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들 자기 자리에서 애를 쓴다. 뭔가 잘 풀리지 않아서들 그럴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 상우(이민우)는 오랜만에 학교에 나타난 후배 선희(정유미)에게 최교수(김상중)의 행방을 두고 금방 탄로날 거짓말을 한다. 상우도 선희를 둘러싼 그 ‘우리’의 ‘잠재적’ 일원으로 짐작되지만(문수(이선균)와 선희가 이층 호프집에서 만나고 있을 때 카메라는 문득 인서트 숏으로 횡단보도를 건너오는 상우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작심하고 그런 거짓말을 한 건 아닐 것이다. 잠시 뒤 “선배, 왜 거짓말하고 다녀요?” 하며 길길이 화를 내는 선희에게 상우는 농담한 거라고 얼버무리려 하는데, 사실 그 자신도 그 순간 왜 그런 거짓말이 입 밖으로 빠져나왔는지 잘 모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두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실랑이에는 왠지 어떤 해소되지 않는 감정의 잔여가 있는 것 같다. ‘농담’은커녕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아등바등하고 있는데, 우습다기보다는 안쓰럽다. 아슬아슬하고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이 느낌은 이제 선희를 가운데 두고 ‘우리’의 본격적인 일원들인 세 남자가 원무를 추듯 맴돌며 말, 생각, 정념 그리고 시간을 반복하고 겹치고 잇고 나누는 영화의 내내 인물들을 따라다닌다. 선희가 호프집 종업원에게 화를 내는 장면이나 재학(정재영)이 자신을 찾아온 문수에게 노골적인 짜증을 내보인 뒤(“형, 뭐 해요?” / “…뭐해.”) 혼자 방 안을 서성이는 장면에서 홍상수의 카메라는 통상의 내러티브적 필요보다 좀더 길게 머문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홍상수의 첫 번째(?) 가을영화 <우리 선희>의 전반적 정조가 어둡거나 우울한 것은 아니다. 짜증과 힘겨움이 인물들의 어쩌지 못하는 중력이 되고 있는데도, 화면에는 어떤 생성의 기운이 간지럼을 태우듯 뿌려져 있고 영화는 가을의 볕과 무심히 감응하며 통통 약동하는 리듬으로 출렁인다. 외국으로 출장 가셨을 거라는 상우의 말 다음에 우리는 바로 근처 벤치에 앉아 있는 최 교수의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는 하늘을 힐끗 올려다보더니 이내 가을볕이 좀더 잘 드는 바로 옆 벤치로 옮겨 앉는다. 그 모습이 아이처럼 귀엽다. 딱 그만큼 <우리 선희>는 가을의 볕과 공기, 풍광 속에 있다. 그러나 최 교수도 그러하지만 영화의 인물들이 그 가을볕의 선물과 위안을 제대로 누리는 것 같지는 않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 때까지 끝까지 부딪쳐보고, 끝까지 파보는 게 중요하다’는 최 교수의 말은 선희와 문수, 재학을 돌고 돌아 다시 최 교수에게 돌아오지만(“그거 내가 전에 말했잖아?” ), 이 흉내와 반복의 시간과 의미를 정작 그들 자신은 모르고 지나쳐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그들이 어떤 말을 흉내내며 자신의 말인 것처럼 반복할 때, 그들은 세상 안에 있다. 가령 그때 재학은 ‘파고 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그 너저분하고 쓸쓸한 방에서 가을의 세상 속으로 걸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 가을날 저녁 짜증나는 후배이자 사랑의 경쟁자 문수와 마시는 술집 ‘아리랑’의 술자리. 이때 그들은 선희를 가운데 둔 ‘우리’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 비스듬히 옆에 앉은 술집 주인 예지원의 존재, 선물처럼 도착하는 치킨, 사라진 꿈의 자리에서 거듭 돌아오는 흥겹고 구슬픈 노래, 그리고 쌓여가는 소주병. 그들은 지금 부딪치고 있다. 손짓까지 하며 “파고, 파고, 가고, 가고” 하는 문수는 바로 그 순간 선희에 대한 사랑을 ‘파고’ 있으며 어딘가로 ‘가고’ 있지 않은가. 취해서이겠지만 두 사람은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노래는 영화 밖에 있는 것 같다. 그게 슬프다.
그리고 창경궁의 단풍과 연못, 가을볕이 이루는 말할 수 없이 환한 풍광 속에 모인 ‘우리 선희들’. 선희가 몰래 먼저 창경궁을 빠져나간 뒤, 고궁의 문을 넘어오는 세 남자의 모습. 풀숏으로 세 남자의 전신이 나타날 때 나는 그 아름다움에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들은 모른다. 이럴 수밖에 없는 걸까. 세 남자는 수백년의 시간이 흘러와 쌓여 있는 명정전쪽으로 뻘쭘히 다가간다. 그리고 나란히, 어정쩡하게 떨어져 서 있는 그들은 명정전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영화는 세 남자의 뒷모습을 멀리서 보여주면서(약간 부감인 듯한 이 시선은 누구의 것일까) 끝난다. 그들은 그 어두컴컴한 ‘전’에서 무엇을 보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