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청춘을 거스르는 진한 향기, 백정림
2007-02-06
글 : 김민경
사진 : 이혜정

“<바람난 가족>의 연 역할 때문에 여러 사람을 만나봤지만, 그중 이 사람에겐 나이답지 않은 고상함이 있었다. 점잖고 어른스러운 젊은 여자랄까. 그 나이대엔 발랄하고 통통 튀는 여자들이 인기를 얻곤 하지만, 난 백정림을 통해 다른 여자를 보여주고 싶었다. 황정민과 좋은 연기를 많이 보여줬는데 분량상 편집이 많이 돼 가장 미안한 배우이기도 하다.”(임상수 감독)

그가 카메라 앞에 서자 날렵하게 떨어지는 170cm의 실루엣이 벽에 드러워진다. 화사한 미소 대신 그는 눈밑에 움푹 그늘이 지도록 고개를 숙인 채, 숨을 고르는 권투 선수처럼 입가를 훔치는 포즈를 취한다. 낮은 목소리와 강단있는 눈빛, 어른스러운 차분한 분위기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은근히 공존하는 인상을 만든다. 연기를 전공하지도, 연극 무대에서 경력을 쌓지도 않았던 스물다섯의 ‘생짜 신인’ 백정림은 <바람난 가족>에서 변호사 주영작(황정민)의 애인 연 역할로 강렬한 데뷔 신고식을 치렀다. 당시 소속사는 강도 높은 노출신을 걱정했지만 백정림은 시나리오를 받자마자 이 서늘한 가족영화에 단박에 매료됐다. 임상수 감독은 몇번의 테스트가 전부인 공개 오디션은 신인 연기자를 발굴하기엔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대신 인생 이야기를 나누며 그 안에 연의 캐릭터가 있는지 타진했다. 임상수 감독이 툭 던진 “…자네, 매력이 있구먼”이란 무심한 말에 어리둥절하면서, 십여 차례의 만남을 더 가지자 계약서가 날아왔다.

<바람난 가족> 이후 백정림은 최진성 감독(<뻑큐멘터리-박통진리교>)의 <히치하이킹>, 제1회 환경영화제에 상영된 장진, 송일곤, 이영재 감독의 옴니버스 <1, 3, 6>에 출연했고, 지난해 김영남 감독의 <내 청춘에게 고함>에서는 김태우의 바람난 아내 역할을 맡았다. 짧은 필모그래피에서 그가 주로 맡은 역할은 힘들이지 않고 남자들의 뒤통수를 때릴 수 있는 여자다. 백정림은 그들이 지닌 자유로움이 부럽다. 그들처럼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고 마음껏 운신해도 지킬 선을 지키기 위해, 누구보다도 단단한 내면을 갖추고 싶다. 그래서 <질투는 나의 힘>에서 “힘 하나도 안 주고 루스해 보이면서 핵심이 살아 있는” 배종옥에 빠져들고, <빨간 구두>에서 페넬로페 크루즈의 전신에 넘치는 에너지에 매혹된다. 지금 그의 첫 번째 과제는 <바람난 가족>이 경력에 드리운 긴 그림자를 극복하는 것. 자기 얼굴과 꾸밈새가 상업적으로 어필하지 않는지 가끔 고민도 하지만 콤플렉스는 없다. “<왕의 남자>의 이준기처럼, 제가 남장여자 역을 맡으면 어떨까요?” 지금 그가 가장 갈망하는 건 “서 있는 것도 힘겨울 만큼 심신이 피폐해진” 인물에 자신을 푹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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