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쇄강간범과 그를 사랑하는 여인을 다룬 세 시간짜리 독일영화. 이 한 문장으로 <자유의지>를 관람하려는 ‘자유의지’는 확연히 갈라진다. 그러나 마티아스 글라스너 감독의 독일영화 <자유의지>는 김기덕의 <나쁜 남자>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느리고 고통스러운 인류학적 탐색이다. 연쇄강간범 테오(율겐 포겔)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여성을 끔찍하게 강간한 뒤 경찰에 붙들려 9년을 복역한다. 출소한 그는 이제 정부의 프로그램에 따라 인쇄소에서 일하며 사회적응 훈련을 시작하고 동시에 자신의 파괴적인 욕망과도 맞서 싸워야만 한다. 테오의 삶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리라는 희망은 인쇄소 사장의 딸인 네티(사빈느 티모테오)에게서 온다. 영화에서 설명되어지지 않는 과거의 상처 때문에 남자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며 살아가는 네티와 본능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자들을 거부하며 살아가는 테오는 연민에 가까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테오는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네티로부터 도망쳐 또다시 연쇄적인 강간을 저지르고 다닌다. 네티는 테오가 강간범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를 찾아 나선다.
<자유의지>는 논쟁적인 영화다. 롱테이크로 거칠게 찍힌 첫 시퀀스의 강간장면은 차갑게 관찰하는 듯한 카메라의 시선으로 인해 보는 이의 심장에 상처를 입히고, 갱생의 자유의지를 시험받는 강간범이라는 소재는 막연하게 불편하다. 그러나 감독 마티아스 글라스너(<섹시 세이디> <판당고>)는 가스파 노예가 아니다. 그는 소모적인 논쟁 속으로 관객을 몰아가는 대신 관객과 캐릭터들을 상처입힌 뒤에 나지막이 묻는다. 과연 폭력적인 연쇄강간범이자 섹스 중독증 환자가 사랑을 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까. 아니, 누구를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인간적 권리가 있는 것일까. 마티아스 글라스너는 “<자유의지>는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폭력에 대한 이슈를 만들어내고자 만든 영화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극단적인 강인함과 나약함을 보여주는 여행이라고 단언한다. “이것은 일종의 ‘여행’(Trip)이다. 우리는 영화를 통해 마지막까지 결연하게 치닫는 두 사람과 함께 걸어간다. 그들이 더 나아지건, 혹은 더 나빠지건 간에 말이다.” 이는 여행의 종착점이 도덕적인 결론은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글라스너는 간혹 한밤중의 촛불처럼 가냘프고 옅은 희망을 보여주기도 한다. 테오가 네티를 만나기 위해 그녀가 일하는 벨기에의 초콜릿 공장으로 떠나는 시퀀스. 벨기에의 해변을 별말없이 걷던 두 사람이 작은 성당으로 들어서는 순간 <아베 마리아>가 흘러나온다. 감상적인 클리셰처럼 들리지만, <자유의지>의 냉정함을 따르던 관객에게 이는 진실된 구원의 손짓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자유의지>는 결코 의지의 승리를 예감할 수 없는 영화다. 테오는 뒤쫓아온 네티를 피해 해변으로 달려가 생을 놓아버리고, 체온을 잃어가는 그의 곁에서 네티는 조용하게 통곡한다. 네티의 자유의지는 테오를 살릴 수도 있었을 테지만, 둘은 의지만으로 그들의 사랑이 완성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누군가는 그것을 의지의 실패로 볼 것이고, 누군가는 “자살은 완전하게 책임질 수 있는 이성적 행위”라던 쇼펜하우어의 경구를 실천한 테오의 ‘자유의지’의 승리라고 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최후의 장면에서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자유의지>는 마티아스 글라스너 감독의 영화이자 제작과 각본을 맡은 주연배우 율겐 포겔의 영화이기도 하다. 이 작품으로 2006년 베를린영화제 은곰상(예술공헌상)을 수상한 율겐 포겔은 캐릭터에 쓸모없는 감상을 덧씌우지 않고도 하나의 인간으로 피를 더하는데, 캐릭터만큼이나 괴물 같은 연기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것이 고통스러울 정도다. 실망스러운 사실 한 가지. 독일 영화계의 재능을 강렬하게 증명하는 <자유의지> 같은 작품이 베를린영화제 수상경력에도 불구하고 올해 부산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전혀 소개되지 않았다는 것은 애석하다. 게다가 인공조명 하나없이 로키로 진행되는 163분의 독일영화라면 정식 개봉 또한 쉽지 않을 것이다. <자유의지>를 보기 위해서는 수많은 자유의지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