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하반기 기대작] 4. 나인
2009-09-22
글 : 이화정

개봉도 안 했는데 걸작의 반열에…

“감독은 너무 과대평가된 직업이에요. 다들 아시잖아요. 감독이 하는 일이 ‘예스’ 또는 ‘노’라고 답하는 게 고작이라는 걸. 딴 게 더 있을라고요? 천만에요.” 아마 이 도발적인 언사가 전세계 감독들을 그토록 사로잡았나보다. 영화 <나인>의 한 구절. 영화의 주요 인물인 프로듀서 릴리안(주디 덴치)이 예술가로서의 방향을 잃은 감독 귀도(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향해 내뱉는 대사는 세상 모든 감독을 향한 통렬한 비판이자, 자극이다. 감독들이 영화화하고 싶은 작품 1순위에 올랐으나, 원작자 페데리코 펠리니의 명성에 눌려서, 혹은 자신이 ‘예스’나 ‘노’를 대답하는 감독에 그칠까봐 저어했던 영화. 금기를 깨고 나선 이는 롭 마셜 감독이다. 그나마 다행이다. 그가 뮤지컬영화 <시카고>를 제법 성공적으로 연출한 롭 마셜 감독이라서.

11월25일. <나인>의 할리우드 개봉을 앞두고, 언론은 각자의 방식으로 이 영화를 향한 흥분을 전했다. ‘생각만 해도 11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달뜬 바람과 함께 개봉일을 늦게 잡은 건 모두 ‘최대한 많은 수상을 하기 위한 속셈’이라는 억측도 전해졌다. 개봉도 하기 전에 이미 기대만으로 <나인>은 ‘아카데미 최다 수상작’, ‘가장 훌륭할 올해의 영화’로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사실 이 영화를 기다리게 만드는 제1 원동력은 영화 이전의 것들이다. 이미 45년 전, 페데리코 펠리니의 최고작이라 해도 손색없는 원작 <8과 1/2>이 남긴 철학적 질문들이 바탕이 되었다는 점, 여기에 1982년 브로드웨이에서 첫 공연된 뒤 다섯 차례나 토니상을 수상한 뮤지컬 <나인>의 매혹적인 춤과 노래가 고스란히 스크린에 연출될 것이라는 보장까지 더해진 셈이다. 중요한 건 이 영화는 <맘마미아!>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국 <타임스>는 “리메이크작이 즐비한 올해에 <나인>은 가장 용감한 작품이다”라며 이 영화의 도전 지점을 치하했다.

<나인>은 희대의 카사노바이자 영화감독 ‘귀도’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를 완성시키는 과정을 좇는다. 일과 사생활의 균형을 맞추기에 급급한 감독 귀도. 그가 자신을 둘러싸고 말을 걸어오는 17명의 여성과 벌이는 공상이 큰 줄기를 이룬다. 귀도를 성에 눈뜨게 해준 거리의 창녀 사라기나(스테이시 퍼거슨), 강렬한 섹시미로 그의 욕망을 채워주는 정부 칼라(페넬로페 크루즈), 신비로운 매력으로 그의 영혼을 치유해줄 배우 클라우디아(니콜 키드먼), 예술가로서 귀도의 방향을 일깨워주는 프로듀서 릴리안, 이 모든 혼동 속에서도 언제나 귀도편에서 그를 이해해주는 아내 루이자(마리온 코티아르) 등 대니얼 데이 루이스를 꼼짝 못하게 만들, 이른바 여배우들의 각축전이 펼쳐진다. 캐서린 제타 존스, 데미 무어, 줄리엣 비노쉬, 기네스 팰트로 등을 제치고 클라우디아 역을 따낸 니콜 키드먼의 사연과 루이자 역을 탐낸 케이트 홈스도 오디션에서 떨어뜨렸다는 롭 마셜 감독의 결단이 놀랍다. 귀도뿐 아니라 관객까지 혼미하게 만드는 캐스팅이다.

아무쪼록 롭 마셜 감독이 ‘예스’나 ‘노’만 하는 감독이 아니길 빈다. 원작에서 각을 더 세우고, 뮤지컬보다 더 화려한 영화적 볼거리가 제공되길. 물론 <나인>을 매끈하게 해줄 중심축은 뭐니뭐니해도 춤과 음악이다. 커다란 대형 화면, 예의 여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여 란제리룩으로 군무를 춘다니 상상만 해도 온몸이 짜릿해진다. 정 궁금하다면 예고편에 쓰인 블랙 아이드 피스의 보컬 퍼거슨이 내뿜는 파워풀한 주제곡 <Be Italian>이라도 감상하라. 짧은 맛보기 영상만으로도, 국내 개봉인 12월이 빨리 왔으면 싶어질 거다.

UP 화려한 캐스팅, 화려한 무대, 화려한 군무. 거대한 스케일. 이 영화에 화려하지 않은 것은 혹여나 영화가 별로일 경우 받을 평가 말고는 없다.

DOWN 롭 마셜의 <시카고>는 좋았지만 <게이샤의 추억>은 진부했다. 여배우들의 각축전을 연출하는 건 감독에게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제발 공리 빼곤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던 <게이샤의 추억>의 전철만은 밟지 말아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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