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어떻게 관객을 모을까, 마케팅에 눈뜰 때다
2014-10-09
글 : 윤혜지
사진 : 최성열
이송희일 감독

“컨셉이 ‘독립영화의 조상을 찾아서’인가? 이런 인터뷰를 하려면 머리 희끗한 그런 사람을 찾아가야지 이렇게 젊은 날 찾아오면 어떡하나. 내가 비록 머리는 하얗지만 이거 조금 버텼다고 벌써부터 원로 취급이라니 억울하다.” 포장이 거창하다며 투덜댔지만, 이송희일 감독이 지금껏 밟아온 길이 한국의 독립극영화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독립영화 창작자 인터뷰를 하는데 “왜 또” 자신을 찾아왔느냐는 타박 아닌 타박의 한편엔 쓸쓸함도 묻어 있다. “외롭고 지겹다. 처음 나와 같이 영화 시작했던 친구들은 대부분 독립영화를 떠났다. 영화감독이 영화를 만들지 않는다는 건 결국 자기증명을 놓아버린 게 아니겠나. 젊은 감독들은 많지만 남아 있는 또래 감독이 이젠 거의 없다.” 그의 말대로 십여년 이상 독립영화 한길만을 오롯이 걸어온 창작자를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송희일 감독이 소속돼 있던 영화창작집단 ‘젊은영화’의 구성원들 중에서도 이송희일 감독이 가장 늦게 영화 연출을 시작했는데 지금은 그만 남아 독립영화진영을 지키고 있다. 누군가 다른 이를 추천해달라는 말에 이송희일 감독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 익숙한 이름만을 몇 차례 곱씹고 만다. “극영화쪽에서 오래 남아 있는 감독은 별로 없다. 나도 그렇고 다들 엇비슷한 민주화운동 끝물 세대다. 아마 우리가 독립영화에 끌린 것도 독립영화가 지닌 저항정신과 문화운동적 성격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런 면에서 나는 나대로 창작집단을 만들어서 활동했다.”

쉽게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세상이 되었지만

서울영화집단, 장산곶매 등 1980년대부터 이어져온 영화창작집단의 영향은 90년대 들어서며 조금 더 활발해졌다. 김용균, 정지우, 임필성, 박찬옥 감독 등이 소속돼 있던 ‘영화제작소 청년’이 있었고 김동원, 김태일, 오정훈 감독의 ‘푸른영상’은 독립다큐멘터리 진영에서 두드러졌다. 또 김정구, 유하 감독 등의 ‘지하창작집단 파적’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집단이 이송희일 감독이 몸담은 ‘젊은영화’였다. 영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이송희일 감독은 1994년, 책 두권, 팬티 두장만을 들고 무작정 고향 익산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신촌에 머물던 그는 독립영화워크숍 10기로 들어가 영화를 배웠고 1995년, 그곳에서 만난 김성숙, 고은기, 박경목, 김규철, 채기 감독 등과 함께 영화창작집단 ‘젊은영화’를 결성한다. “좋은 영화와 16mm 영사기 들고 전국 영화과부터 시작해 각지의 대학가, 공장 등을 다니면서 상영회를 열자는 계획도 있었다. 고다르처럼 말이다. 아무도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우리에겐 그때 그런 게 필요했다. 그런 세계관으로 다 같이 영화 작업을 하는 것 자체가 매력적이고 낭만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상영을 하려니 상영작이 턱없이 모자라 ‘젊은영화’의 감독들은 직접 영화를 연출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나 작품 연출은 거듭 미뤄지고, 엉망이 되어버린 생활패턴에 건강도 나빠진 데다 고향에서 고생하는 홀어머니마저 눈에 밟혀 결국 이송희일 감독은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고 만다. 1년쯤 고향에서 느긋하게 지낸 감독은 생계를 외면할 수 없어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동성애자 인권연대 ‘친구사이’를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이다. 수시로 드나들며 얼굴 도장을 찍다가 1998년, “아르바이트 퇴직금 600만원을 털어” 첫 단편영화 <언제나 일요일같이>를 연출했다. 이듬해 만든 두 번째 연출작 <슈가 힐>은 그해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에서 대상까지 수상했다. 김일권 프로듀서와 만나 작업한 <굿로맨스> 등 이후의 단편연출작들이 좋은 평가를 받으며 이송희일 감독은 독립 영화계의 스타감독 중 한명으로 자리매김했다.

90년대 후반 들어서며 독립영화 진영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필름이 사라져가고, 디지털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영화 제작 자체가 한층 쉬워진 것이다. “당시 십만원영화제가 있었을 정도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좋아졌다. 2000년대 이전에는 장편영화를 만든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다. 디지털로 바뀐 뒤엔 필름을 안 써도 되니까 제작비가 엄청나게 줄어들었고, 장비마저 가벼워져서 움직이기 편해진 덕에 적은 지원으로도 손쉽게 장편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됐다. 그전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심지어 관객까지 제법 불러모았다. 김조광수 대표의 청년필름에서 제작한 <후회하지 않아>는 청년필름이 최초로 제작한 독립영화이자 그 당시까지는 청년필름의 제작비 대비 최고 흥행작이기도 했다. “독립 장편다큐멘터리야 일찍부터 있었지만 극장 개봉까지 한 독립 장편영화는 거의 없을 때였다. 처음엔 (김조)광수 형이 제작비 1억원을 못 구해 대표로서 책임지고 그만두겠다고까지 말했다. 어쨌든 영화는 만들어졌고, 무려 5만 관객이나 모으지 않았나. 독립영화인들이 이제 극장에서 관객을 만난다는 꿈을 꾸게 된 거다.”

포스터 한장이라도 ‘제대로 붙여야’

하지만 문제는 “그때나 지금이나 하나 변한 것이 없는, 재생산이 힘든 구조”라고 이송희일 감독은 못 박았다. 그나마 자신은 일찍 영화를 시작한 덕에 지금의 후배 감독들보다는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거라고도 덧붙였다. “다 나보다는 안 좋은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나 역시 월세를 제때 못 낼 때가 많다. 내가 이 정도인데 후배 감독들 사정이야 안 봐도 알지. 요즘은 1천만원만 있어도 투자사 간섭 없이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대다. 그런데 만들어놓으면 뭐하나. 구경꾼이 없다. 비단 극장만의 문제가 아니다. 특별히 때를 잘 맞추지 않으면 관객이 보러 오지 않는다. 대형 스타도, 마케팅비도 없는 독립영화는 구경꾼 모으는 게 쉽지 않다. 이러니 겨우 2, 3년에 한편 터질까 말까다. 뭘 할 수 있을까. 십몇년을 해도 이렇게 어려운데.” 그는 일본 독립영화의 본산, 이미지포럼을 예로 들었다. “이미지포럼엔 관객이 꽉꽉 차 있다. 참 보기 좋다. 그런데 불을 켜는 순간 놀란다. 왜냐고? 관객이 전부 할아버지, 할머니거든. 전공투 세대의 향수만 남았고 젊은이들은 독립영화를 보러 다니지 않는다는 거다.” 감독은 독립영화 마케팅에 대한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지원금을 달라는 얘기가 아니라 “스타도 없고, 관객이 내용을 파악하기 쉽지 않은 독립영화는 극장에 포스터 한장만이라도 제대로 붙여주는 것이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요지다. “영화도 괜찮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참여한 사람들도 뛰어났는데 마케팅에 무심해서 잘 안된 모 영화의 사례가 참 안타깝더라. 관객에게 노출만 좀더 되었어도 훨씬 큰 스코어가 나왔을 텐데.”

말 나온 김에 GV에 대한 고충까지 따라붙었다. “요샌 GV가 독립영화의 당연한 옵션처럼 변질됐다. 내가 <후회하지 않아> 때부터 GV를 다녔는데 그때는 GV를 50번은 다닌 것 같다. (웃음) 그런데 그건 GV할 때마다 매진이니까 신나서 다닌 거였다. 요즘도 GV를 하는 때와 안 하는 때의 좌석점유율 차이가 굉장히 크다. 안 할 수가 없는 거지. 관객을 만나는 건 물론 좋지만 거듭해서 같은 얘기를 하는 것도 지칠 수밖에 없다. 시장의 불안을 견뎌보려고 만들어진 독립영화 나름의 문화라고 해석해야 하나.”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지만, 이번에도 이송희일 감독은 “다음 작품은 퀴어영화를 만들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별것도 없는데 퀴어영화 한다고 하면 같이 하자던 배우들이 슬금슬금 빠져나간다. 내친김에 다음 작품은 퀴어 말고 관객 좀 들 만한 걸로 만들어볼까 한다. 어제는 인디포럼 작가들과 술 마시면서 우리 인디포럼도 독립영화도 없애버리자고 그랬다. 다같이 상업영화하러 떠나자고, 먹고 살 길 좀 적극적으로 개척해보자고. … 아휴, 방에 콕 박혀 시나리오만 쓰면서 우아하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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