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괴물 대 로봇, 태평양에서 맞짱
2013-05-14
글 : 이후경 (영화평론가)

<퍼시픽 림> Pacific Rim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 / 출연 찰리 헌냄, 이드리스 엘바, 기쿠치 린코, 론 펄먼, 찰리 데이 / 수입, 배급 워너브러더스코리아(주) / 개봉 7월11일

외계 괴물과 거대 로봇 중 누구의 주먹이 더 셀까?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2025년, 거대한 태평양을 링 삼아 어느 쪽도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초반 탐색전에서는 일본 인근 심해저에 뚫린 ‘포털’을 통해 기습적으로 출몰한 ‘카이주’(怪獸)쪽이 다소 유리해 보인다. 등장하자마자 오사카쯤은 단숨에 뭉개버릴 위력이다. 그런 카이주들의 릴레이 플레이를 견뎌내기에는, 신개념 조종 로봇 ‘예거’(Jaeger)들로 무장한 범태평양연합방어군도 역부족일 듯하다. 하지만 개인적 아픔을 딛고 일어선 신참 랠리 안트로버스(찰리 헌냄)가 마코 모리(기쿠치 린코), 스탁커 펜테코스트(이드리스 엘바)와 함께 꺼져가던 희망의 불씨를 되살린다. 버려졌던 예거들과 다시 한몸이 된 그들은, 펜테코스트의 선언처럼 “오늘로 종말론도 종 치게 할” 기세로 덤빈다.

델 토로의 감식안 지수 – 맑음

지금 할리우드의 중간계를 누비고 있는 감독 중 기예르모 델 토로는 드물게 ‘어두운’ 작가다. 그의 필모그래피가 증명하듯 그의 상상력은 숲속에 버려진 깊은 우물에서 길어올린 듯 음습하고 기괴하다. 심지어 그 아래 신화, 역사, 정치를 교묘히 그물 치는 능력도 겸비한 그다. 그러니 그가 H. P. 러브크래프트의 <광기의 산맥>을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이틀 만에 <퍼시픽 림>을 집어들었을 때 팬들 마음이 괜히 설렜던 게 아니다. 그가 어릴 적부터 섭취해온 크툴루 신화(러브크래프트의 호러 소설들을 중심으로 발전한 신화로 일본 카이주 문화의 토대를 이룬다)를 어떻게 되새김질할지 기대된다. 그렇다고 특정 장르에 막무가내로 오마주를 바치는 영화는 아니다. “모두에게 어떤 카이주 영화나 로봇 시리즈도 참조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는 그는 그저 “그런 것들을 미친 듯이 사랑하다 보니 만들게 된 전혀 새로운 것을 원했다”고 한다.

로봇 감수성 지수 – 맑음

예거에 비하면 아이언맨은 초딩 미니어처 수준이다. “북미에서 가장 큰 스튜디오에도 발만 겨우 끼워넣을 수 있을 정도”라 부위별로 나눠서 지어야 했다는 예거는 미식축구 경기장 20개만 한 몸집에 25층 빌딩만 한 키를 자랑한다. 그런 예거를 CG로 대충 떼우는 법 없이 실사 제작해 6대나 가동시켰다. 예거가 흔한 로봇과 달리 2명의 조종사가 동작을 정확히 일치시켜야 작동하는 ‘맨 인 슈트’라는 점도 중요한 영화적 장치다. 두 남녀가 예거를 되살리기 위해 ‘하나’가 되는 순간, 로봇과 서사도 ‘합체’한다. 그만큼 예거의 물리적 존재감과 영화의 정서적 강도는 비례 관계다. “관객이 인간 캐릭터들만큼이나 기계들에도 감정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는 것이 델 토로의 설명이다.

3D 완성도 지수 – 비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한데 녹여내는 기술에 관한 한 델 토로는 할리우드 최고의 연금술사 중 하나다. 폭풍 CG가 필수인 <퍼시픽 림>의 시각적 리얼리티에 관해서도 그의 원칙은 분명했다. “더 지저분할수록, 더 사실적이다.” 비싼 렌즈 표면에 상처를 내는 소소한 테크닉은 기본이고, 카이주가 일본과 홍콩 도심을 공격하는 장면을 위해서는 실제 규모의 세트를 제작해 물리적으로 흔드는 메가톤급 수고까지 들였다. “빌어먹을 모션 캡처”를 극도로 싫어하는 그는 예거에도 현존하는 로봇 조종 기술을 사용했다. <스타워즈>의 존 놀, <아이언맨>의 셰인 메이한 같은 장인들도 그를 도왔다. 그렇게 공들여 완성한 스케일이기에 3D 변환 작업이 그에게 마뜩지 않았을 건 자명한 일. 40주의 시간을 허락받고서야 워너와 타협한 그는 3D 버전의 완성도에 제법 만족스러운 수준이라고 여러 번 밝혔지만, 3D 주먹 맛은 직접 맞아봐야 알겠다.

<트랜스포머> 넘을까 지수 – 맑음

“(<퍼시픽 림>은) 번쩍번쩍하고 멋진 자동차 광고 속에서 싸우는 영화가 아니다.” <트랜스포머> 유사품들이 생겨나고 있다고 빈정거렸던 마이클 베이에 대한 델 토로의 날카로운 반론이다. 베이의 세계가 값비싼 ‘키덜트’적 상상력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델 토로의 세계는 그 자체로 이미 방대하고도 심오한 일본 대중문화의 다양한 하위 장르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전체적인 채도도 델 토로쪽이 훨씬 어둡다. 베이의 로봇들이 알록달록하게 염색시킨 애완동물 같다면, 델 토로의 예거들은 “애니메이션 <헤비 메탈>의 부식된 버전 같은 채도”의 맹수에 가깝다.

속편 순항 지수 - 흐림

첫 결과물이 만족스러웠던 모양인지, 레전대리 픽처스는 벌써 속편 제작에 시동을 걸었다. 1편 각본을 썼던 트래비스 베컴이 다시 펜을 잡고, 델 토로도 1편 홍보를 마치는 대로 기초공사에 가담한다. 하지만 델 토로가 메가폰까지 잡을지는 아직 미지수다. 워커홀릭으로 유명한 그의 스케줄은 이미 다른 프로젝트들로 꽉 차 있기 때문. 내년 초까지 척 호건과 함께 쓴 뱀파이어 소설 원작의 TV영화 <스트레인>을 완성한 뒤, 빅토리아 시대로 돌아간 유령영화 <크림슨 피크>를 촬영하고, <인크레더블 헐크>와 만화 <몬스터>의 TV시리즈 개발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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