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실패의 역사를 딛고 다시 일어서
2011-06-23
글 : 신두영
<소중한 날의 꿈> <마당을 나온 암탉> 등 장편애니메이션 개봉 잇따라

10년을 기다렸다. 안재훈 감독의 <소중한 날의 꿈>이 마침내 6월23일 개봉한다. 이 장편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제작기간 7년이 걸린 명필름의 <마당을 나온 암탉>도 개봉을 앞두고 있다. 한동안 한국영화계에서 사라졌던 극장용 애니메이션이 돌아오고 있다. 올해 3월에는 <지구대표 롤링스타즈>, 6월에는 <엄마 까투리>가 개봉했고, <홍길동 2084> <돼지의 왕> <다이노맘> 등의 신작도 개봉 대기 중이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변화의 시기에 놓여 있다. 해외시장 개척을 위해 자본을 투입하는 거대 프로젝트와 TV시리즈의 성공을 발판으로 제작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들이 시동을 걸고 있는 동시에, 촉망받는 작가들의 저예산 독립 장편애니메이션 역시 기지개를 켜는 중이다. 2011년,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어떤 지점에 도달해 있는 걸까.

돌이켜보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실패의 역사다. 2002년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가 등장했을 때 관객은 열광했다. 서울 관객 5만명이라는 초라한 스코어를 기록했지만 ‘애니메이션의 칸영화제’라 불리는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기 때문이다. 대중의 열광은 오래가지 않았다. 2003년 역시 안시에서 그랑프리를 받은 성백엽 감독의 <오세암>은 14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 같은 해 개봉한 <원더풀 데이즈>는 가장 뼈아픈 기억이다. 100억원이 넘게 투입된 이 작품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구원투수처럼 받아들여졌지만 22만명이라는 흥행 참패를 기록했다. 재양과도 같은 연속 흥행 저조를 딛고 이성강 감독은 두 번째 장편 <천년여우 여우비>(2006)를 제작했지만 여전히 성과는 미미했고, 뒤이어 개봉한 <아치와 씨팍>(2006)과 <오디션>(2009) 역시 흥행 실패의 역사에 이름을 더했다. 누구도 더이상 장편애니메이션에 도전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2011년 지금,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다시 일어서기 위한 몸짓을 보여준다. 실패의 원인을 분석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았다는 의미다. <원더풀 데이즈>처럼 큰 자본을 투자하는 모험과도 같은 프로젝트는 거의 사라졌다. 더이상 제작사들은 국내 관객의 관심에만 목을 매지도 않는다. <빼꼼> <뽀롱뽀롱 뽀로로> 등 TV시리즈가 해외 진출에 성공한 사례는 이후 제작된 아동용 장편애니메이션의 롤모델이 됐다. 시행착오를 딛고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새로운 성공 모델을 찾아나서고 있다.

더이상 국내에만 목매지 않는다 ‘글로벌화’

가장 주목할 만한 변화는 많은 자본이 투자되는 상업용 장편애니메이션의 글로벌화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은 “글로벌 시장 진출 기회를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글로벌 애니메이션 프로젝트발굴 본편 제작지원’을 시행해왔다. <마당을 나온 암탉>과 (주)토이온의 <다이노맘> 등이 이 글로벌 프로젝트의 지원을 받았다. 전체 20억원 규모의 지원제도를 통해 두 작품은 각각 7억원과 5억원의 지원금을 확보했다. 제작 마무리 단계인 <다이노맘>은 현재 북미 1500개관에서 개봉을 추진 중이다. <마당의 나온 암탉>은 중국 영화배급사 대지와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1천개관에서 개봉할 예정이다. <마당을 나온 암탉>을 제작한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는 “한국 개봉에 맞춰서 중국에서 <마당을 나온 암탉>이 개봉한다. 장편애니메이션이 해외에서 동시 개봉하는 경우는 처음”이라고 말했다.

TV시리즈 <뽀롱뽀롱 뽀로로>의 극장판 <뽀로로와 신나는 아이스레이싱>을 제작하는 오콘의 김일호 대표 역시 해외시장에 집중하고 있다. “<뽀로로와 신나는 아이스레이싱>은 중국 정부가 투자를 했고 한·중 동시 개봉한다. 극장판이 몇개국에서 상영을 할지는 모르지만 TV쪽이든 홈비디오쪽이든 글로벌한 프로젝트로 만들 예정이다.” 3D 전문기업 레드로버가 제작하는 <넛잡> 프로젝트는 현재 한국 장편애니메이션 가운데 가장 큰 프로젝트다. 순제작비만 230억원 가까이 투입됐다. 2013년 개봉예정인 4D애니메이션인 <넛잡>은 한국, 미국, 캐나다의 제작진이 참여하고 할리우드 메이저 배급사와 배급 협의 중이다. 레드로버 하회진 대표는 해외시장을 공략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레드로버는 3D 기술에 근간한 회사다. 3D기술에 적합한 콘텐츠가 애니메이션이라고 봤다. <넛잡>의 기획 단계에서 사업성 검토 보고서를 받아봤는데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경우 전체의 80% 이상이 수익을 냈다. 반면 국내에서는 이런 성과를 찾아보기 쉽지 않았는데 이는 국내시장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TV시리즈의 성공 극장판으로 이어져

글로벌 프로젝트와 연관해서 주목할 만한 흐름은 TV시리즈의 인기가 극장판으로 이어지는 경향이다.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의 채송실 CP는 “최근 TV시리즈를 바탕으로 한 <지구대표 롤링스타즈> 등의 작품이 나왔다”면서 “TV시리즈를 통해서 관객에게 익숙해진 작품은 주목성이 있다. 아직 국내에 성공 모델이 없지만 이런 흐름이라면 <짱구는 못말려> 극장판 시리즈나 <포켓몬스터> 극장판 시리즈 같은 작품도 나오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했다. 실제로 한·중 공동제작으로 진행 중인 빅스크리에이티브의 <뛰뛰빵빵 구조대>와 <뽀로로와 신나는 아이스레이싱> 등은 TV시리즈가 극장판으로 이어지는 대표적인 사례다. <뛰뛰방빵 구조대>는 2011년 4월까지 총 26부작으로 KBS에서 방영된 작품이고 <뽀롱뽀롱 뽀로로>는 대표적인 성공 사례로 꼽히는 아동용 애니메이션이다.

대규모의 글로벌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지만 장편애니메이션에 대한 영화계의 전반적인 인식이 완전히 회복됐다고 보기는 어렵다. 워더스필름의 최재원 대표는 “장편애니메이션의 제작환경 자체가 크게 나아진 건 없다”고 말한다. 최 대표는 “컴퓨터그래픽 기반의 CGI애니메이션이 보편화되면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접근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보다 제작비가 더 드는데 가장 큰 문제는 신뢰할 만한 스탭을 꾸리는 것”이라면서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이성강 감독의 <마리 이야기> 등을 제작했고 현재 장편애니메이션 기획을 준비 중인 씨즈엔터테인먼트 조성원 대표의 견해도 이와 비슷하다. “과거에 비해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지만 외적이나 내적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있는 환경은 나아졌다고 본다. 내적으로는 과거에 비해 애니메이션에 종사하는 인력들이 기획이나 비즈니스쪽으로 전문화된 것 같고, 외적으로는 해외시장 개척 등에서 예전보다 상황이 나아졌다. 하지만 과거에 비해 확연히 좋다고 보기는 힘들다.” 명필름의 심재명 대표도 <마당을 나온 암탉>의 제작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말한다. <마당을 나온 암탉> 제작에 30억원가량이 소요됐는데 무엇보다 투자 유치가 어려웠다. 한국영화계의 메이저 투자배급사도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이 성공한 전례가 없어서, 투자를 꺼리는 시선이 있었다.”

저예산 독립 장편애니메이션 기지개

글로벌 프로젝트가 활성화됐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투자와 제작이 활발하지 않은 까닭은 역시 성공 사례가 드물기 때문이다. <마리 이야기> <천년 여우 여우비>의 이성강 감독은 ‘성공 사례’가 필수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말한다.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에서도 대대적인 흥행 성공의 사례가 생긴다면 고무적인 일일 것이다. 대신 장편애니메이션이 ‘장사가 되느냐 아니냐’만을 놓고 제작하면 성공 확률은 낮다. 어느 날 갑자기 성공하는 경우가 나와도 걱정인데 그 사례만 쫓으면서 비슷한 애니메이션만 기획하지 않을까 싶다.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부흥시켜보자는 생각으로 돈이 안될 것 같으면 저예산으로 만들고 그 가운데서 작품성, 사업성이 좋은 걸 기대해보자는 식의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영화아카데미 학생들의 장편애니메이션 프로젝트로 제작된 <집>(2010)에 지도교수로 참여했던 이성강 감독은 “그런 면에서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한편, 독립 장편애니메이션은 새로운 도약기를 맞고 있다. 디지털의 힘 덕분이다. “애니메이션 제작을 위한 소프트웨어의 가격은 많이 내려가고 있다. 컴퓨터 안에 스튜디오를 차리는 셈이다.”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오래 일했고 현재는 디지털시네마서울영화제의 프로그래머인 김준양 프로그래머의 설명이다. 기술적으로만 놓고 보면 연상호 감독의 중편 <지옥: 두개의 삶>(2006)처럼 1인 제작도 가능하다는 말이다. 김준양 프로그래머는 연상호 감독과 함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를 기획하고 있는 장형윤 감독의 예를 들며 독립 장편애니메이션의 가능성을 설명한다. “두 감독은 중편의 제작 경험도 있고 작품 활동을 10년 넘게 이어왔기 때문에 인적, 기술적 네트워크가 충분하다.” 연상호 감독의 사례가 독립 장편애니메이션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KT&G 상상마당에서 지원한 약 1억원의 작은 예산과 1년여의 짧은 기간에 장편 <돼지의 왕>을 만들어낸 사실은, 그간 장편애니메이션은 많은 자본과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파괴한 경우다. 연상호 감독은 “작은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중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2011년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은 어두운 실패의 역사를 딛고 일어서는 중이다. 글로벌 시장을 노리는 상업용 장편애니메이션과 디지털로 무장한 독립 장편애니메이션은 어쩌면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이 한번도 맛보지 못한 가능성을 쟁취할지도 모른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올해 개봉하는 애니메이션(<소중한 날의 꿈> <마당을 나온 암탉> <돼지의 왕> <아웃백>)의 최종 성적이 나오고 나면 비로소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본격적인 재기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희망은 굳건하다. 지난 학기의 성적표는 낙제에 가까웠지만 이번에는 모두가 단단히 예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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