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어찌 매번 다시 맞설 수 있는지요
2014-05-13
글 : 태준식 (영화감독)
외교부 청사 앞에서 캄보디아 노동자 유혈진압 사태와 관련한 기자회견 중인 유기수 민주노총 사무총장.

발신인 태준식 감독 수신인 유기수 민주노총 사무총장 1989년 벽산사무노조 위원장을 시작으로 97년 건설산업연맹 부위원장, 2007년 건설산업연맹 사무처장을 지냈다. 2006년 하중근 열사투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2013년 7월 민주노총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유기수 실장님. 몇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1999년 1월. 너무나도 추워 고통스러웠던 아침. 계동 현대사옥 앞. 온 천지가 얼음과 눈밭이었던 시멘트 바닥 위에 갑자기 벌러덩 누워 절규하기 시작하셨지요. 그 절규는 결국 현대 본사 앞마당을 장악하는 힘이 되었고 그나마 노제는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싸움이 끝나고 해단식을 하던 날, 늙은 노동자들이 감사패랍시고 작은 상장과 선물을 준비해 실장님께 건넨 뒤, 결국 아기같이 우셨습니다. 기억하시는지요. 저도 울었습니다. 젊은 시절 신념의 깊이가 유난히 얕았던 제가 천지개벽할 사회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았던 건 순전히 현대중기 노동자들과 실장님 덕이었습니다. 몇해가 지나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고 저도 단체 활동가에서 한명의 생활인으로 살고 있을 때 우연찮게 인터넷으로 실장님의 구속 소식을 들었습니다.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들이 이르게 불었던 정치바람에 휘둘려 위로만 목을 빼고 있을 때 실장님은 노동자들의 분노가 뒤엉킨 곳에서 ‘관료’라는 이름 대신 ‘활동가’로서 그 자리를 지키고 계셨습니다. 창살 너머 볼을 매만지며 얼굴살 빠졌다고 좋아하시던 사진. 감옥에서 찍은 그 사진. 배신의 시절이었지만 모든 것에 절망하고 화낼 필요가 없음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지난해였나요. 철탑 농성을 하던 현대자동차 두 비정규 노동자들을 응원하기 위한 희망버스가 서울 대한문에서 출발했었습니다. 가기 싫다는 아이를 억지로 끌고 나와 버스를 타기 바로 전 지나가다 실장님을 만났지요. 의외로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습니다. 한데 제 옆에 있던 아이를 본 순간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 1만원을 아이에게 주셨습니다. 얼떨결에 돈을 받은 아이의 얼굴에도, 실장님의 긴장된 까만 얼굴에도 웃음이 퍼졌습니다. 그 1만원으로 아이에겐 꼬깔콘과 라면을 사주었고 저는 철탑 아래 장투 사업장 분들이 하는 주막에서 막걸리를 홀짝홀짝 마셨습니다.

한편의 작업을 끝낸 뒤 영화적 성취와 사회적 실천의 결과에 연연해하며 우울해할 때마다 조용한 힘으로 궤적을 그려나갔던 실장님을 바라보며 또 다른 에너지를 얻곤 했었습니다. 그리고 나의 궤적은 평화롭고 듬직하게 그려지고 있는지 되돌아보곤 했습니다. 감사했다는 말씀. 뒤늦게 드립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저의 카메라 앞에 앉아 인터뷰를 하실 실장님께 미리 질문 드려봅니다. 아마도 실장님 또한 많은 실패와 좌절을 겪었을 겁니다. 많이 슬퍼하고 분노하셨겠지요. 하지만 매번 다시 맞서야겠다고 생각하시게 되는 그 시점이 궁금합니다. 바로 실장님의 그 모습과 말씀해주실 그 지점이 언젠가 우리에게 닥쳐올 ‘필승’의 조건이 될 겁니다. 그때까지 건강 잃지 마시고 거리에서 또 만나뵙도록 하겠습니다. 그 사이 저의 카메라에도 잠시나마 시간을 허락해주시길 부탁드려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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