장한 면모에 녹아 있었던 것이다. 청대의 황제들은 겨울에만 자금성에 들어가 1개월여 동안 머물렀을 뿐 제의와 경전, 국사 집행 등 대부분의 시간을 이 원명원에서 보내면서 청왕조의 가장 융성했던 시기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그러나 오늘날 남은 것은 1900년 프랑스 군대가 공격할 당시 3일 밤낮을 타고 남은 돌 무덤에 가까운 잔해뿐으로 감독 진티에무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다. “실제 원명원에 갔을 때 우리가 찍을 수 있는 장면은 오로지 돌과 돌뿐이었으며 고작해야 5분도 채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원명원의 나머지 98%를 복원하는 것은 촬영팀에 가장 큰 숙제이자 성공의 관건이었다. 이런 미션 임파서블을 감당해낼 파트너를 찾기 위해 촬영팀은 뉴질랜드로 날아갔고 여기서 <반지의 제왕> <킹콩> <나니아 연대기: 사자, 마녀 그리고 옷장>의 CG를 맡았던 웨타와 최종 계약을 맺었다. 제작팀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서적과 그림 등을 토대로 원명원의 창건 당시 모습을 파악해내고 웨타의 3D기술과 특수효과로 실제에 가까운 원명원을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다.

1년 이상의 준비기간과 4년여에 걸친 촬영기간, 그리고 중국 다큐멘터리로서는 블록버스터급에 가까운 1천만위안의 제작비는 고스란히 작품에 대한 호평으로 돌아왔다. ‘드라마 같은 다큐멘터리 혹은 다큐멘터리 같은 드라마’라는 제작 원칙은 사실의 기록이라는 다큐멘터리의 본질을 넘지 않는 선에서 기록영화의 단조로움을 보완하고 객관성을 더해주는 참신한 시도로 읽혔다.

영화는 원명원의 웅장하고 거대한 면모를 온전히 재현해냄으로써 오히려 중국을 침탈해온 프랑스와 영국 군인들의 행위가 얼마나 야만적인가를 역설하는 듯하다. 이런 점에서 다큐멘터리 <원명원>이 주요 서술자를 중국 황실에 있던 프랑스 화가와 영국 선교사로 삼으면서 가해자 스스로 자신의 행위를 비난하게 하는 구조를 취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읽힌다. 영화는 위대한 역사적 유산을 잃은 비극을 강조하며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의 항의서한을 인용해 끝을 맺는다. “어느 날 원명원에 두 강도가 침입했다. 한 사람은 약탈, 한 사람은 방화. 역사의 심판 앞에서 두 강도는 각각 영국과 프랑스라 불릴 것이다.” 다큐멘터리 <원명원>에서 던지고 싶은 직설적인 메시지가 이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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