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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에게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배우 정재영과 이민우. 정재영은 <우리 선희>에서 재학이라는 영화감독으로 출연한다. 내적으로는 자기 고민도 지녔지만 주변 사람들이 곧잘 찾아와 믿고 비밀을 털어놓는 속 깊고 현명한 인물이다. 이민우는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여 괜한 거짓말로 선희를 화나게 하고 낮술 먹게 하는 선희의 학교 선배를 연기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홍상수 감독이니 어쩌면 그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더 자주 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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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 영화 중 가장 긴 원신 원컷 장면이 나왔다. 대략 13분짜리다. 문수와 재학이 카페 아리랑에서 만나 술 마시는 장면이다. 이날 현장에서 본 바를 전하자면 다음과 같다. 실제로 술을 마시며 진행된 촬영이라 테이크가 거듭되며 두 배우 모두 적잖이 마셨다. 게다가 화면으로는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소주를 따라 마신 잔이 보통 소주잔보다는 좀 큰 편이어서 연기를 하며 한번에 털어 마시는 양이 꽤 많았다. 카메라가 꺼지면 이선균은 힘들어했고 정재영은 몸을 비틀거렸다. 영화 속에 들어간 장면은 그날의 마지막 테이크다. 원체 대사가 많고 긴 장면이었고, 술까지 많이 마셔서인지 이선균이 잠깐 대사의 끝부분을 잊은 것 같았다. 그런데 배우들의 환상의 연기 리듬이 바로 그때 시작됐다. 이선균은 순간 자기를 풀어버리더니 “파고 가고 파고 가고”를 길고 길게 연발하며 본능적이고 즉흥적으로 장면의 흐름을 유지했다. 특유의 몸짓, 손짓도 동원됐다. 덕분에 그는 원래 대사가 요구했던 바를 완수하면서도 새로운 활기까지 표현해냈다. 이선균의 연기에 맞춰 짧은 추임새를 넣어가며 장면의 리듬을 끝까지 가져간 정재영의 수훈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 모니터링을 하며 크게 웃었고 홍상수 감독도 많이 흡족해했다. 그 테이크가 영화 속에 들어갈 거라고 사람들은 직감했고 마침내 <우리 선희>의 가장 멋진 장면 중 하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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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미친 짓 중 하나는 노래를 통째로 넣는 것”이라고 홍상수 감독은 말했다. 홍상수 영화를 많이 보아온 관객이라면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더 놀랄 만한 건 그게 서양 고전음악이 아닌 한국의 근대가요, 흔한 말로 트로트, 더 흔한 말로 뽕짝이라는 사실이다. 1941년에 발표된 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의 <고향>이다. 원래는 이난영이 노래했지만 영화 속에서는 최은진의 음색으로 들을 수 있다. 이 노래는 원래 “식민지 배경을 암시하며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물론이지만 홍상수 감독은 그와 무관하게 우연히 카페 아리랑에 갔다가 주인장 최은진씨가 직접 부른 이 노래를 들었고 그게 그냥 좋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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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에서 궁을 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오! 수정>의 경복궁), 창경궁은 처음이다. 왜 창경궁이었을까. “거기가 개인적으로 좀 편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인물들에게도 그렇게 한가하게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으로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럼 성과 궁은 어떻게 다른가. “성은 올라가니깐 힘들지만 끝에 시원하고, 궁은 평지니깐 구석이고 한가하면 좋습니다.” 감독의 대답이다. 그럼 영화를 본 우리는 어떨까.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을 보고 남한산성에 가보고 싶었던 것처럼, <우리 선희>의 라스트 신을 보고 나면 창경궁에 가보고 싶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