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영국 단편 동화를 우리 손으로
2011-06-23
글 : 신두영
사진 : 최성열
이명하 감독의 < the Moon >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순수한 토종 창작 스토리였다. 외국의 문학이나 동화를 각색해서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물론, 이야기만 좋다면야 외국의 고전과 동화로부터 이야기를 빌려오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the Moon>의 이명하 감독 역시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the Moon>은 영국의 아동문학가 엘리너 파전의 동화집 <작은 책방>에 수록된 단편 <달을 갖고 싶어 하는 공주님>을 원작으로 끌어온 한국 애니메이션이다. 지난 50여년 동안 전세계적으로 번역 출간된 <작은 책방>은 카네기상, 안데르센상과 루이스 캐럴 문학상 등 세계적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집이다. 진정한 과제는 여기서부터다. 다분히 영국적인, 혹은 서구적인 동화를 어떤 방식을 통해 한국 애니메이션으로 만들 수 있을까. 이럴 경우의 위험성은 어슐러 K. 르귄의 원작을 끌어왔다 주저앉아버린 지브리의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이 잘 보여준 바 있지 않던가.

다채로운 캐릭터로 승부수

보름달이 뜬 어느 날 말괄량이 앤 공주가 사라진다. 달을 갖고 싶다던 공주는 어디로 갔을까. 공주가 사라진 사실을 알아차린 성 안은 발칵 뒤집어진다. 유모의 어설픈 추측성 발언이 빌미가 되어 왕은 공주가 이웃나라에 납치됐다고 단정한다. 이에 실버장군은 즉각 전쟁 준비에 돌입한다. 실종된 공주를 찾으려는 이성적인 판단은 없다. <the Moon>은 사소한 편견과 오해가 만들어낸 해프닝으로 가득한 가족용 판타지 애니메이션이다. <the Moon>의 프로듀서 역할을 맡고 있는 조윤형 studio UC 대표는 “확대 해석한 것일 수도 있다”면서 “파전의 원작이 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대한 우화적인 면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가 굳이 한국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할 이유는? 조윤형 대표는 “소통의 부재를 우화적으로 드러낸 원작의 주제가 현재의 한국 사회에도 잘 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조윤형 대표는 이명하 감독의 단편애니메이션 <존재>(2000)를 눈여겨봤다. “<존재>에는 알게 모르게 메시지가 있으면서 풍자적인 면이 있다. 이 부분이 <the Moon>의 원작과 닮았다.” <존재>는 2000년 히로시마애니페스티벌에서 신인감독상을, 서울독립단편영화제 애니메이션부문 대상을 받은 작품이다. 2005년에 이명하 감독이 만든 <스페이스 파라다이스>는 동아LG애니메이션페스티벌 대상을 수상했다. 촉망받는 단편애니메이션 감독이었던 이명하 감독은 처음에는 <the Moon>의 아트워크 작업에 참여했다. 30분 정도의 애니메이션으로 기획했던 <the Moon>이 장편 프로젝트로 커지면서 감독직을 맡게 됐다. 이명하 감독은 “<the Moon>의 원작이 선악 대립구조로 진행되지 않아서 좋았다”고 말한다. “기승전결의 구조보다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사건이 커진다. 일종의 나비효과 같은 구조가 재미있었고 캐릭터나 등장인물도 다양했다.” 이명하 감독은 짧은 단편 동화를 장편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하기 위해서 관객의 감정이입에 신경썼다. “원작 단편은 딱히 내세울 만한 주인공이 없다. 새로운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장편애니메이션으로 각색하면서 중심을 잡고 사건을 끌고 가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일단은 공주가 그 역할을 하게 된다.”

<the Moon>이 장편애니메이션으로 내세우는 강점은 다채로운 캐릭터다. 하얀나라, 검은나라, 회색나라 등 주인공 공주나라의 주변 나라들을 다양한 비주얼로 만들어 보는 즐거움을 주려 했다. 예를 들면 하얀나라의 성은 고드름을 형상화해서 디자인했고, 회색나라는 공장 굴뚝을 모티브로 삼아서 만들었다. 원작 동화에 등장하는 자연현상을 단순히 그대로 차용하지 않고 해, 달, 밤, 낮 같은 캐릭터로 만들었다. 그외에도 제작진은 변장이 주무기인 탐정단 등 영화의 주요 타깃층인 가족 관객을 위한 다양한 캐릭터를 보여줄 생각이다.

프리 프로덕션 마친 상태에서 대기중

<the Moon>의 프로듀서 조윤형 대표는 일본에서 ‘UNION CHO’라는 스튜디오도 운영하고 있다. ‘UNION CHO’는 8년 정도 일본 TV애니메이션에 그림을 납품한 탄탄한 하청업체지만 애초 1998년 조윤형 대표가 일본에 유학을 떠난 이유는 “애니메이션 연출을 하고 싶어서”였다. 하청 일을 하면서도 창작 애니메이션의 꿈을 버리지 않았기에 시작할 수 있었던 장편애니메이션이 바로 <the Moon>이다. 2010년 조윤형 대표의 의지와 이명하 감독의 성실성을 바탕으로 <the Moon>의 시나리오를 완성하고 캐릭터 디자인을 마쳤다. 프리 프로덕션이 완성됐다는 말이다. 그러나 <the Moon>은 아직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유는 투자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초의 계획대로라면 올해 4월쯤이나 늦어도 가을에는 개봉하려고 했지만 투자가 끊기는 바람에 본격적인 제작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대로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조윤형 대표는 “스탭들을 다 꾸리고 넓은 스튜디오도 마련했지만 투자가 이뤄지지 않자 스탭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고 말한다. 이명하 감독은 아이패드나 아이폰용 인터렉티브 동화책을 만드는 일을 하며 <the Moon> 프로젝트가 다시 가동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조윤형 대표는 여러 루트를 통해 투자를 받으려고 고군분투 중이다. 투자 의향을 밝힌 곳도 있지만 아직 확정되지는 않았다. “한국에서 메인 투자가 이뤄진다면 투자하겠다”는 일본의 코믹스웨이브 같은 회사도 있다. 코믹스웨이브는 <초속 5센티미터>의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작품을 제작한 곳이다.

<the Moon>은 엘리너 파전의 유족들과 무려 1년 반에 걸쳐 판권 계약을 완료했다. 계약금만 걸어놓은 상태인데 나머지 잔금을 올해 안에 지급해야 한단다. 조윤형 대표는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이 운명적인 것 같다”고 말한다. “엘리너 파전의 단편 동화가 과연 애니메이션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지 그건 그 작품의 운명이다.” <the Moon>은 아직 변수가 남아 있지만 만약 제작을 시작한다면 1년 정도의 기간에 제작을 완료할 수 있다. <the Moon> 앞에 과연 어떤 운명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영향 받은 작품?

유리 노르슈테인 감독이 스승

이명하 감독.

이명하 감독은 러시아 작가주의 애니메이션 거장 유리 노르슈테인 감독에게서 늘 영감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 <존재>를 할 때부터 유리 노르슈테인 감독의 작품을 봤었다. 지금도 노르슈테인 감독의 작업을 보면서 예술적인 영감을 받는 것 같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분 역시 단편 독립애니메이션쪽으로 세계적으로 알려져 있고 팬도 많은데 일본에서 후원금을 모아서 전달할 정도로 제작 여건이 좋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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