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기 감독과 이종호 작가의 만남은 <분신사바>의 원작자와 연출자의 관계로 시작됐다. 10년도 넘게 한국의 유일한 공포영화 전문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짊어지고 있는 안병기 감독은 그사이 중국으로 진출해 <분신사바>의 리메이크 버전인 <필선> 1, 2, 3편을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공포문학 작가였던 이종호 작가는 영화사 대표로 거듭났다. 2012년에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 고스트픽쳐스를 세워, 직접 각본까지 쓴 <두개의 달> <소녀괴담>을 제작했다. 1년 반 만에 재회한 두 사람은 한국 공포영화(시장)에 대한 애정과 걱정을 쉼 없이 풀어놓았다. 통렬한 자기반성의 시간까지 끝내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안병기_이종호 작가님과는 <분신사바>로 인연을 맺었으니 벌써 10년이나 알고 지낸 사이다. 사실 나는 그때 이미 한국 공포영화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가위>와 <폰>이 영화의 만듦새는 부족했지만 영화가 워낙 잘됐다. 시나리오는 개인적으로 흡족했지만 두 영화 모두 시나리오의 매력을 50∼70%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두 영화 모두 빵 터졌다. 흥행은 했지만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이 있었다. 그러던 때 공포문학 동호회를 통해서 이종호 작가의 <모녀귀>를 소개받아 읽었다. 소름이 쫙 끼쳤다. <폰>이 잘되니까 일본에서 300만달러씩 미리 투자가 들어왔던 때다.
이종호_그때 안병기 감독님한테 이런 얘기를 했었다. <모녀귀>가 에로틱 공포 문학인데, 에로틱 공포의 느낌을 19금으로 잘 살리면 좋겠다고. 그런 건 걱정하지 말라더라. 당시 안병기 감독님이 워낙 꼭대기에 있을 때라 나도 안심을 했는데…. (웃음)
안병기_영화가 계속 잘되다보니 초심으로 못 돌아갔다. 에로틱으로 가면 15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못 받으니까 <분신사바> 역시 상업적으로 가게 됐다. 결과적으로 좋은 원작을 망친 꼴이 됐다. 나중에 강풀 작가 작품(<아파트>)까지 망쳐버렸지만. 결론부터 얘기하면 <여고괴담>부터 <소녀괴담>까지 한국 공포영화의 가장 큰 문제는, 공포영화에 매력을 느껴 공포영화를 만들어보겠다고 나서는 감독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종호 작가님이 계시긴 하지만, 공포영화 시나리오를 전문으로 쓰는 작가들이 없다는 것. 그거다.
이종호_작가들도 장르에 대한 감각을 꾸준히 익혀야 한다. 그런데 한해 2~3편 나오는 공포영화를 위해서, 투자가 안 될지도 모르는 작품을 위해서 꾸준히 시나리오를 쓸 작가는 없다. 또 외국의 공포영화 팬들은 공포영화를 오락의 대상으로 즐긴다. 그런데 우리나라 관객은 공포영화에서 드라마를 중시한다. 드라마가 없으면 영화 자체에 못 빠져든다. 그런데 필연적으로 드라마가 강하면 공포가 죽는다. 드라마와 공포가 양립할 수 있는 구조는 반전이 있는 미스터리인데, 반전 드라마의 단점은 한번 써먹은 이야기는 다시 못 써먹는다는 점이다. <식스센스>처럼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를 얻어내기가 정말 힘들다. 그런데 그것과 조금만 비슷한 드라마를 쓰면 비판의 칼날이 쑥 들어온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고 하는데, 관객이 공포영화만큼은 늘 새롭길 바란다.
안병기_관객 탓할 것도 없다. 투자자, 제작자, 관객이 있으면, 제작자는 관객이 원하는 이야기를 만들고 투자자는 거기에 투자를 한다. 공포영화는 희한한 게 투자자들이 과거의 것을 답습하려는 경향이 심하다. 요즘 캠핑족이 늘어났으니 <13일의 금요일>류의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하면, 투자자는 ‘이게 될까요? 여태껏 귀신이 나오는 영화가 안정적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겼는데’ 이런 식이다. 제작자가 자기 돈이 없는 이상 영화 만들기 힘든 구조다. 언론의 문제도 있다. 군대 가기 싫어서 방위 간 사람인데, 내가 장군도 아니고 별 받으려고 영화 만드나. 직업군인도 아니고 진급하기도 싫다. <가위> 때도 내 영화엔 별점 주지 말라고 했었다. 기본적으로 공포영화에 대한 평이 굉장히 공격적이다.
이종호_<소녀괴담>도 언론시사 하기 전에 악평이 쏟아졌다. 식상한 괴담을 지금 다시 꺼내서 어떻게 하나, 안 봐도 뻔하다,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평론가들에게 평이 좋았던 공포영화들, <기담> <불신지옥> <소름> 같은 영화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를 진지하게 보려는 관객은 공포영화를 좋아하지 않고 많이 보지도 않는다. 제작하는 입장에선 관객의 눈높이에서 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나.
안병기_물론 감독이 영화 못 만들어서 악평받을 수 있다. 최근에 중국 언론과 인터뷰하면 홍보용 문구로 ‘아시아 공포영화의 거장’이란 표현을 쓴다. 제발 그런 표현 쓰지 말라고 한다. 나는 그저 공포영화를 많이 만든 감독, 딱 그 정도의 평이 맞다고 생각한다. 운이 좋아서 여태껏 공포영화를 계속 만들어왔다. 그런데 한번쯤은 투자자나 시장 생각 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순수한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다. 그래야 새로운 것이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전에는 100만 관객이 넘는 공포영화가 있었는데 요즘에는 왜 없냐고들 하는데, 귀신으로는 다 해먹었기 때문이다. 귀신영화는 끝났다. 새로운 이야기로 가야 한다.
이종호_<소녀괴담>의 경우, 공포영화 관객만 보고 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고 만든 영화다. 그래서 공포에 로맨스와 코미디를 넣었다. <소녀괴담>을 재밌게 본 사람들은 공포영화를 평소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은 영화 보고 욕하더라.
안병기_공포영화의 다양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우리는 공포영화를 작은 장르로만 생각한다. 이종호 작가님이 고스트픽쳐스 차린다고 했을 때 그런 다양성을 기대했다. 단편이든 중편이든 장편이든 작가와 감독의 색깔이 묻어 있는 순수한 공포영화 시장도 있어야 한다. 작게 개봉해서 길게 가는. 그런 과정과 시도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종호 작가님을 믿었는데 공포영화의 주류로 진입하시더라. (웃음)
이종호_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어쨌든 제작한 두편의 영화에서 새로운 시도를 했고,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제작자로서, 작가로서 얻은 게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안병기_투자환경은 멜로건, 스릴러건, 공포건 장르 불문하고 비슷하다. 지금까지 7편의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한국영화 평균 제작비가 25억원일 때 30억원짜리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저예산 공포영화가 아니었다. 시나리오가 좀 안 좋아도 두번, 세번 대박을 낸 감독이니까 투자자 입장에서도 리스크를 안고 투자를 했다. 투자자 탓할 것이 아니다. 내가 영화를 너무 못 만들었다. 영화가 잘되면서 스스로 건방져졌다. 마찬가지로, 배우들이 공포영화 출연 안 한다고 배우 탓할 것도 없다. 시나리오가 좋으면 달려들어서 하려고 한다. 결국 제작자나 감독을 탓해야 한다. ‘올해 라인업에 공포영화가 없네, 그런데 예산은 남았네, 손해는 안 볼 것 같으니 저예산으로 만들어보자.’ 그렇게 제작되는 기획 공포영화가 너무 많다.
이종호_안 감독님은 투자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영화를 만들었지만 나는 입장이 조금 다르다. 시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공포영화 전문 제작사를 차렸다. 투자자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두개의 달> 때만 해도 이제 공포영화는 안 된다는 인식이 투자자들 사이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포인트로 잡은 건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저예산 공포영화였다. 공포영화의 큰 장점 중 하나는 마케팅 과정에서 주목받기가 쉽다는 점이다. 공포영화는 무섭다는 소문만 돌면 된다. (웃음) 무서운 장면 단 하나, 그것만 있으면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
안병기_사람들이 여름이면 팥빙수를 먹듯 여름이면 공포영화를 찾아 본다.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는 시장에서 우리가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계속해서 얘기하지만, 공포영화를 사랑하는 감독들이 한국에 없다. <프렌치 커넥션>을 만든 감독(윌리엄 프리드킨)이 <엑소시스트>를 찍고, <오멘> 만든 감독(리처드 도너)이 <슈퍼맨>을 찍었다. 그런 감독들이 한국에서도 나와야 한다.
이종호_고스트픽쳐스 앞으로 공포영화 시나리오들이 꽤 들어온다. 그런데 공포 장르는 유난히 프로 작가와 아마추어 작가의 시나리오 수준 차이가 크다. 그만큼 공포영화 작가층이 얇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공포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것은 관객이 찾기 때문이다. 이것이 큰 희망이고 용기다. (<소녀괴담>으로) 욕을 많이 먹고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계속 주어진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안병기_작가님이 먹은 욕은 욕도 아니다. 솔직히 나 같은 감독이 어떻게 한국 공포영화를 진단하겠나. 나만 잘하면 되지. (웃음) 사람들이 이렇게도 얘기한다. <아파트>로 말아먹고, <과속스캔들> <써니>로 돈 벌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공포영화 만들어 영화 망쳤다고. 맞다. 여태껏 속물처럼 시장에 맞춰가는 작품을 했다. 그런데 이제는 망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영화를 하고 싶다. 대표작을 하나 만들고 싶다. 그런데 이종호 작가님은 아직은 그러시면 안 된다.
이종호_이제 두 작품을 제작했다. 시작하는 단계니까 다양한 영화적 시도를 해보고 싶다. 공포영화를 오랫동안 제작하고 싶다. 1년에 3편쯤 공포영화 제작하는 게 고스트픽쳐스의 목표다.
안병기_재밌는 게, <필선>이 중국에서 흥행을 하니까 메일함이 넘칠 정도로 중국 시나리오가 많이 들어온다. 그런데 패턴이 한국하고 똑같다. 한국에서 공포영화 4편 하다가 코미디영화 제작하지 않았나. 중국에서도 <필선> 시리즈로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니까 중국 영화인들이 <써니> 같은 영화를 만들자고 제안한다.
이종호_중국에선 드라마 있는 공포영화를 좋아하나?
안병기_좋아한다. 중국인들이 한국 공포영화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작품이 <분신사바>다. 그거 보고 운다. 모성애 코드 때문에. 결론은 진정성을 가진 좋은 시나리오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거다.
이종호_어느 순간 갑자기 좋은 작품이 나오기는 힘들다. 게다가 ‘어쩌다’ 한 작품 잘되는 건 의미가 없다. 꾸준히 공포영화들이 만들어지면 전체적인 수준도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 한국 공포영화의 미래도 밝지 않을까 싶다.
안병기_변명은 필요 없고, 우리가 좋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