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 같으시다고 할까, 두눈에 낭만적 세계를 꿈꾸는 듯한 표정이 있다. 남들 쉴 때도 조용히 책을 읽으시고. 목소리도 속삭이듯 하고 절대 남 험담도 불평도 안 하신다. ‘때묻지 않은’이라는 표현이 가장 정확하겠다. 연기할 땐 심층적으로 파고들어 인물에 얽힌 여러 가능성을 고민하시는데, 그 과정에 문학적 소양이 드러나더라. 영군 엄마는 내가 창조한 캐릭터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인물이다. 영군이 왜 저렇게 됐는지 알 수 있다. 멀쩡하다가도 어느 순간 형광등 퓨즈가 나가듯 ‘삑사리’를 내는데 소녀 같은 이 분이 그걸 연기할 때 참 좋았다. 할머니 유골과 순대 소금을 혼동하거나, 자기가 사이보그라는 딸을 붙잡고 ‘몸은 괜찮아? 먹고 싶은 거 없어? 무라든가…’ 하는 장면은 지금도 보면 흐뭇하다.”(박찬욱 감독)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영군 엄마 얘기가 나오자, 눈가에 벌써 애틋한 기색이 번진다. “엄마와 딸은 정신이 나갔고, 가장으로 이들을 먹여살리기까지 하는데 얼마나 힘들어요… 그 광기는 그래서 생긴 거예요. 이 여자는 정말… 나랑 똑같은 보통 사람.” <친절한 금자씨>를 본 사람이면 <싸이보그지만…>의 영군 엄마가 눈에 설지 않았을 것. 바로 폐교에 모인 학부모들 중 말없이 곱게 눈물만 반짝이는 ‘재경 엄마’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영화 현장이 익숙치 않았던 그는 ‘컷’이 뭔지도 몰라 헤매야 했다. 영화 연기에 대한 책을 가져와 구석에서 조용히 읽기만 했지 감독과 사담 한번 못 나눴던 터라 <싸이보그지만…>에서 더 큰 역할로 연락이 오자 그저 놀랄 뿐이었다. 영화에선 주로 작은 역을 맡았지만 이용녀는 78년부터 극단 현대극장, 신씨뮤지컬컴퍼니 등에서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넌센스>, 연극 <연산> <애니깽> 등의 굵직한 공연을 거친 중견배우다. <친절한 금자씨>에서의 사소한 역을 설명할 때도 엘리아스 카네티의 <군중과 권력>을 인용하는 그는 철학과 사회과학, 경수필을 가리지 않는 독서광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스스로 문학소녀랍시고” 명동예술극장의 <무녀도>를 찾았고, 시뻘건 조명이 불꽃처럼 널름대는 무대를 보고 연기에 혼을 뺏겼다. 평소엔 소녀처럼 다정다감하지만 연극계에선 후배들에게 ‘재수없다’는 인상까지 주는 무서운 선배다. 배우라면 으레 몰려다니는 술자리를 일부러 멀리하는 이유는, 서로 엉겨붙어 위로하느라 자기 몫의 고민을 유예하는 게 싫어서다. 가장 큰 영향을 준 영화는 뒤늦게 찾아본 왕가위 감독의 <해피 투게더>. 주인공들의 지독한 외로움에 함께 몸서리를 치고 나자, 혼자가 아니라는 막연한 동질감에 날아갈 듯한 행복감이 찾아왔다. 지금 그에게 ‘영화’는 곧 ’박찬욱’이다. “영화가 잔인하다고들 하는데 아니에요. 사람은 누구나 매일 복수하고 살아요. 박 감독님 영화는 정말 뾰족한 데 하나 없어요. 딱 그 양반 성격처럼.” 평생 연기만을 생각했지만 그건 커리어를 위해서도 훌륭한 배우가 되겠다는 욕심 때문도 아니다. “작품이 대단해서, 역할이 커서, 돈을 벌어서가 아니에요. 난 딱 한신에서 스쳐지나더라도 그걸로 내 하루를 충만하게 하려고 연기를 해요.” 영화를 공부해 좀더 자유롭게 활개치고 싶은 그는 요즘 영화서를 옆에 끼고 시네마테크에 출석도장을 찍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