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샌드라 불럭] 로맨틱코미디의 갑옷을 벗고
2010-03-04
글 : 장영엽 (편집장)
<블라인드 사이드>의 샌드라 불럭

샌드라 불럭과 가장 안 어울리는 단어를 말하라면 그건 바로 ‘엄마’다. 그녀의 올해 나이 45살. 이미 엄마가 되었어도 한참 전에 되었을 나이지만, 여전히 불럭은 잘 짜여진 가족의 일원이기보다 이제 막 둘이 되려는 독신녀의 모습이 더 잘 어울린다. ‘도시 여자’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세련된 얼굴과 차분한 목소리, 오피스룩을 위해 태어난 듯한 몸매가 이러한 이미지 조성에 기여했음은 물론이다. 어찌됐든 ‘제대로 교육받고 곱게 자라난 중산층 전문직 여성’이 바로 샌드라 불럭에게 관객이 기대하는 모습이며, 그녀 역시 이러한 이미지를 반복·변주함으로써 로맨틱코미디 장르 안에서 자신의 영역을 확고하게 구축했다. 이른바 ‘오피스 로맨스의 여왕’이라고나 할까. 사회의식 투철한 환경전문변호사 역을 맡아 철없는 부동산 재벌(휴 그랜트)과 사랑에 빠지는 <투 윅스 노티스>, 워커홀릭에 한 성격 하는 노처녀로 등장해 연하남 부하직원(라이언 레이놀스)에게 길들여지는 <프로포즈>가 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기에 불럭이 <블라인드 사이드>를 선택한 건 의외의 결정이자 주목할 만한 변화다. 미식축구 스타 마이클 오어의 실제 성장과정을 다룬 마이클 루이스의 베스트셀러 <블라인드 사이드: 게임의 진화>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에서 샌드라 불럭은 가족을 잃고 집도 없는 10대 흑인 소년 마이클(퀸튼 오어)을 입양해 스타 플레이어로 키워내는 리 앤을 연기한다. 금발로 염색한 머리에 고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길 잃은 어린 양에게 사랑과 관대함이라는 미국 백인 중산층의 보수주의적 가치가 어떤 것인지 보여준다. 먹이고 입히고 재우는 건 물론이고,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마이클의 내면을 따뜻하게 보듬어준다. 그런데 이 역할, 샌드라 불럭에게 꽤 잘 어울린다. 심드렁하게 미국 남부 악센트를 구사하는 것도 자연스럽고, 연민이나 감성의 과잉없이 무덤덤하게 아이를 대하는 태도도 오히려 진짜 엄마 같아 보인다. 그런 그녀의 연기에 언론과 평단의 반응은 그 어느때보다 후하다. “금으로 만든 심장과 철의 마음을 가진 리 앤을 연기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버라이어티>). “불럭 인생 최고의 연기”(‘필름스레트닷컴’). <블라인드 사이드>는 그녀에게 골든글로브 여우주연상을 안겨줬다. 그리고 이제는, 인생 최초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경쟁자는 <줄리 & 줄리아>의 메릴 스트립이다.

사실 지난 몇년간 샌드라 불럭의 커리어는 본격적인 하향세로 접어들었다. <투 윅스 노티스>(2002) 이후 불록의 영화는 흥행에 거의 성공한 적이 없다. <미스 에이전트 2>(2005)의 실패로 로맨틱 코미디 여왕의 지위는 캐서린 헤이글 같은 후발주자들에게 넘어갔다. 불럭은 로맨스 영화 <레이크 하우스>(2006), 초현실적 스릴러 <프리모니션>(2007)에 도전했지만 성과는 미미했다.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경력의 종말을 맞이한 멕 라이언의 전철을 밟는 꼴이었다. 2009년은 꺼져가던 샌드라 불럭의 모닥불에 다시 기름을 끼얹었다. <프로포즈>는 그녀에게 로맨틱 코미디 여왕 자리를 되돌려주었고 <블라인드 사이드>는 샌드라 불럭의 <에린 브로코비치>가 됐다. 흥미로운 건 할리우드 역사상 유례없는 불럭의 재기전이 치밀한 계획에 의해 탄생한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그녀 역시 상에 대한 욕심이나 변화를 위한 열망 때문에 <블라인드 사이드>에 출연한 건 아니라고 인정한다. “그냥 자연스러운 거였다. 처음엔 리 앤이란 캐릭터를 도저히 연기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출연을 여러 번 거절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내가 촬영장에 나와 있더라. 심지어 나는 감독에게 출연을 승낙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예스’라고 말하긴 했었나?” 이처럼 미스터리한 캐스팅 과정을 거친 불럭은 리 앤을 직접 만나 그녀의 옷을 입고, 그녀처럼 행동하고 말하는 법을 익히며 점점 마이클의 엄마가 되어가기 시작했다.

샌드라 불럭은 언제나 미국이 사랑하는 ‘아메리칸 스윗하트’였다. 과거의 그녀는 ‘피플스 초이스 어워드’를 6번이나 수상했다. 데뷔 20여년만에 그녀는 또다시 미국인들의 심장을 움켜줬다. 얼마나 강하게 움켜줬나면, <뉴욕타임스>가 불럭의 남부 악센트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자마자 영화의 배경이 된 멤피스 독자들에게 항의 메일을 받아야 했을 정도다. “그녀는 진짜 조지아주 사람처럼 말한다. 사랑스럽고, 연기는 잘하기만 하는구먼.” 이제는 아카데미 회원들의 심장을 노릴 때다.

오스카상과 동시에 래지상에도 후보 오른 배우들

좋은 연기는 좋은 작품에서 나온다?

<올 어바웃 스티브>

샌드라 불럭은 <블라인드 사이드>로 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녀 연기 경력 중 최초 후보 등극이지만, 수상 가능성은 역대 최다수상자 메릴 스트립을 위협할 정도다. 중산층 주부로 변모한 불럭의 연기를 두고 모두들 불럭 제2의 전성기라 칭하느라 바쁘다. 이쯤에서 불럭의 재기를 축하해줄까 싶지만 섣부른 판단은 이르다. 심술궂은 골든라즈베리는 아카데미보다 하루빨리 불럭을 불러세웠다. ‘당신 <올 어바웃 스티브>에선 연기 너무너무 못하거든.’ 이게 불럭만 당한 수모는 아니다. <줄리 & 줄리아>로 (너무도 당연히) 후보에 등극한 연기지존 스트립은 <사랑은 너무 복잡해>에선 오버연기라 혹평받았고, 조지 클루니는 <인 디 에어>로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고서도 <염소를 노려본 사람들>에선 바보 같은 연기라 지탄받았다.

비단 올해만의 문제도 아니다. 아카데미 후보만 8번 오른 말론 브랜도도 <닥터 모로의 DNA>의 연기로는 골든라즈베리 최악의 남우조연상이란 불명예를 피해갈 수 없었으며, <인생은 아름다워>로 아카데미 역사상 외국 배우가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아름다운 기록을 세운 로베르토 베니니는 이후 <피노키오>로 골든라즈베리 수상이라는 쪽박을 안았다. <토요일 밤의 열기>와 <펄프픽션>으로 두 차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된 존 트래볼타 역시 <배틀필드>로 골든라즈베리의 부름을 받아야 했다. <몬스터볼>로 흑인 여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할리 베리는 <캣우먼>으로 연달아 라즈베리의 카펫을 밟고 나서, “엄마는 만일 네가 훌륭한 패자가 될 수 없다면 훌륭한 승자 역시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죠”라고 멋있게 소감을 밝혔지만, 그건 패자가 됐으니 하는 변명이니 됐고!

연기가 몇 시간 작정하고 넘어지면 마스터할 수 있는 롤러스케이트도 아닐진대 한 작품에선 최고의 배우로 평가받은 배우가 왜 연달아 출연한 다른 작품에선 자질이 의심스럽다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까. 클루니가 멋지게 정리한다. “<배트맨과 로빈>은 좋은 영화가 아니어서 내 연기도 형편없었지만, 몇달 뒤에 찍은 <아웃 오브 사이트>는 좋은 영화라 연기도 훌륭했다.” 그러니 ‘진짜’ 연기력은 진짜 ‘연기력’과 상관없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좋은 감독, 좋은 시나리오, 좋은 음악, 좀 무시무시하지만 심지어 영화 볼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태도까지도 배우의 연기력을 평가하는 데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 좋은 영화에 캐스팅된다는 건 연기파 배우로 인정받으며 시상식 시즌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티켓인 셈이다. 멀리 볼 것 없이 올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불럭과 스트립과 어깨를 겨루는 <교육>의 캐리 멀리건을 봐라. 생전 듣도 보도 못한 85년생 신참 배우는 작품 잘 만나 단숨에 연기파 배우가 됐다. 작품 잘 고르란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이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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