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제레미 레너] 냉정과 불안 사이
2010-03-04
글 : 김성훈
<허트 로커>의 제레미 레너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엔 악역만한 것도 없다’는 명제를 제레미 레너 앞에서는 살짝 치워야 할 것 같다. 물론 어떤 면에서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15년의 연기 생활 동안 그를 알린 건 악당 역할이었기 때문이다. 미치광이 살인마 제프리 다머(<다머>(2002))를, S.W.A.T. 특공대를 곤경에 빠트린 훼방꾼 브라이언 겜블(<S.W.A.T. 특수기동대>(2003))을, 그리고 세기의 암살자 제시 제임스의 난폭한 사촌형제였던 우드 하이트(<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7))를 통해 제레미 레너는 자신의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이는 지난해에 <허트 로커>에서 이라크 전쟁 중 폭탄 제거라는 위험천만한 임무를 맡은 제임스로 출연하기 전까지 유효했다. 전쟁의 광기 속에서 인간성을 유지하려는 강인한 의지를 실감나게 표현하면서 제레미 레너는 그간 구축한 악당 이미지를 한방에 뒤집어엎었기 때문이다.

그간의 단면적인 캐릭터 연기와 달리 <허트 로커>에서 제레미 레너는 인간의 양면을 보여준다. 적진 한구석에서 방호복 하나에 의지한 채 폭탄을 제거할 때는 누구보다 침착하다가도, 숙소에서 동료들과 장난칠 때는 누구라도 한대 칠 정도로 예민하다. 어쩌면 전쟁이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냉정과 불안을 오가는 모습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이번 연기의 관건이었을 것이다. 이는 캐릭터 구축을 위해 참여한 실제 폭발물 제거 훈련에서 그가 판단한 것이기도 하다. 캘리포니아 모하비사막에서 2주 동안 매일 제레미 레너는 무려 55kg이나 되는 방호복을 입고 훈련에 임했다. “몸도 몸이지만 정신적으로 너무 피곤하더라”는 그의 말만큼 폭발물 제거는 섬세함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극중 제임스가 지나치게 예민하고 변덕스러운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와 관련있을 것”이라고 분석했고, “복합적인 행동을 하는 제임스를 파악하는 데 집중”했다.

무엇보다 요르단에서 진행된 실전에서의 환경은 그의 판단에 살을 붙여주었다. 굳이 계산된 연기가 아니더라도 환경이 그를 제임스로 변모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제임스의 느릿느릿한 걸음걸이는 방호복의 엄청난 무게 덕분”이고, “시시때때로 변하는 제임스의 기분은 48도를 육박하는 폭염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는 “방호복에 갇혀 있다 보니 베토벤처럼 아무것도 들리지 않더라. 그 순간 마음이 평화로워지면서 본능에 따라 연기했다. 그리고 제임스가 되었”다. “캐스린 비글로 감독은 <허트 로커>를 통해 ‘전쟁’이 아닌 ‘전쟁에 의해 상처받은 인간’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다. 그 중심에 제레미 레너가 있다”(<버라이어티>), “레너는 영화에서 진실된 모습을 보여준다”(<할리우드 리포터>) 등과 같은 호평이 이어진 것도 캐릭터에 대한 그의 집요한 탐구와 환경에 대한 적극적인 적응 덕분이다.

이처럼 강력한 메소드 연기로 제레미 레너는 지금 배우 인생의 화양연화를 맞고 있다. “오스카로부터 내가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어릴 때 처음 디즈니랜드에 간 느낌이 떠올랐다”고 그는 기뻐했다. 하지만 후보에 오른 배우들 중 유일하게 조연급 배우인 제레미 레너는 겸손함을 잃지 않는다. “이미 모든 것을 이뤘다. 앞으로도 매 순간 성실하게 연기를 할 것이다.” 어느 누가 이런 배우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자, 어떤가. 이것만으로도 레너라는 계란이 쟁쟁한 바위들을 부술 준비는 다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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