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에선 한 뭉텅이의 명함이 쏟아졌고, 입에선 속사포 랩과 다를 바 없는 대구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명함을 뭘로 드릴까요? 영화계 명함도 있고, 아닌 것도 있고. 국숫집 명함 하나 드릴까? 만복국수가 현업입니다. 그들(아마도 박근혜 정부)이 ‘시장으로 가라’ 해서 시장으로 갔고, 잘 벌고 있습니다.” 국숫집 사장님으로부터 명함을 받고서야 독립과 가난, 두 단어가 꼭 쌍으로 붙어다니라는 법은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대구 동성아트홀, 예술영화전용관 지원사업에서 탈락하다
“망하니까 (날) 찾네.” 면목 없지만 그의 말이 맞다. 남태우 대구동성아트홀 프로그래머는 최근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나는 친박이다-시즌3> 32회 ‘문성근의 민주집권 대망론’ 편에서, 대구 동성아트홀에서 6개월째 월급을 못 받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형편이 걱정됐다. 악덕 극장주가 돈을 떼먹어서가 아니다. 동성아트홀이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의 ‘2014년 예술영화전용관 운영 지원 사업’ 심사에서 탈락하면서 극장의 경영난이 심각해졌기 때문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다. 상반기에 진행됐어야 할 심사가 재공모로 인해 하반기로 늦춰졌고, 9월1일 발표된 심사 결과에선 지역에서 활발하게 독립•예술영화 프로그램을 운영해온 대구 동성아트홀과 대전 아트시네마의 이름이 빠졌다. 대신 롯데시네마 5개관이 수혜자로 새로 이름을 올렸다. 지원을 받게 된 극장 수도 지난해 25곳에서 올해 20곳으로 줄었다. 문제는 심사위원, 심사기준, 탈락 및 선정의 이유 등 그 어느 것도 투명하고 명확하게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전과 대구를 날릴 줄은 몰랐다. 동성아트홀은 광주극장과 함께 영진위가 대표적 모범사례로 드는 예술영화전용관이었다. 지난해 하반기엔 극장 운영 잘했다고 영진위로부터 인센티브도 받았으니 이번 결과가 더 의심스럽다.” 그는 “영진위의 지원을 포함해 한해 1억원도 되지 않는 비용으로 수백편의 영화를 상영하며 적자를 보지 않는 구조를 가진 극장이 21세기 대한민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성인영화전용관으로, 제한상영관으로 운영됐던 대구의 단관극장이 예술영화전용관으로 거듭난 건 2004년 9월의 일이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 사무국장이자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였던 남태우 프로그래머는 안정적으로 시네마테크의 기획전을 상영할 수 있는 공간을 물색하다 동성아트홀을 만났다. 동성아트홀의 배사흠 대표에게 예술영화전용관으로의 용도 변경을 제안했고, 그에겐 동성아트홀 프로그래머라는 직함이 새로이 생겼다. 동성아트홀의 10년은 “지역 시네마테크와 지역 극장이 모범적으로 협력한 사례”로 인정받기 충분했다. “너희(아마도 신자유주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박근혜 정부)들보다 돈을 모르는 게 아니다”라고 당당히 말할 만큼 그는 수완도 좋고 아이디어도 많은 사람이다. 계명대학교 연극영화과 학생들에게 영화를 가르치던 2000년대 중반엔 매 학기 학생들에게 독립영화 및 예술영화 1편씩을 보고 리포트를 제출하게 했다. 학생들은 대구 유일의 독립예술영화관인 동성아트홀에 영화를 보러 갔다(정확히는, 보러 갈 수밖에 없었다). 선생으로서의 역할도 충실히 수행하면서 극장프로그래머로서의 실리도 챙기는 일거양득의 아이디어였다. 프로그래머로서의 전권을 가진 그는 독립영화가 1편이라도 더 소개될 수 있도록, 무지하게 많은 영화들을 극장에 걸었다. “서울아트시네마가 1년에 300편의 영화를 튼다면 우리는 200편 정도를 튼다.” 열혈 프로그래머는 열혈 관객을 낳았다. <워낭소리>가 개봉했을 때, 하루 6회 상영회차 중 4회를 <워낭소리>로 채우자 “여기가 무슨 <워낭소리> 전용관이냐”는 비판을 관객으로부터 들어야 했다. “극장과 시네마테크, 관객. 3자가 운영하는 극장이라는 의미에서 우리는 관객의 요구를 거의 일일이 수용했다.”
전주, 부산과 대구는 다르지
대구•경북 지역에서 영화하는 사람치고 남태우 프로그래머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80년대 대구•경북 지역에서 학생운동했던 사람치고 그를 모르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이다. 사실 남태우 프로그래머는 뒤늦게 영화를 만났다. 그의 영화 입문기를 듣기 위해선 동성아트홀의 부침 많은 역사보다 더 파란만장했던 그의 청춘기를 통과해야 한다. “<여명의 눈동자> 같았던 20대”의 시간이 그를 페이소스 짙은 광대 같은 투사로 만들었다. 영남대학교 경영학과 85학번인 그의 대학생활은 시위하고 뒤풀이 사회 보는 일의 반복이었다. 대학 4학년이던 1988년 11월11일엔, 학생운동으로 점철된 대학생활을 “화려하게 마무리”짓기 위해 ‘전두환 생가 방화’ 계획을 실행에 옮긴다.
“11일 하오 2시10분쯤 경남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 전두환 전 대통령 생가인 초가 3채에 대구지역 대학생 6명이 화염병을 던져 지붕을 반소시키고 1시간20분 만인 3시30분쯤 긴급출동한 소방차 5대와 주민, 경찰 등 200여명에 의해 진화됐다. (중략) 경찰은 이들로부터 ‘우리는 왜 전두환 생가를 응징하는가’라는 제목의 8절지 크기 유인물 50장을 압수했는데… (중략) 경찰은 이들 대학생 6명을 현장에서 모두 검거, 현주건조물방화와 특수공무집행방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구속된 학생은 다음과 같다. 조XX, 이XX, 이XX, 남태우, 최XX, 원XX.”(1988년 11월12일 <경향신문> 기사에서 발췌)
같은 해 12월21일, 노태우 정부는 시국•공안사범 200여명을 대거 사면•복권시켰고 그도 진주교도소에서의 생활을 한달 남짓 만에 정리한다. 1989년부터 3년간은 주민등록을 말소하고 포항에서 노동운동에 전념했고, 군 제대 뒤, 아직 영화에 입문하기 전엔 방송일에도 잠시 흥미를 가졌다. “더이상 대자보 붙여선 답이 없다”고 생각했고, 어쩌면 매스미디어에서 답을 구할 수도 있을거라는 판단을 했다. 상경해서 조연출 일도 하고, 개그맨 시험도 보고, 코미디 작가 모집에도 응시했다. 하지만 시대를 지나치게 앞서간 그의 정치 풍자 코미디를 알아봐주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대구로 리턴. 1999년, 언론개혁을 외치며 <JUST 2000>이라는 인터넷 신문을 펴냈지만 언론사는 롱런하지 못했다. 영화, 정확히는 독립영화와의 직접적 조우는 21세기에 이루어진다. 대구경북독립영화협회를 만든 후배들이 손을 내밀었다. 대구단편영화제 사무국장으로, 대구경북시네마테크 대표로 그는 2000년대 초반을 바쁘게 보냈다.
그는 지금까지 “일관된 길을 걸어왔다”고 주장한다. “다수가 행복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두고 다양한 형태로 대중과 소통하려 했다. 데모도, 인터넷 신문도, 방송도, 영화도, 연기도, 지금의 팟캐스트도 그 과정에서 진행한 일이다.” 현재는 영화로 소통하는 일에 힘을 싣고 있다. 특히 독립영화의 상영•배급 사업과 관련해서 그는 좋은 아이디어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극장 프로그래머로서뿐만이 아니라 독립영화의 상영 기회 확대를 위해 힘써온 사람으로서 그는 말한다. “경상북도만 놓고 봐도, 채산성이 없으니 군 단위에 멀티플렉스가 못 들어온다. 그런데 USB만 있으면 면사무소, 문화예술회관, 하물며 장터에서도 얼마든지 독립영화를 틀 수 있다. 팔 곳도 많고.” 지역사회와의 연계는 그래서 중요하다. 그는 대구시가 뮤지컬 사업에 투자할 돈의 반의 반의 반만이라도 독립예술영화전용관에 지원한다면 대구가 “독립영화의 메카”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시에서 최소한의 지원만 해도 숨통이 트일 텐데. 대구시에 ‘대구를 한국의 선댄스로 만들어라, 한국의 클레르몽 페랑으로 만들어라’ 아무리 얘기해도 ‘영화는 부산에서도 하고, 전주에서도 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 영화가 그 영화가 아닌데.”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다!
팟캐스트 <나는 친박이다> <남태우의 뉴스 디스크>의 진행자답게, 그는 독립단편영화들이 팟캐스트를 활용할 필요도 있다고 말한다. “정치 분야 팟캐스트의 경우 보수들의 방송은 전멸이지 않나. 정치적으로 팟캐스트를 듣는 사람과 독립영화를 즐기는 사람들의 접점이 있다. 그런데 정치적으로는 진보적인 사람도 문화쪽으로 가면 결국 자본에 다 포위돼 있다. 5년짜리 정권, 10년짜리정권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결국 문화로 시작해 문화로 끝을 내야 한다. 실제로 팟캐스트에 단편영화 올려서 다운 받아보라고 하면 몇 만건 다운로드가 기록된다.” 독립영화의 배급 활로를 다양하게 찾아야 한다는 얘기다. “책상 서랍 속에 고이 모셔두는 영화”, “사장되는 영화”가 너무 많다고 그는 아쉬워했다.
다시 돌아가, 남태우 프로그래머의 형편을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에게 독립영화는 여전히 가능성의 세계다. 물론 동성아트홀의 미래는 밝지 않을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당장 2014년부터 영진위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대전, 부산, 거제, 안동의 예술영화전용관들, 그들의 미래도 불투명할 것이다. 남태우 프로그래머는 “각 극장이 처한 상황이 너무 달라 아직은 공동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가만 있는 사람을 또 투사로 만든다”고 투덜거렸다. 그 불평 섞인 목소리엔 당연히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투박한 질감의 대구 사투리로 말했다. “계란을 여러 바구니에 나눠 놓았기 때문에 나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 극장이 망해도 나는 안 죽는다.” (극장이 진짜로 망하기 전에 힘을 모아야겠지만) 이런 게 원래 인디 정신이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