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선희>는 홍상수의 전작들과 비교해 말이 길고, 말이 많은 영화다. 유달리 말이 투명하게 도드라지는 세계 같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 인상은 말의 내용 때문이 아니라 움직임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이를테면 ‘끝까지 파고들어서 자신의 한계를 알아야 자기가 누군지 알게 된다’는 인상적인 말은 선희에게서 시작되어 남자들을 거쳐 선희에게로 돌아온다. 혹은 한 남자가 선희에 대해 묘사한 말은 다음 신에서 다른 남자의 입을 빌려 선희에게 이동한다. 이때 흥미로운 건 영화 속 인물들이 그 말의 움직임에 무지하거나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이고, 마치 그 말이 나에게만, 혹은 너에게만 고유한 것처럼 반응한다는 점이다. 혹은 같은 말도 그 말이 향한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공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한 인물에게만 귀속된, 즉 그 인물의 특질을 설명하는 말의 유일무이함, 나에게만 있는 무언가를 당신만이 읽어낸다는 흥분을 세 남자와 한 여자는 즐기고 있지만, 그들을 보는 우리는 말의 내용이나 출처보다 말의 움직임을 더 의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인물들의 감정보다는 그 말들의 자율적 활동에 신기하게 동화된다.
그러니 이 말을 하는 이 사람의 마음은 과연 진짜일까라는 물음이 아니라 말의 위치, 말의 자리바꿈, 아니, 말의 행로가 <우리 선희>에서는 중요하다. 그 말의 행로는 한 여자와 세 남자 사이에서 모호하게 퍼지는 관계의 내용을 영화적으로 배열하는 일종의 형식이다. 영화가 이전 숏에서 선희와 한 남자의 관계가 어떻게 진전될지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그다음 숏에서는 다른 이야기로 아무렇지도 않게 건너뛸 때, 혹은 인물들이 나중에 얘기해준다며 상대의 간절한 질문을 피해버릴 때, 신과 신, 선희와 남자들의 에피소드 사이에는 확정적인 답을 의도적으로 회피하려는 생략이 있다. 그러한 생략에도 불구하고 이 신들이 서로에 대한 이상한 거울처럼 겹치고 꿰매어진다면, 그건 분명 인물들의 육체를 빌려 살아 돌아다니며 반복을 만들어내는 말의 행로에 기인하는 것이다.
<우리 선희>에서 그 행로의 감흥을 이야기하며 함께 언급해야 하는 영화적 활동은 목소리의 움직임이다. 이 영화에서는 누가 누군가를 부르고 그 부름에 화답하는 목소리로 만남이 이루어지곤 하는데, 그때 한 프레임 안에 두 목소리의 주인공이 동시에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일례로 우리는 줄곧 인물들이 프레임 밖 어딘가로 시선을 던지며 그 밖의 어딘가에서 불쑥 밀려들어오는 목소리에 머뭇거리며 대답하는 광경을 본다. 그 두 인물의 목소리가 동시적으로 교환되고 있다는 것이 영화적 사실이지만, 밖에서 안으로 끼어드는 보이지 않는 목소리와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시선과 목소리는 다른 층위에서 종종 충돌하고 어긋나며 그 세계의 균형 잡힌 표면을 흔든다. 보이는 인물과 보이지 않는 인물, 창 안과 밖, 프레임 안과 밖이 서로에게 작용하며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거리를 좁혔다 벌리면서 미묘한 영화적 리듬을 탄생시키는 것이다.
말의 행로와 소리의 움직임이 주는 감흥에 덧붙여 이 영화에 기묘함을 더하는 노래가 흐르는 순간에 대해서도 말해야 될 것이다. 여기서 길게 논하기는 어렵지만, 그 기묘함이 <고향>이라는 근대가요의 애처로운 가사나 가수의 독특한 음색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노래가 나올 때마다 인물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호기심과 두려움이 뒤섞인 오묘한 시선으로 프레임 밖 어딘가를 쳐다본다. 대체 어디에서 들려오는 노래인가? 프레임 안과 밖, 영화 안과 밖의 경계를 일순간에 무너뜨리며 다른 시제, 다른 계를 무섭게 열어버리는 이 노래는 단지 들리는 노래가 아니라 보이는 노래, 영화 속으로 수렴되는 노래가 아니라 밖으로 펼쳐지는 노래다.
인물들의 진심, 관계의 내용을 모호하게 흩뜨리며 말과 소리의 행로를 더 소중히 따라가는 <우리 선희>에서 그 행로는 ‘선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미루는 대신, 질문의 불씨를 지속시킨다. 그러니 선희가 잠적해도, 다시 나타나 세 남자의 마음을 휘저어도, 그리고 다시 총총 사라져도 괜찮다. 그 질문이 꺼지지만 않는다면, 내가 누구인지, 당신이 누구인지 간절히 알고 싶어 하고 기억하는 우리의 소우주는 계속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