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의 왕>은 아마도 ‘19금 딱지’를 달고 극장에 걸릴 것 같다.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으레 있어야 할 꿈과 희망은 <돼지의 왕>에 없다. 대신 1990년대 초반의 중학생이 겪는 잔혹한 폭력과 지옥 같은 현실이 존재한다. 전작 <지옥: 두개의 삶>에 이어 연상호 감독이 창조해낸 세계는 오로지 어른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 아동용, 가족용 애니메이션만이 흥행한다는 오래된 관념을 깨기 위해 <돼지의 왕>은 스스로 ‘애니메이션적’이라는 기준에 반하는 전략을 세웠다. 연상호 감독도 “<돼지의 왕>이 개봉하면 왜 이걸 굳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냐는 질문을 많이 받을 것 같다”고 말할 정도다. <돼지의 왕>은 애니메이션의 옷을 입고 실사영화처럼 행동한다.
아내를 살해한 실패한 사업가 경민이 15년 넘게 연락을 하지 않던 어린 시절의 친구 종석을 찾으면서 <돼지의 왕>은 시작한다. 경민이 인생에 실패했듯이 작가를 꿈꾸는 종석 역시 비루한 삶을 사는 인물이다. 변변치 못한 대필 작가로 근근이 먹고산다. 둘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이 ‘돼지’였던 중학생 시절을 회상한다.
‘아동용·가족용’ 흥행공식에 반기
빈부격차로 인해 발생한 교실 내 계급 구도에서 종석과 경민은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공급하기 위한 살을 찌우는 ‘돼지’였다. 그들을 지배하는 권력은 개로 묘사된다. 돼지들은 개에게 철저하게 짓밟힌다. 이때 돼지들의 왕이 등장하는데 바로 철이라는 인물이다. 종석과 경민은 철이에게 자연스럽게 의지한다. 경민과 종석의 대화를 통해 <돼지의 왕>은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이 회상의 막바지에는 엄청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돼지의 왕>의 시작은 200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상호 감독이 군대에 있을 때 간략한 시놉시스를 썼고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을 그린 만화가 최규석 작가와 의기투합하면서 본격적인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최규석 작가는 <돼지의 왕>의 초기 캐릭터 디자인 역시 담당했다.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연상호 감독의 말에 따르면 “철이의 경우는 최규석 작가가 디자인한 그대로 <돼지의 왕>에 등장한다.” 연상호 감독은 2006년 <지옥: 두개의 삶>이라는 중편애니메이션이 끝나면 바로 <돼지의 왕>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편애니메이션 제작은 쉽지 않았다. 묵혀두고 있던 <돼지의 왕> 시나리오가 빛을 보게 된 건 김종관 감독의 <조금만 더 가까이> 등을 지원한 KT&G 상상마당의 ‘2010 상상메이킹 장편프로젝트’ 투자지원을 받아내면서부터다. 서울독립영화제의 조영각 집행위원장은 제작 전반을 관장하는 프로듀서로 ‘돼지의왕 제작위원회’에 참여했다. 제작에 조영각 집행위원장이 있다면 <돼지의 왕>의 목소리 출연진은 또 다른 면모를 보인다. 연상호 감독의 전작 <사랑은 단백질>에도 목소리 출연한 양익준, 오정세가 각각 어른 종석과 경민을 연기한다. 한국 독립영화를 대표하는 배우들인 김꽃비, 박희본, 김혜나도 어린 종석, 어린 경민, 철이의 목소리를 맡았다.
완벽한 프리 프로덕션으로 시간·예산 최소화
연상호 감독은 단돈 1억여원으로 1년 남짓한 기간 동안 <돼지의 왕>을 만들었다. “1억원이라는 예산 안에서 영화를 끝내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연상호 감독은 “애니메이션 투자자들이 ‘장편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7∼8년 걸린다’는 생각이 안 들게 ‘지금 투자하면 내년에 작품이 나온다’는 목표로 작은 예산이긴 하지만 진행했다”고 말한다. 이렇게 짧은 시간과 예산으로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완벽한 프리 프로덕션 과정에서 비롯됐다. 시나리오를 수정하거나 연출을 뒤엎는 상황이 없었다. 그러니 제작기간이 늘어날 일도 없다. 적은 제작비는 더미 애니메이션이라는 기법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더미 애니메이션 기법은 3D로 미리 모델링을 한 러프한 애니메이팅을 참고하면서 애니메이터가 작화를 하는 방식이다.
연상호 감독이 <돼지의 왕>에서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반전이 예고된 마지막 엔딩 10분이다. 15년 동안 말하지 못한 어떤 진실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이 마지막 10분을 위해 제작비의 3분의 1을 쏟아부었다. “정말 열심히 만들었다. 도시가 무너진다거나 하는 스펙터클한 액션이 있는 건 아니고 두 인물의 대화장면인데 각 인물의 호흡까지 다 그리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그림 매수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4년간 홀로 40분짜리 중편 <지옥: 두개의 삶>을 만든 악바리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최종 마무리 단계에 있다. 가편집은 이미 끝났고 최종 랜더링 작업, 사운드와 음악의 일부 수정만이 남아 있다. 개봉 시기는 10월 말 정도. “애니메이션스럽지 않은 애니메이션”이라는 연상호 감독의 <돼지의 왕>은 국내 애니메이션계에 본격 성인애니메이션의 상륙을 예고하고 있다.
영향 받은 작품?
<미스틱 리버> 속 복잡한 코드
<돼지의 왕>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미스틱 리버>(2003)에서 영향을 받았다. “<미스틱 리버>를 보면 팀 로빈스, 숀 펜, 케빈 베이컨의 어린 시절에 어떤 사건이 있고, 성인이 된 이후에 뻔한 장르물 같은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세 친구들간의 복잡한 코드들이 나온다. 이런 접근법이 <돼지의 왕>과 닮았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영화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좋아한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를 보면 시나리오가 짜여진 설계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시나리오를 쓸 때 참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