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우리’가 그린 그녀는 어디로
2013-09-17
글 : 김혜리
4인 4색 김혜리 기자의 <우리 선희>

‘우리 엄마’, ‘우리 형’의 ‘우리’는 자명한 관계를 담백하게 지시한다. 그러나 ‘우리 선희’처럼 특정한 사람의 이름 앞에 붙은 이 1인칭 대명사는 듣는 이에게 선희가 자기와 친밀한 관계임을 티내려는 의도를 품고 있다. 즉, “나랑 선희는 ‘우리’야”라는 은근한 선언이다. 유의할 점은 경우에 따라 ‘우리’ 안에 듣는 사람이 포함되기도 하고 배제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선희>에서 선희(정유미)가 나흘 동안 돌아가며 만나는 최 교수(김상중), 문수(이선균), 재학(정재영)은 내심 선희를 ‘우리 선희’(나의 선희)라고 생각한다. 선희가 없는 자리에서 문수와 재학, 최 교수와 재학, 문수와 재학과 최 교수 셋은 돌아가며 만나는데, 남자들끼리의 회동을 끌어낸 자력은 선희의 존재다. 전 남자친구였던 문수는 선희와 재회한 여운을 털어놓으러 선배 재학을 찾아오고 최 교수는 상대를 밝히지 않은 채 선희가 일으킨 마음의 파문을 나누고 싶어 후배 재학을 만난다. 둘의 이야기를 다 듣는 재학은 셋 중 제일 비밀스런 태도를 취하는데 이어진 선희와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의뭉스런 자신감을 품게 된다. 세 남자는 만나면 넌지시 전 여자친구/후배/학생인 선희에 관한 해석을 내놓고 서로가 가진 선희의 상(像)을 종합해 “우리 선희는 이런 여자”라는 결론을 내리고 안심한다. 이때 ‘우리 선희’의 ‘우리’는 듣는 이(다른 두 남자)를 포함하는 경우다. 이 장면들은 매우 경쟁적이면서도 일단 같은 편에 속하면 쉽게 협조하는 사내아이들의 놀이 광경 같아 재미있다. 한편 공유한 안도감 뒤에서 세 남자가 각자 간직하는 우월감( ‘나의 선희’라는 뜻의 ‘우리 선희’ )은 그들이 말과 글로 규정한 그녀의 정체- 머리가 좋고 착하고 내성적이고 안목이 있고 똑똑하고 솔직한 사람- 에 포함되지 않은 잉여분의 감흥에서 나온다. 술김의 입맞춤이나 맞잡은 손의 촉감, 미련을 암시하는 듯했던 흥분된 표정 등의 감각적 기억이 그 단서들이다. 결국 세 남자에게 입력된 ‘우리 선희’의 ‘우리’는 ‘가두는 곳’이란 동음이의어와도 뜻이 통한다. 하지만 선희는 그들의 ‘우리’에 무관심하다.

홍상수의 관객은 비슷한 동상이몽의 춤을 <오! 수정>에서도 본 적 있다. 영화에서 선희의 의식적 목표는 최 교수로부터 유학 추천서를 받는 일 하나뿐이다. 재학, 문수와의 만남은 우연이고 그녀는 본인 말대로 지금 남자를 사귈 생각이 없다. 따라서 <우리 선희>는 진심으로 좋아하느냐 이른바 “갖고 노느냐”의 정색한 질문과는 먼 이야기다. 그보다 여자와 남자가 시시덕거리는(flirting) 방식의 차이를 귀엽게 드러내는 일화다. 성차를 절대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 영화에서 선희와 그녀를 둘러싼 세 남자의 행태는 인류학자 헬렌 피셔가 묘사한 거미집식 사고와 계단식 사고의 맞춤한 예증처럼 보인다. 선희는 동시에 많은 정보와 변수를 저울질하고 선택 가능한 카드와 그것을 처리할 방식을 두루 살핀다. 반면 문수와 재학, 최 교수는 그들이 보고 싶은 현상에 집중하고 거기에 맞지 않는 자료는 편집하며 심중의 개념을 고수한다. 그녀의 시야는 넓고 그 남자들의 시야는 외곬으로 깊다. 세 남자는 애인의 형상을 분해해 본인의 관점대로 조립한 피카소처럼 각기 초상을 그리지만 거기 갇혀 괴로워한 피카소의 연인과 달리 선희는 개의치 않는다.

<우리 선희>는 상대가 떠난 뒤 남겨진 인물(들)의 모습을 여러 차례 뜸들이며 바라본다. (헤어진 다음 멍 때리지 않고 곧장 또박또박 갈 길 가는 인물은 선희뿐이다.) 방금까지 취기와 스킨십 속에 확실히 손에 잡히던 ‘우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내가 또 바보짓을?”이라는 희미한 불안이 그 자리에 차오른다. <우리 선희>는 관계가 남기는 엷은 숙취를 보여준다. 이 영화에 네 차례 흐르는 음악은 최은진의 1집 ≪풍각쟁이 은진≫ 중 <고향>이다. 우리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로써 소유했다는 환상을 연주의 대가로 받으며 이 집 저 집 세레나데를 부르고 다니며 고향 없이 평생을 보내는지도 모른다. 사는 게 어장관리이고 풍각이다. 조금 쓸쓸하긴 해도 슬플 것까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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