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창의적 공포영화를 위하여
2014-08-05
글 : 정한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기담> <불신지옥> <남매의 집> <고갈>의 사례로 보는 한국 공포영화의 가능성
<기담>

공포영화들이 사라졌으니 돌아와야 한다고 무작정 주장한다면 그 자체로 무용하거나 무책임한 발언이 될 것이다. 오로지 관객의 주머니를 터는 데만 급급했던 조악하고 뻔뻔한 몇몇 영화들까지 다시 돌아오는 것을 아무도 바라지 않는다. 불철저한 전망보다는 정확한 평가가 더 시급한 이유다. 그 평가의 일환으로 창의적 예시가 될 만한 작품 몇편을 골라보고자 했다. 너무 많이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 2000년대 중/후반 영화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었고 수작으로 평가할 만한 네편의 사례를 모았다. 적어도 이 네편의 영화가, 돌아올 공포영화의 어떤 기준점이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흥행 수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개봉되지 않은 중편도 한편 포함되어 있다.

<남매의 집>

고혹적 미, 표준적 정점, 상상력, 불안한 이미지

첫 번째 사례, <기담>(2007). 곧 이어질 세편과 비교한다면 <기담>은 만듦새 면에서 다소 뒤처지는 게 사실이다. 병원의 환자와 의사라는 일군의 무리, 그중에서 관점을 달리하며 취사선택된 각각 세 이야기의 주인공들, 하지만 서로 얼마간 겹치고 개입되어 있는 교집합의 장면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중요할 수밖에 없었던 각 파트의 접촉면의 활성화가 오히려 둔했다는 것이 이 영화의 치명적인 약점이다. 하지만 영화가 선택한 배경과 이야기의 방식이 특별하다. 일제 치하의 근대식 병원이라는 배경은 단숨에(그러니까 영화에는 등장조차 하지 않는 생체 실험의 공포까지 은연중 의식하게 하면서) 소름을 돋게 한다. 그걸 괴담이라는 이야기 방식으로 풀어낸다. <여고괴담>의 괴담이 주입과 경쟁의 강박적 교육체제에서 솟아났다면, <기담>의 괴담은 어두운 식민과 매혹의 근대 그 틈바구니에서 상상된다. 더 중요한 건 <여고괴담>이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로 넘어갈 즈음 그랬던 것처럼, <기담> 역시 기존의 공포에 더하여 어떤 순수나 고혹적 미에 대한 추구가 엿보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기담>이 완수하고자 한 특별한 목표를 이렇게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공포영화가 미를 껴안은 사례로 손꼽히는 일본 공포영화의 오래된 정전 고바야시 마사키의 <괴담>(1965), 어쩌면 그것이 <기담>이 가고자 한 원형의 길이었던 것 같다.

두 번째 사례, <불신지옥>(2009). 이 작품은 한국 대중영화가 공포영화 장르로서 다다를 수 있었던 표준적인 정점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여기서 표준이란 상대적으로 적은 제작비를 투입한 뒤 신인감독의 뛰어난 연출 역량으로 승부수를 거는 상업적 관행으로서의 제작 방식을 의식한 표현인데, <불신지옥>은 그런 시도의 특별한 정점이라고 불려도 크게 틀리지 않다는 뜻이다. 이 한편의 수작은 여러가지 다양하면서도 과감한 결합과 조율의 결과다. 주변에서 쉽게 목격되는 종교적 광신도가 등장하는가 하면 다른 한축에는 생활 터전에 들어와 자리잡은 불길한 세속 신앙이 대립의 구도로 서 있다. 이 두축이, 종교에 미친 엄마와 신들린 딸이라는 인물로, 혹은 십자가와 잘린 닭 머리나 학이라는 이미지로 내내 겨루고 있다. 현실성과 장르성의 꼼꼼한 결합도 시도되고 있다. 가령 지독하게 허름한 주거지로서의 아파트가 우리의 현실적 기반의 취약함 등을 가시화한다면 또 한축으로는 오컬트 장르(초자연적 심령 현상을 소재로 한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로서의 팽팽한 장르적 인물과 장면의 묘사가 곳곳에 어슬렁거린다. <불신지옥>은, 저조했던 흥행의 수치와 무관하게, 장르적 창의성이라는 면모에서 하나의 선례가 될 만하다.

세 번째 사례, <남매의 집>(2008). 이 영화는 중편이므로 정식 개봉한 적이 없다. 감독 조성희가 영화아카데미에서 연출한 40분짜리 작품인데 그가 이후에 연출한 첫 장편 <짐승의 끝>의 기원이며, 그보다 더 뛰어나고, 그의 두 번째 장편 <늑대소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비범하다. 외계인의 침공으로 세계가 종말을 맞은 상황에서 폐쇄적 공간에 갇혀버린 주인공. 이런 묵시록적 종말론의 설정이 새로울 리는 없다. 그런데도 새로운 건 무시무시한 분위기다. M. 나이트 샤말란의 총명했던 초기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가택 침입 장르(집 안에 괴한이 들어와 주인공을 위협하는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의 변종된 한 유형이기도 하다. 세계가 종말을 맞은 (것 같은) 상황에서 지하 방에 사는 어린 철수와 영희는 부모가 없는 동안 세명의 침입자들을 맞이하게 된다. 이들을 향해 철수가 벌이는 무력한 대치가 서사의 전부에 해당하며 결국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지만 영화의 종반에 이르면 우리는 허망하고도 참혹한 유사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범작에 가까운 두 장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가 조성희의 공포영화에 기대를 거는 이유는 <남매의 집>에서 보여준 이 음산한 아이디어와 상상력의 힘 때문이다.

네 번째 사례, <고갈>(2009). 우선 <고갈>이 공포영화에 속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공포감이 공포영화라는 범주보다 상위에 있는 것이라고 가정할 때 <고갈>은 장르화된 기존 공포영화의 범주에서 벗어나 또 다른 공포영화가 될 가능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링> 시리즈의 진정한 공포가 어디에서 왔던 것인지 환기하는 것이 의외로 도움이 될 것 같다. 긴 머리를 하고 관절을 꺾던 혼령 사다코의 형상은 물론 무서웠다. 악행에도 선행에도 상관없이 죽음의 법칙이 무한하게 순환하고 방문한다는 그 서사도 무서웠다. 하지만 가장 소름끼쳤던 건 어디선가 녹화된 비디오테이프라는 명목으로 영화에서 반복 재현되곤 했던, 어두운 명도와 낮은 채도로 들끓고 있던 테이프 속 이미지의 질감, 그 입자들의 노이즈가 주는 정서적 효과였다. 곡사의 제도권 공포영화 <화이트: 저주의 멜로디>에서도 그건 일부 등장하지만 <고갈>에서는 영화 전반에 걸쳐 집요하고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특히나 후반부 클라이맥스를 맞아 마치 디바인(존 워터스의 컬트영화 <핑크 플라밍고> 등에 등장했던 뚱뚱하고 괴이한 여장 남자 캐릭터)의 현현인 것처럼 등장한 한 여성을 계기로 성기에 대한 가해와 폭력과 죽음이 연쇄적으로 일어날 때, 감독 자신이 “불안의 이미지를 캐스팅한 것”이라고 했던 이 영화의 정서와 감각은 배가 된다. 우리가 살아가는 땅에 대한 불쾌와 불안이라는 저류의 인상을 불온하고 강력한 정치적 활기로 역류시키고자 했던 <고갈>은, 뛰어난 공포영화란 유능하게 놀라게만 하면 된다는 장르주의적 편견을 불식시키는 아방가르드한 공포영화의 한 사례다.

<고갈>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체험치가 담긴 모델

<호러영화: 매혹과 저항의 역사>의 저자 폴 웰스가 관객을 상대로 한 조사 결과를 보니, 과거의 관객 중 일부는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보면서 기절하거나 구토를 한 경험이 있다고도 한다.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경험이지만, 그 시대 영미권의 관객에게는 그럴 만한 공포감을 조성했던 모양이다. 혹은 “제2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전후 공포스럽고 끔찍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욕망을 확실히 감소시켰다”고도 한다. 공포영화가 유독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체험치와 관련이 높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비록 우리의 편견으로 뽑은 것이지만, 이상의 네편의 영화에도 문화적, 사회적, 시대적 체험치가 녹아 있을 것이며 그걸 뛰어나게 창작한 결과 이 작품들은 동시대 공포영화의 한 모델이 되었을 것이다. 가장 최신의 한국적 공포영화가 완수해야 할 항목을 통합하여 추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는 이 네편의 공포영화 안에 그 가능성이 있음을 의식하는 게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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