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한번쯤 그런 순간이 찾아온다. 지금 어디쯤 왔는지 길은 보이지 않고, 제대로 가고 있는지 방향도 알 수 없어 삶이 정체된다는 느낌. 이제는 뒤돌아갈 수도 없건만 계속 앞으로 가자니 불안한 진퇴양난의 시기. 무엇보다 이 어둠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가장 괴롭다. <파스카>의 안선경 감독은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이 시기를 그저 묵묵히 버텨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 것. 결국 두 번째 장편 <파스카>로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그녀는 당당히 뉴커런츠상을 수상하며 긴 터널을 빠져나왔다.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지원사업에 선정되어 만든 첫 장편 <귀향>(2009)이 취리히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며 소기의 성과를 올리는 듯했지만 도리어 이때부터가 긴 터널의 시작이었다. “소통이 전혀 이뤄지지 않아 답답했다. 대중적이지 않더라도 이런 부분은 싫다, 이거는 좋았다, 라는 식으로 누군가는 이야기해줘야 하는데 그게 없었다. 나름 작품 속에서 문제제기를 많이 하는 편인데 반응이 없으니 갈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배급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제대로 만날 수 있는 창구가 부족했다. 하루 2회차 단관 개봉을 겨우 했는데, 그나마 화면에 포커스가 나간 채 상영을 하고 있더라.” 연희단거리패 출신으로 눈앞에서 관객과 바로 호흡해왔던 그녀에게는 대답없는 벽을 마주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안선경 감독은 당시 심경을 ‘더이상 영화를 하고 싶지 않았던’이라고 표현했지만 동시에 ‘영화를 하지 않을 도리’가 없음을 깨달은 시기이기도 했다. 배우로 입단한 연희단거리패에서 2년 만에 기획, 연출을 맡았던 그녀는 1999년 연극을 그만두면서 무작정 영화 워크숍을 쫓아다니다가 결국 영화아카데미까지 들어갔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 이끌려 무작정 만들기 시작했다. 작품 한편 만들고 나면 부끄럽고 불만족스러워 얼른 다음 작품으로 만회해야지 하던 게 여기까지 이어졌다.” <사냥꾼들>(2006), <유령 소나타>(2007) 등 단편을 통해 추상적인 것에서 현실을 발견해나가는 탁월한 감각을 키워온 안선경 감독의 영화들은 한편으론 연극적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철저히 일상에 맞닿아 있다.
그런 그녀에게 연희단거리패 배우들과 지인들이 노 개런티로 참여하고, 현장 스탭 한명 없이 단 10회차 촬영으로 완성한 <파스카>는 어떤 방식으로 영화작업을 계속할 수 있을지에 대한 실험이자 어떻게든 할 수 있다는 항변이었다. “사실 난해하고 뒤틀린 것에 재미를 느낀다”며 잘 걸어가는 사람보다는 길 위에서 걸려 넘어지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그녀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것을 바라보는 것에 대한 필요성을 역설했다. 동시에 이번 작품을 통해 소통하는 방식이 한층 넓어진 것 같다고도 했다. “영화라는 게 내가 바라보는 세상을 형상화해서 보여주는 건데 거기에 관객이 없다면 죽은 것과 같다. 영화제에 와서 많은 이들과 마주하며 영화를 계속해도 괜찮다는 허락을 받는 기분이었다.” 긴 겨울을 견디고 결국엔 다시 영화라는 출발점에 다다른 안선경 감독. 삶은, 그리고 영화는 그렇게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