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래도 이례적인 일이다. 지속적으로 활용되고 있는 홍상수의 것들 중 적어도 세 가지가 <우리 선희>에는 부재하거나 희박하다. <우리 선희>에서는 시간이 혼동되지 않고, 꿈이 등장하지 않으며, 인물의 속마음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들리지 않는다. 홍상수 영화의 대표적 면모인 시간의 중층성, 다른 계와의 접속성, 중립적 긴장감이라는 체험이 감독 자신에 의해 얼마간 배제되어 있다.
대신에 특별하게 들어선 것이 실체와 말의 좁힐 수 없는 간격이다. 선희라는 실체가 있고 선희에 대한 말들이 있는데 따지고보면 양자엔 관계가 없다. 예컨대 선희를 저마다 자기의 여인이라 여기는 세 남자는 그녀를 두고 내성적이지만 착하고 안목 있고 가끔은 또라이 같다고 말을 모은다. 하지만 선희가 그에 어울리는 행동을 보여준 적이 정말 있던가. 사실은 세 남자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말로써 한 존재가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은 수정되어야 할 모순이라기보다는 바뀌기 어려운 진리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 선희>의 라스트 신은 세 남자를 비꼬지 않은 채, 상냥하고 넉넉하고 평화롭게 품어준다.
선희라는 실체와 그녀에 관한 말들 사이의 간격이라고 표현했지만 엄연히 선희도 이 사태의 공모자다. “끝까지 한번 부딪쳐봐. 그래야 자기 한계를 아는 거지”라고 문수에게 말했던 선희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요”라고 재학에게 말한다. 무슨 말을 하느냐가 아니라 말을 할 상대로 누가 앞에 있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우리 선희>의 넘치는 각오와 충고와 조언의 말들은 정황을 따라 시시각각 바뀌며 전개되는 작용과 반작용의 정해지지 않은 반응일 뿐이다. 홍상수가 지향해온, 비고정적이고 비결정적인 세계의 상태를 체험케 하는 일환으로 보아야 더 적합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 선희>가 내게 특별한 건 시간도, 꿈도, 마음속의 소리도 없는데, 그 비결정적이고 비고정적인 상태들이 여전히 아름답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나는 이 영화가 지닌 굵기와 길이가 마음에 든다. 그리고 굵고 긴 그 안을 채우는 물질적 요소들의 술렁임이 감동적이다. 단순히 숏들이, 노래 한곡이, 유례없이 길게 사용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물질의 ‘결’과 무늬가 생생해서라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그 많던 말들이 잠시 주춤할 때 저 ‘사물’과 ‘인물’의 ‘물’의 ‘질’이 너무나 아름답다. 햇볕에 눈을 감고 앉은 최 교수의 얌전하고 행복한 눈가에서, 문수를 보기 위해 창밖으로 고개를 빼는 재학의 퉁명스러운 목선에서, 문수의 파고 또 파야 한다는 말보다는 그 손짓에서, 황망하면서도 당돌하게 사라지는 선희의 걸음에서 그 물의 질을 느낀다. 음악으로써 기이한 계의 접속을 시도하는 순간에조차도, 이번의 나는, 그 접속보다는, 말을 잃고 흐트러진 채 정지되어 있는 인물들의 포즈와 얼빠진 시선을 담는 그 숏과 노래의 정서적 굵기와 길이에 취한다. 그러고보면 <우리 선희>의 실체와 말의 격차라는 것도 그것이 그냥 세상을 이루는 리얼리티의 일부로 느껴질 뿐이다. 시간도, 꿈도, 마음의 소리의 관여도 없이, 세계의 비결정적 상태를 체험케 하는 저 소박한 물질적 리얼리티들의 왕성함이 내가 느낀 <우리 선희>의 이례성이자 특별함이다.
소박해 보이기만 한 최 교수와 재학의 카페 장면을 그래서 아낀다. 술도 마시지 않고 마음속 밑바닥을 드러내지도 않으며 그럴듯한 충고도 다짐도 하지 않는 심심하기만 한 그 대화 장면. 두 사람이 앉은 자세와 맞댄 거리 그 뒤에 약간 멋없이 그려져 있는 벽면(작은 창문이 하나 있었던가?), 그리고 조용한 주변. 그 자체로 됐다.
“끝까지 파고들어가는 건 좋은데 그건 네가 뭘 할 수 있는지 아는 게 아니고 뭘 못하는지 아는 거야.” 재학의 말처럼 <우리 선희>는 우리의 말들이 뭘 못하는지 알게 해주는 영화다. 그런데 내게 <우리 선희>는 그것보다 더 특별하다. 우리가 뭘 못하는지 알게 되는 동안 뭐가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는 체험하게 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이런 체험보다 더 귀한 체험이 얼마나 더 있는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