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남은 일은 저절로 일어날 겁니다, 일어날 거라면
2013-09-17
정리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홍상수 감독에게 묻고 듣다

아마도 <우리 선희>의 ‘우리’라는 뉘앙스 때문에 떠오른 시도였던 것 같다. <우리 선희>에 관한 우리의 질문들을 적어보기로 했다. 평소 홍상수 영화에 애정이 많은 이들 중 몇몇이 참여하기로 했다. 문학평론가 정홍수, 영화평론가 남다은, 영화기자 김혜리, 송경원, 이후경, 정한석이 적게는 두개에서 많게는 네댓개까지 각자의 질문을 적었고 그 질문들은 흐름을 고려하여 배치되었다. 여러 명의 질문을 받아 들고 누군가가 혼자 감독을 만나 전하는 건 좀 어색한 일 같아서, 필담으로 진행했다. 혹은 그 편이 더 흥미로울 것도 같았다. 감독에게 질문을 보낼 때에는 질문자의 이름을 지우고 보냈고 답변을 받은 다음에 질문자의 이름을 괄호 안에 넣었다. 어떤 답은 좀 길고 어떤 답은 좀 짧지만, 그래도 오래 생각하고 솔직한 마음으로 답했다고 감독은 전해왔다.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그런 것 같다.

-<옥희의 영화>에서부터는 배우와 장소와 시기만 일단 정해두고 영화의 구성적 틀은 촬영 중 일어나는 우연과 직관을 따라 잡아나가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선희>의 경우에는 그 우연과 직관의 결들이 어떤 식으로 찾아왔고 또 어떻게 가닥이 잡혀 지금의 구성에 이르게 된 것인지요.(정한석)
=배우가 정해지고 나서 첫 촬영 직전에 결정한 게 ‘추천서 받기 위해 찾아온 학생’이란 거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촬영날 전체의 구성 같은 게 정해졌습니다. 말로 누군가를 정의한다는 것, 말로 된 삶의 충고를 서로서로 나누는 행위, 그것을 쳐다보는 것.

-정유미, 그리고 이선균, 김상중, 정재영이라는 캐스팅은 촬영 시작 전 정해져 있던 중요한 골자였을 것입니다. 한 여인을 중심으로 한 세 남자라는 관계를 염두에 두고 한 캐스팅이었는지요.(정한석)
=이선균씨, 정유미씨를 정했고, 그리고 김상중씨를 정했고, 그다음에 정재영씨를 정한 거 같습니다. 이선균씨, 정유미씨가 처음 중심으로 있었는데, 김상중씨가 오게 됐고, 그러면 정재영씨가 있으면 맞겠다, 싶었습니다. 남자 셋의 힘이 비슷하게 배치되고 가운데 여자 한 사람을 생각했습니다. 각 남자 배우분들을 정하게 됐을 때 정유미씨가 할 인물과의 관계에 대한 어떤 느낌 같은 게 바로 생겼습니다. 그리고 만들 때 그 느낌대로 간 거 같습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타이틀 시퀀스의 바탕색과 음악의 조화를 통해 영화의 정조를 미리 전달받기도 하는데, 이번 영화에서는 어떤 느낌에서 가을의 여러 가지 색깔 중 은행나무의 노란색을 고르셨나요.(이후경)
=왜인지는 설명할 수 없는데 하여간 그 색이 맞다고 느꼈습니다, 그냥 예뻤습니다.

-이전까지 감독님의 영화들을 거칠게 여름의 영화와 겨울의 영화로 나눌 수 있다면 올해 갑자기 봄의 영화와 가을의 영화가 도착했습니다. <우리 선희>를 가을영화로 떠올리신 이유가 있을까요.(이후경)
=찍을 때가 가을이 거의 끝나가는 시점이었습니다. 11월 초였을 겁니다. 그런데 약간 남은 가을빛이나 조금 남은 단풍 같은 걸 영화에 꼭 담고 싶다고 약간 조바심냈던 것 같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정재영씨와 이민우씨는 감독님과 처음 작업한 배우들입니다. 이민우씨의 경우는 등장과 퇴장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이하 <해원>)의 류덕환씨만큼이나 느닷없고 유머러스하며, 정재영씨는 감독님의 세계에 원래 속해 있던 사람처럼 자연스러우면서도 기존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자신의 어떤 면을 끄집어냈다는 인상을 줍니다. 두 배우들에게서 어떤 새로움을 보셨고 무엇을 끌어내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남다은)
=당연히 어떤 새로움을 느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건 말로 하기가 너무 힘이 들어서 아예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이민우씨는 촬영 얼마 전에 김상중씨의 추천으로 만나게 됐고, 정재영씨는 유준상씨의 추천이 전부터 있었습니다.

-‘선희의 남자들’ 서클에 들지 못하고 내쳐진 다음 다시 영화 속으로 돌아오지도 않는 선배(이민우)는 이 영화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나요? <해원>에서 류덕환씨가 연기한 서촌 남자와도 좀 달라 보이는데요.(김혜리)
=기운은 씩씩한데 좀 모자란 선배죠, 선희를 화나게 해서 낮술 마시게 만드는. 선희가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어색하고 불편했던 기억이 많은 사람인데, 그걸 또 건드리는 겁니다. 저 사람이 또 날 이상하게 보는구나, 날 무시하는구나! 그 낮술로 지체하느라 전 남자친구도 보게 되고요.

-감독님의 전작들에서 우리에게 익숙했던 음악은 주로 클래식 선율이나 정용진 감독의 피아노 선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가수 최은진의 <고향>이라는 노래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옵니다. 구체적인 가사, 이미 그 개성이 뚜렷한 음색이 있다는 점에서 감독님께서 사용하던 음악과는 차이가 좀 있습니다. <고향>의 무엇이 감독님의 마음을 건드렸나요.(남다은)
=북촌 근처에 있는 그분 가게를 지나가다 처음으로 들어가봤습니다. 혹시 다음 영화에 찍을 수 있을까 하고 둘러보려한 건데, 그 주인분이 친절하게 맞아주셨고, 자신이 녹음한 CD도 주셨습니다. 며칠 지나서 PD가 그 CD를 틀어놨는데, 그 <고향>이란 곡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한 몇 십번 이상을 듣다가 그날 그분 가게를 또 찾아갔습니다. 그때가 정재영씨랑 하기로 약속한 직후여서 그 가게로 정재영씨도 불렀습니다. 술 마시고 그분이 직접 그 노래를 불러주는 것도 들으면서 맘을 먹었습니다. 이 가게에서 찍고, 이 노래를 쓰자고. 지금 그 노래를 들으면 그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 듭니다. 하여간 그때 처음 여러 번 들을 때 푹 빠져서 들었고, 그런 노래에 대한 선택이 뭔가 날씨나 계절과 연결돼서 제 속에서 영화 만들 때 뭔가를 했을 겁니다.

-노래 <고향>은 화면 안 음악으로 세번 쓰이고 마지막에 오리지널 스코어와 이어지는 연주곡으로 화면 밖에서 반복되는데 그렇게 쓰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김혜리)
=촬영하는 날 처음으로 이 곡을 쓰고 나서, 이 곡이 영화 다른 곳에서도 쓰이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카페 아리랑에서 재학과 문수가 만나는 장면은 감독님의 지금까지 영화들 중에서 가장 긴 장면(가장 긴 원신 원컷)이 아닐까 싶습니다. 몇분짜리 장면인지요? 한편 이 장면이 길어진 이유는 배우(이선균)의 애드리브에 가까운 연기호흡과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감독님은 그걸 흡족해하신 것 같습니다. 어느 면에서 이 장면이 흡족하신지 듣고 싶습니다.(정한석)
=예, 확실히 가장 긴 장면이기는 합니다. 아마 13분 정도 될 텐데 그건 확인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찍으면서 술을 많이 마시게 되었고, 긴 신이어서 어디서건 한번은 막히는 게 당연한 거였습니다. 막혔을 때 포기 안 하고 계속 가보는 건데, 그게 잘 정리가 되고, 할 얘기는 다 하고, 그럴듯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운이 좋아야 만들어지는 신인 거 같습니다. 그 신을 여러 번 봤는데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옵니다.

-문수(이선균)가 “끝까지 파고 가봐야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안다”는 말을 하면서 갑자기 손으로 큰 제스처를 취하는 연기가 두드러집니다. 이 연기가 나오게 된 과정이 궁금합니다.(김혜리)
=이선균씨가 그 대사 마무리 부분이 기억이 안 나니깐 별걸 다 해보고 있는 거 아니었을까요?

-선희(정유미)와 재학(정재영)이 술을 마실 때에도 눈에 들어오는 몸짓이 있습니다. 특히 두 사람의 손짓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이때에는 혹시 어떤 특별한 디렉션을 하신 건지요.(송경원)
=정재영씨에게 정유미씨 얼굴을 한번 만지라고 한 건 기억이 나는데, 다른 건 두 사람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난 거 같습니다.

-<우리 선희>에서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선희에 대한 평가도 그렇고, 서로들 삶에 대해 훈계하는 조언들도 그렇고요. 이 영화는 ‘우리’ 선희에 대한 이야기인지요, 아니면 선희를 둘러싼 ‘말’에 관한 이야기인지요.(송경원)
=우린 부족하지만 선희를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있고, 남자들은 선희에 대해서 말을 합니다. 그 둘 사이의 간격을 느끼면서 우린 선희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말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문수, 재학, 최 교수, 세 남자의 선희에 관한 묘사는, 선희가 내성적이고 또라이 같지만 안목이 좋다는 쪽으로 모아집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선희의 그런 면모를 알 만한 행동을 우리가 보았는가 되물어보면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의도적으로라도 영화 속 선희는 이상의 말들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주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선희라는 실체와 선희라는 실체에 대한 말들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이 보이는 것과 말해지는 것의 차이에 관한 감독님 의 생각이 듣고 싶습니다.(정한석)
=말로 뭔가 좋은 일, 중요한 일을 하려면 정확해야 하는데, 그게 여러 이유로 굉장히 힘든 거 같습니다. 말이 파악했다고 주장하는 그 핵심이란 것, 본질이란 것도 실제로 살면서 보면 별로 핵심도 본질도 아닌 거 같고요. 우린 그냥 그 단순 명료한 말이 좋아서 믿고 싶어 하고, 밀고 나가는 꼴입니다. 그런 걸 아예 찾으려 하지 않고 사는 게 좋은 길인 거 같습니다, 저한테는.

-<우리 선희>는 어딘지 모르게 육중하게 느껴집니다. 비교하자면 <해원>이 꿈의 출입 등 신묘한 분기점이 두드러지는 영화였다면, <우리 선희>는 그런 분기점보다는 몇개의 현실 관계들이 굵은 덩어리로 턱턱 붙어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가령 감독님의 영화에 최근 많이 등장해왔고 차원적으로 다층적인 인상을 주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도 <우리 선희>에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점들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은 어떠신지요.(정한석)
=신들의 길이나 호흡이 좀 다르고요, 줌도 덜 쓰였고, 인서트 느낌이 다르고, 등장과 퇴장이 많은 것도 다르고, 그래서 굵고 큰 덩어리들이 몇개 안되면서 이어집니다. 해야 하는 얘기들의 내용, 길게 사용된 음악, 장소의 반복 등이 이유가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엔딩에서는 세 남자가 선희라는 여인에 관한 헛된 설명만 붙잡은 채 창경궁에서 허탈하게 헤매는 모습이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비교적 명징해 보이기도 하는데요, 조금 덜 분명하거나 다른 느낌의 엔딩을 고려하신 적은 없는지 궁금합니다.(이후경)
=그런 느낌을 주는 게 좀 착하고 좋은 거 같았습니다. 그전까지 영화가 쭉 해온 거랑 맞는 마무리라 생각했습니다.

-에릭 로메르의 <겨울이야기>를 보다가 여주인공이 자신을 좋아하는 여러 남자들 중 가장 똑똑한 한 남자에게 나를 왜 좋아하느냐고 묻자 남자가 “파악하기 쉬워서”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빵 터진 적이 있습니다. <우리 선희>의 세 남자도 언뜻 그렇게 보이는데, 또 한편으론 선희를 잘 몰라서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해서 좋아하는 마음에는 늘 얼마간의 착각이 끼어있는 것일까요.(이후경)
=어차피 아무것도 그렇게 잘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간 잘 안다고 해서 좋아하는 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먼저 좋아하고, 상관없이 좋아하는 거죠. 좋아하는데 그 사람에게서 조금씩 다른 면을 보게 되고, 그 보게 되는 과정들도 즐기는 것, 그게 좋은 거 같습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더 참을 수 있고, 그래서 내 속의 두려움이나 불편함을 이겨내고, 전엔 어색해했던, 삐뚤게 봤던 그 다른 면을 이젠 온전한 모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그게 덤으로 얻는 겁니다. 그 덤으로 내가 조금씩이지만 변하는 것 같습니다.

-실생활에서 교수로서 학생들의 추천서를 쓰며 한 사람을 묘사해야 할 때 감독님이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이 있다면 알고 싶습니다. 또, 한 인간을 설명할 때 글로 하는 경우와 말로 하는 경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도.(김혜리)
=추천서 쓰는 것, 별로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쪽에선 그게 도움이 된다고 하니깐 하는 겁니다. 다만 그 사람을 좋아하고 같이 즐겁게 잘 지내고 싶습니다. 조금씩 그 사람의 다른 면들을 발견하는 것도 재미있는 일입니다. 그건 그 사람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그냥 그날의 작은 발견일 뿐입니다. 가끔 영화를 만들거나 예술적인 표현을 통해서 사람을 표현하게 될 때는 매체의 과정이 주는 기적을 믿고 의지합니다. 설명은 선풍기 조립 매뉴얼에 적합합니다.

-감독님 영화에서 여성은 특별한 자리에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선희>에서 그 선희의 자리에 문수나 재학, 최 교수가 오기는 힘든 건가요. 힘들기로는 그쪽이 더 힘들어 보이고, 바보 같기로도 그쪽이 더 바보 같은데요.(정홍수)
=이 영화에선 선희였지만 <생활의 발견>에선 경수였습니다. 그냥 ‘문수의 영화’나, ‘우리 경수’ 같은 식의 제목이 저한테 떠오르지 않는 겁니다. 제목에 그 이름을 쓸 정도의 여자를 향한 작은 희망 혹은 환상 같은 건 아마도 제가 여자가 아니기 때문일 겁니다.

-감독님 영화를 보아오면서 문득 위로받고 있다는 생각을 한 적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위로의 실체가 무언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최근 감독님 영화를 보면 영화 속의 인물들이야말로 그 위로를 구하고 있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힘들어하고 애쓰는 모습이 안타까울 정돕니다. 이번 영화로 이야기한다면 가을볕, 꿈결처럼 들려오는 풍각쟁이 최은진의 노래, 창경궁의 풍경, 혹은 시간이 쌓여 있는 고궁이라는 자리, 아니면 치킨이나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술자리가 사실은 그 위로의 형식이자 내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 인물들은 그 위로를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으면서 많이 힘들어졌습니다. 영화의 위로 혹은 삶의 위로에 대한 감독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정홍수)
=격려가 되는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어떤 영화가 어떤 이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어떤 영화가 그랬고요. 만드는 사람은 우선은 만드는 일에 대한 순수한 행위를 목표로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은 일은 저절로 일어날 겁니다, 일어날 거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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