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 러버스>는 제임스 그레이의 첫 번째 비갱스터 장르영화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에서 장르적 외피가 중요했던 적은 거의 없다(그를 ‘작은 스코시즈’라고 부르는 건 좀 재미없는 일이다). 오히려 <투 러버스>는 <더 야드>와 <위 오운 더 나잇>에 이어지는 ‘제임스 그레이의 와킨 피닉스 3부작’이라고 일컬어도 좋은 영화다. 그게 어떤 영화냐고? 일탈을 시도하지만 결국 안정된 가족의 삶 속으로 침잠해버리는 남자들의 초상 말이다.
레너드(와킨 피닉스)는 약혼녀에게 파혼당한 뒤 극심한 우울증을 겪다가 부모 집으로 돌아와 사는 유대인 청년이다. 그는 아버지의 세탁소 일을 도우며 낡은 사진기로 사진을 찍는 걸로 마음의 위안을 삼는다. 레너드의 부모는 아들이 다른 세탁소 주인의 딸 산드라(비네사 쇼)와 결혼하길 원한다. 하지만 레너드는 위층에 사는 독신녀 미셸(기네스 팰트로)을 흠모한다. 유부남 변호사와 내연의 관계에 있던 미셸은 점점 레너드에게 마음을 열어가지만 결국 유부남을 선택하고 떠나간다. <투 러버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단편인 <백야>에서 기원한 이야기다. 제임스 그레이는 “각색이라기보다는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 게 맞다”라고 말한다. “사실 도스토예프스키를 원작에 가깝게 각색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도스토예프스키를 각색하려면 그의 정신을 뭔가 다른 것에 접붙이기 해야 한다. <투 러버스>는 <백야>와 리나 베르트뮬러의 <귀부인과 승무원>(1975), 나의 개인적인 삶의 콤비네이션에 가깝다.”
주인공 레너드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미셸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미셸은 마약과 불륜, 뉴욕의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며 살아가는 여자다. 레너드에게 그녀는 신천지다. 그러나 그는 같은 유대인 처녀 산드라와 결혼해 안정적인 삶을 누리길 원하는 부모의 뜻을 거절하지 못한다. 레너드는 갱과 경찰의 전쟁 사이에서 가족을 배신하지 못한 채 결국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위 오운 더 나잇>의 주인공과 일종의 도플갱어다(두 캐릭터 모두 와킨 피닉스가 연기한다). 그러나 제임스 그레이가 가족을 강압적인 괴물로 그리는 건 결코 아니다. 그는 오히려 평범하고 헌신적인 가족의 양면성을 들추어낼 따름이다. “나는 ‘감독이 되려고 하지 말라’고 하는 아버지 아래서 자랐다. 그는 말했다. ‘우리는 부자가 아니다. 연줄도 없다. 할리우드 출신도 아니다. 넌 절대 감독이 되지 못할 거다.’ 물론 그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틀렸다. 나는 감독이 됐다. 모든 가족의 내부에는 무시무시한 감정적 지원과 감정적 파괴라는 양면이 숨어 있다.”
<투 러버스>는 제임스 그레이의 영화 중에서도 가장 감정적인 여진이 오래 남는 작품이다. 게다가 갱스터 장르를 벗어나자 그레이의 사려 깊게 반복되어온 영화적 기운은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그 덕분에 <투 러버스>는 제임스 그레이를 프랑스 평론가들이 과대평가하는 장르 감독이라 여겼던 미국 비평가들에게도 후한 찬사를 받아냈다. 이제는 우리가 제임스 그레이를 재발견할 차례다.
TIP/ 제임스 그레이의 걸작이라는 게 구미에 안 당긴다고? 이 영화는 와킨 피닉스의 영화계 은퇴작이기도 하다. 물론, 그가 은퇴 선언을 뒤집지 않는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