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신인 황윤 감독 수신인 박그림 환경운동가 설악녹색연합 대표. 설악산 산양 연구가. 설악산 환경지킴이. 1992년 설악산 언저리에 집을 지은 이후 모노레일 설치 반대, 설악산 세계자연유산 등록 추진, 대청봉 케이블카 설치 반대 등 꾸준히 환경보호 운동을 해왔다.
박그림 선생님께.
2001년 1월, 선생님과 함께 설악산에서 보냈던 그 겨울을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동물원 철창에 갇힌 호랑이들의 삶에 관한 영화 <작별>을 만들던 당시, 저는 ‘동물원 밖 세상’ 그러니까, ‘야생’이 너무나도 궁금했고, 알고 싶었고, 보고 싶었습니다. 야생에 관해서라면 일자무식이었기에, 야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을 찾아다니다가 어떤 ‘이상한’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입만 열면 너구리 발자국이랑 개 발자국은 어떻게 다른지를 토론하는 ‘야생동물소모임’이었지요.
그 모임에서 설악산으로 6박7일간 장기탐사를 갔을 때 선생님이 이끌어주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대피소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우리는 선생님의 강연을 들었지요. 선생님의 사진들을 보며, 저는 처음으로 산양이 얼마나 아름다운 짐승인지, 올무에 걸린 담비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가는지, 사람들의 발길에 설악산이 얼마나 아프게 신음하는지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그사이 밖에는 허리춤까지 큰눈이 쌓여 있었고, 모든 길이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이 속에서 고립되어 내일 신문에 실리는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났습니다. “자, 가보자.” 허리까지 빠지던 눈을 헤치고 선생님이 앞서갔고 그 뒤를 저희들이 따라갔습니다. 나뭇가지가 인도하는 대로 선생님이 맨 앞에 서서 길을 만들며 천천히 걸어가셨고, 그 뒤를 일렬로 서서 우리가 따라갔습니다. 엄청난 무게의 눈을 맨 앞에서 헤치며 앞서간 선생님 덕분에, 우리는 그저 만들어진 길을 따라 편하게 뒤따라가면 될 뿐이었습니다. 그 길 끝에, 산양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야생’을 처음 만났습니다. 15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그날의 차가운 바람과 눈, 마른 산양똥을 처음으로 만져보았던 순간의 설렘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껴집니다. 그날 맨 앞에서 눈을 헤치고 길을 만들며 나아가신 선생님의 모습은, 평소에 선생님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를 의미하는 모습 같습니다. 선생님은, 야생의 친구들을 만나고 싶어 길을 나서는 후배들을 위해 길을 안내해주는, 귀하고 듬직한 ‘야생학교’ 스승이시고, 문명의 썩은 냄새를 벗어나 야생의 향기에 젖고 싶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알려주는 인생여행 가이드이시고, 능멸받고 죽어가는 어머니 설악산과 대자연을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겨울바람을 맞고 서 있는 외로운 환경운동가, 고목이십니다.
제가 인간-비인간 동물의 관계를 화두로 영화작업을 한 지 어느덧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영화를 만들면서, 또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칠 때도 많았지만, 그때마다 선생님은 말없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그냥 함께 앉아 있어주시며, 힘이 되어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선생님이 그토록 지키고 싶어 하는 설악산과 산양을 너무도 닮으셨습니다. 푸근한 산 같고, 큰 나무 같은 선생님. 그러나 ‘작은뿔’이라며, 늘 스스로를 낮추고 자연 앞에 겸손함을 잊지 않으려는 선생님. 몇해 동안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를 외치시며 고독하게 일인시위를 하시는 선생님께, 무거운 배낭 메고 조사를 하시다가 어깨를 다친 선생님께, 제가 아무런 힘이 되어드리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새 영화도 완성했으니, 이제는 제가 선생님께 힘이 되어드릴게요. 선생님, 감사합니다.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