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0년대를 강타했던 ‘브리티시 인베이전’(일련의 영국 배우들의 할리우드 주류 문화 진입을 일컫는 용어)의 이면에는, 제대로 항의 한번 해보지 못한 채 ‘영국 배우’로 구획 지어졌던 아일랜드 배우들의 슬픈 속사정이 있었다. 미국인들에게는 다 같은 ‘영국인’으로 보일지 몰라도, 전형적인 영국 본토의 배우들과 분명한 차이를 가지고 있던 윗세대 아일랜드 배우들은 다양한 시행착오를 겪으며 할리우드에서의 입지를 다졌다. 다음은 20세기 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조국을 벗어나 주목할 만한 커리어를 쌓아온, 아일랜드 출신 배우들의 계보다. 영국령인 북아일랜드 태생의 배우도 있으나, 정서적으로나 거리적으로나 영국보다 아일랜드에 가까운 땅이기에 이 목록에 포함했다.
1930s
Richard Harris 리처드 해리스 (1930~2002) <용서받지 못한 자> <욕망의 끝> <글래디에이터> <해리 포터와 비밀의 방> 젊은 관객에겐 <해리 포터> 시리즈의 인자한 교장 선생님 덤블도어로 기억되는 배우이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진짜 사나이’였다. <용서받지 못한 자>의 명사수 잉글리쉬 밥이나, <욕망의 끝>(칸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작)의 럭비 선수 같은 거친 남자 역할이 그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영화 밖에서도 리처드 해리스는 다혈질적인 성격과 과도한 음주, 여성 편력으로 늘 구설에 오르내리던 ‘나쁜 남자’였다. 그의 야성적인 매력을 더이상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Peter O’Toole 피터 오툴 (1932~2013) <햄릿> <아라비아의 로렌스> 아일랜드 태생이지만 영국을 대표하는 배우 피터 오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정통한 배우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만난 건 신의 한수였다. 1차대전 당시 오스만제국에 대항하는 아랍 부족의 반란을 부추긴 영국 첩보장교 로렌스로 등장한다. 이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때부터 귀족적인 면모에 어딘가 해갈되지 못한 갈망을 품고 있는 듯한 이미지는 그의 그림자가 됐다. 1964년 <베킷>으로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을, 1980년 <스턴트맨>으로 전미비평가협회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3년에는 아카데미 평생공로상을 받았다.
1940s
Michael Gambon 마이클 갬본(1940~) <해리 포터와 아즈카반의 죄수> <킹스 스피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 세상을 떠난 리처드 해리스의 뒤를 이어 <해리 포터>의 덤블도어 역을 맡았다. 리처드 해리스가 점잖은 현자의 이미지라면 마이클 갬본은 좀더 차갑고 음험해 보인다. 심지어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행동도 해 보이는 분방한 덤블도어의 탄생이다. 그건 아마도 스스로 선한 역할보다는 악한 역할에 끌린다고 말한 적이 있는 마이클 갬본의 내심이 반영된 것일지도 모른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요리사, 도둑, 그의 아내 그리고 그녀의 정부>의 주연으로 발탁돼 본격적인 스크린 연기를 시작했다. 풍부하고 부드러운 음색으로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1950s
Gabriel Byrne 가브리엘 번(1950~) <엑스칼리버> <밀러스 크로싱> <유주얼 서스펙트> 존 부어먼의 <엑스칼리버>로 영화계에 데뷔했을 때 그의 나이 스물아홉. 배우 입문은 조금 늦었지만 1990년 코언 형제의 갱스터 무비 <밀러스 크로싱>을 시작으로 자신만의 연기색을 거침없이 만들어갔다. <유주얼 서스펙트>에서는 젠틀하면서도 치밀한 딘 키튼으로 열연했다. ‘지적인 여성의 섹스 심벌’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허무맹랑하지만은 않아 보인다.
Liam Neeson 리암 니슨(1952~) <엑스칼리버> <쉰들러 리스트> <테이큰1, 2> <논스톱> 존 부어먼 감독이 <엑스칼리버>에 그를 캐스팅하지 않았더라도, 할리우드가 리암 리슨을 가만히 놔뒀을 리 없다. 190cm가 넘는 큰 키가 인상적인 리암 니슨은 과거엔 미지의 나라에서 온 할리우드의 연인으로, 최근에는 동세대의 독보적인 액션배우로 깊은 인상을 남기는 중이다. 그는 예상외의 흥행을 거둔 <테이큰1, 2>의 인기에 힘입어 액션배우로 거듭난 뒤 제2의 전성기를 열어젖혔다. 최근 <테이큰3> 계약까지 완료한,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나가는 배우 중 하나.
Pierce Brosnan 피어스 브로스넌(1953~) ‘007’ 시리즈 <오션스> <유령작가> 딱 떨어지는 슈트와 젠틀한 이미지 때문에 지적이며 전문적인 느낌의 캐릭터들을 주로 연기했다. 하지만 팀 버튼의 <화성침공>이나 <퍼시 잭슨> 시리즈처럼 의외의 작품을 선택하는 엉뚱한 면모도 있다. 대표작은 네편의 ‘007’ 시리즈인데, 이 작품들을 마치고 브로스넌은 “제임스 본드의 세계에서 내가 할 말은 모두 다 했다”라고 말하기도. 로만 폴란스키의 <유령작가>에서는 아내 몰래 여비서와 은밀한 관계를 이어가는 위험한 남자 애덤 랭으로 등장했다.
Brendan Gleeson 브렌던 글리슨(1955~) <해리 포터와 불의 잔> <미션 임파서블2> <트로이> 한국 관객에게는 <해리 포터> 시리즈의 매드아이 무디 교수로 잘 알려진 배우다. 콜린 파렐과 함께 <킬러들의 도시>에 출연해 예술을 사랑하는 우아한 선배 킬러로 나왔다. <28일후…> <트로이> <빌리지> <푸줏간 소년> <브레이브 하트> <마이클 콜린스> 등 쟁쟁한 작품들에 꾸준히 얼굴을 보여왔다.
1960s
Kenneth Branagh 케네스 브래너(1960~) <헨리 5세> <햄릿> <토르: 천둥의 신> <잭 라이언: 코드네임 쉐도우> 연극, 영화, 드라마 연기와 연출에 모두 능한 르네상스형 배우. 셰익스피어의 열렬한 팬인 그는 1984년 연극 <헨리 5세>의 주인공을 맡아 로렌스 올리비에의 뒤를 잇는 셰익스피어 전문배우라는 평을 듣는다. 할리우드의 러브콜을 받고 만든 첫 작품 <환생>에서는 1인2역으로 활약했다. 셰익스피어에 정통한 특기를 십분 살려 만든 영화 <헛소동>으로 다시금 셰익스피어의 현대적 각색자라는 명성을 얻는다. 연출작으로는 로버트 드 니로 주연의 <프랑켄슈타인>도 있다. 2011년 블록버스터 <토르: 천둥의 신>을 연출해 좋은 평가를 받는 등 여전히 도전을 멈추지 않는 예술가다.
Aidan Gillen 에이단 길렌(1968~) <퀴어 애즈 포크> <왕좌의 게임> 시즌1, 2, 3, 4 <블리츠> <샹하이 나이츠> 더블린 태생의 그를 일약 스타로 만든 건 1999년 미국 TV시리즈 <퀴어 애즈 포크>. 한국 관객에게는 <왕좌의 게임>의 피터 베일리쉬 경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일명 ‘리틀 핑거’로 불리는 그는 똑똑한 머리로 권모술수에 능한 비열한 인물을 매끄럽게 해냈다.
1970s
Stuart Townsend 스튜어트 타운센드(1972~) <레저렉션> <퀸 오브 뱀파이어> <젠틀맨리그> 한때 샤를리즈 테론의 남자친구로 유명세를 탔다. <트로잔 에디>로 데뷔했다. 코미디극 <어바웃 아담>, SF 스릴러 <이온 플럭스> 등 연기의 폭이 비교적 넓은 편이다. <젠틀맨리그>에선 카리스마 넘치는 불사신 도리안 역을 맡았다. 신비스러우면서도 어두운 카리스마를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Jason O’Mara 제이슨 오마라(1972~) <밴드 오브 브라더스> <레지던트 이블3: 인류의 멸망> 영화보다는 <BBC>와 <ITV> 등의 TV시리즈로 좋은 평을 받고 있는 배우다. 할리우드에 진출한 건 2001년. <HBO>에서 방영한 스티븐 스필버그의 전쟁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출연하면서부터다.
Warren Christie 워런 크리스티(1975~) <알파스> 시즌1, 2 <아폴로 18> 초능력자들이 ‘알파스’라는 팀을 꾸려 미스터리한 사건들을 해결해나가는 미드 <알파스>에 출연했다. 전직 군인 출신의 저격수, 탁월한 운동신경의 소유자 카메론 힉스로 나온다. 사격 솜씨 역시 일품인지라 조준하는 모든 것들을 맞힌다. 거의 모든 상황을 예측하고 통제해나가는 능력자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게다가 잘생겼다.
Andrew Scott 앤드루 스콧(1976~) <셜록> 시즌1, 2, 3 <데드 바디> <셜록>의 인기에 힘입어 짐 모리아티를 연기한 앤드루 스콧의 인지도도 급상승했다. 아일랜드 영화계에 데뷔했을 때가 열일곱. 작품명이 흥미롭게도 <코리아>였다. 이후 영국으로 옮겨가 마이클 갬본과 TV드라마로 합을 맞춘 경험도 있다.
Colin Farrell 콜린 파렐(1976~) <토탈 리콜> <폰 부스> <마이너리티 리포트> 곧장 조엘 슈마허 감독의 저예산영화 <타이거랜드>의 주연 자리를 꿰차더니, 2년 뒤엔 스필버그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 출연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폰 부스>의 성공…. 수많은 스캔들과 구설수를 경험하며 ‘할리우드의 악동’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도 얻었다.
Cillian Murphy 킬리언 머피(1976~) <28일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같은 아일랜드 출신에 같은 나이인 콜린 파렐과는 대조적인, 차분한 느낌의 배우다. <28일후…>로 스타배우로 급부상했고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악역으로 나타났다. 켄 로치의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서 데미엔을 맡았다.
Jonathan Rhys Meyers 조너선 리스 메이어스(1977~) <튜더스> <매치 포인트> 혜성처럼 나타났다는 표현은 그를 두고 나온 말 같다. 리스 메이어스는 닐 조던의 <마이클 콜린스>의 킬러로 데뷔해 호평을 받는다. <슈팅 라이크 베컴>에 이어 우디 앨런의 <매치 포인트>는 단연 그의 대표작이다. <튜더스>의 헨리 8세는 배우로서의 그의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줬다.
1980s
Colin O’Donoghue 콜린 오도노휴(1981~) <더 라이트: 악마는 있다> <원스 어폰 어 타임> 후크 선장 역으로 미드 <원스 어폰 어 타임> 시즌2, 3에 승선한 콜린 오도노휴. 사랑하는 여인과 멀리 도망간 죄로 복수의 소용돌이에 빠지는 남자다. <튜더스>에서 메리 공주에게 고백하던 필립 공작으로 나와 이미 한차례 여심을 흔든 바 있다.
Allen Leech 엘렌 리치(1981~) <다운튼 애비> <이미테이션 게임> 귀족 사회를 멀찍이서 바라보던 쓸쓸한 눈빛의 운전사 톰 브랜슨. 영국 <ITV>에서 방영한 인기 시대극 <다운튼 애비>에 출연한 엘렌 리치다. 아일랜드 TV의 코미디 드라마 <맨 어바웃 도그>에서 주연을 맡기도 했다. 미드 <이미테이션 게임>에 캐스팅돼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키라 나이틀리와 호흡을 맞출 예정이다.
Jamie Dornan 제이미 도넌(1982~)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마리 앙투아네트> <원스 어폰 어 타임> 시즌1 미드 <원스 어폰 어 타임> 시즌1에서 계모로부터 백설 공주를 살해하라는 특명을 받은 사냥꾼 그라함으로 등장했다. 동화 속 백설 공주의 심장을 도려내지 못한 죄로 자신의 심장을 잃고 감정까지 느끼지 못하는 인물이다. 유명 패션 브랜드가 선호하는 인기 모델로 활동하고 있다.
Domhnall Gleeson 돔놀 글리슨(1983~) <네버 렛미고> <어바웃 타임> ‘헤어스타일이 배우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만약 이런 제목의 보고서가 나온다면 돔놀 글리슨을 당장 일순위에 둬야 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어바웃 타임>의 사랑스러운 팀으로 돌아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저지 드레드>의 너저분한 프로그래머, <안나 카레니나>의 덥수룩한 수염을 단 레빈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평범한 외모지만 왠지 천재적인 재능과 기질을 숨기고 있을 것 같은 인상이다. 한마디로 매력적이라는 소리다.
Aidan Turner 에이단 터너(1983~) <호빗: 뜻밖의 여정> <섀도우 헌터스: 뼈의 도시> 머릿결마저도 악동스럽달까. 곱슬곱슬하게 웨이브진 머릿결마다 장난기를 숨기고 있는 것 같다. 또 왠지 그가 씨익 웃으면 뒤통수부터 조심해야 할 것 같다. 그가 <BBC> 드라마 <데스퍼리트 로맨틱> 시즌3에서 말썽 많은 라파엘 전파 화가로 등장했을 때에도 어색하지 않게 느껴졌던 이유에는 그의 독특한 외모 또한 한몫했을 것이다.
Robert Sheehan 로버트 시한(1988~) <체리밤> <섀도우 헌터스: 뼈의 도시> 좋아하는 영화로 <아메리칸 뷰티>를 꼽았다. 누가 먼저 여자와 잠자리를 갖나 친구와 내기를 하는 <체리밤>의 10대 소년 루크 역을 맡은 것과 묘하게 겹친다. 그는 여기서 술과 마약, 담배로 여자에게 다가가보지만 되레 자신이 먼저 사랑에 빠지고 마는 십대 소년을 연기했다. 빗질 따위에는 관심 없다는 듯 시크하게 헝클어진 머리가 트레이드마크다.
1990s
Jack Gleeson 잭 글리슨(1992~) <배트맨 비긴즈> <왕좌의 게임> 시즌1, 2, 3, 4 막돼먹은 영애씨는 아무것도 아니다. 막돼먹은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했다. <왕좌의 게임>에서 가상의 왕국 웨스테로스의 국왕 조프리 바라테온으로 열연했던 잭 글리슨을 말하는 거다. 아역배우 때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사실상 <배트맨 비긴즈>에 잠깐 얼굴을 비춘 게 전부라고 해도 무방한 신예다. 그런 그가 <왕좌의 게임>에서 보는 이의 치를 떨게 만드는 악역으로 등장했다. <왕좌의 게임> 이후 연기를 그만둘 수도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밉상이지만 조금 더 보고 싶다. 그럼 지금 이 타이밍에 필요한 말은, ‘미워도 다시 한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