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검열 의지는 전혀 없다.” 지난 2월9일 국회에서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업무보고가 열렸다. 영화제 상영작 등급분류 면제추천 개정,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과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의 폐지 등 최근 논란이 일고 있는 사태들이 검열을 위한 목적이 아니냐는 야당 의원들의 질문 공세에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 김세훈 위원장은 “행정 시스템 오류로 인해 등급분류 면제추천이 오•남용되는 사례를 바로잡으려는 것일 뿐”이라고 검열이 사실이 아님을 거듭 강조했다. 김 위원장이 얘기한 행정 시스템 오류란, “등급분류 면제추천은 예술영화 인정 등에 관한 심의 소위원회에서 영화 상영 여부를 결정하고, 결재 과정에서 부장이 위원장 직인을 전결하는 형태로 발급된다. 신청서가 잘못 들어오거나 행사 추천 요건에 맞지 않는 경우도 직인으로 자동 발급되고 있어 그걸 바로잡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국회에서 행정 시스템 오류로 인한 사례를 내놓지 못했다. 국회 업무보고 다음날인 2월10일 오후, 충무로에서 부산, 전주, 제천, 여성, 정동진, 서울독립영화제, 인디다큐페스티발 집행위원장과 비공식 간담회를 가진 김세훈 위원장은 “자동 면제추천 조항을 삭제하겠다는 게 아니라 심사 없이 면제추천할 수 있는 4개 조항의 문구를 수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4개 조항 문구를 수정한다면 가령 이런 식이다. ‘영화상영등급분류 면제추천을 받은 적이 있으며 3회 연속 개최된 영화제’라는 첫 번째 조항은 현재 열리는 영화제 대부분에 해당되는 사항이니 ‘영화상영등급분류 면제추천을 받은 적이 있으며’ 같은 문구를 손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수정하기 전에 영화계와 충분한 상의를 하겠다”고 얘기했다고 하니 “등급분류 면제추천의 소관부서를 기존의 ‘예술영화 인정 등에 관한 심의 소위원회’에서 9인 위원회로 바꾸고, 심사 없이 면제추천할 수 있는 4개 조항을 삭제하려고 한다”(<씨네21> 992호 국내뉴스 ‘거꾸로 가는 영진위’)라는 자신의 말에서 한 발짝 물러선 셈이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아마도 그는 모든 영화제를 적으로 삼기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판단했을 거고, 작은 상영회 위주로 심사를 엄격하게 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 것으로 보인다. 등급분류 면제추천을 개정하는 것이든, 면제추천할 수 있는 조항의 문구 일부를 수정하는 것이든, 여전히 어떤 영화는 상영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검열의 불씨가 완전히 사그라지지 않은 건 분명하다
김세훈 신임 영진위 체제는 조희문 2기?
새해부터 지금까지 서병수 부산시장의 부산국제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 사퇴 권고와 ‘영진위발 검열 광풍’이 연일 휘몰아치고 있다.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영진위의 정책은 크게 두 가지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하나가 영화제 상영작 등급분류 면제추천 개정과 관련한 움직임이고, 또 하나가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과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의 폐지다. <씨네21> 990호 한국영화 블랙박스‘누구 눈치를 보는 건가’(원승환)와 991호 국내뉴스 ‘추천 혹은 검열’에서 이미 보도된 대로, 등급분류 면제추천 개정은 영화제 상영작을 일일이 파악함으로써 “영화를 선별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또 <씨네21> 990호 국내뉴스 ‘선택과 집중이라는 미명’에서 보도된 대로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과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이 폐지되면 영진위가 지원하는 26편 이외 영화들의 유통 기회가 박탈될 가능성이 크다(자세한 내용은 62쪽 ‘입맛에 맞는 영화만 지원하겠다?’를 참조할 것). 영진위는 ‘선택과 집중’을 통해 예술영화 유통 활성화를 꾀하겠다는 의도로 꺼낸 정책이라고 하지만, 영화계는 “지원금을 앞세워 배급(유통)을 통제함으로써 정권의 마음에 들지 않는 영화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려는 목적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했다. 어쨌거나 결과적으로 영진위가 검열과 배급 통제, 두 가지를 무기 삼아 영화계를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가 됐다.
그런데 <다이빙벨> 같은 특정 영화가 영진위 지원작 선정에서 배제되는 게 가능한 일일까. 최근 다른 문화예술 분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봐도 결코 비현실적인 얘기가 아니다. 지난 1월21일 공개된 ‘2015년 세종도서 선정사업 추진방향’이라는 문건에 따르면, 문학 분야 우수도서의 선정 기준에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순수문학 작품’과 ‘인문학 등 지식 정보화 시대에 부응하며, 국가경쟁력 강화에 기여하는 도서’라는 항목 두 가지가 새로 추가됐다. 이에 대해 문학계와 출판계는 진흥 사업을 빌미로 표현의 자유를 통제하려는 시도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소설가 황석영은 “저술에 관한 지식인의 사회적 기능은 비판에 있다. 그런 비판적 기능이 있어야 사회가 나아갈 수 있다”며 “국가경쟁력 강화라든가 특정 이념에 치우치지 말아야 한다는 건 시스템을 옹호해달라는 건데, 비판적 기능을 거부하는 건 전체주의적 발상”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최근 영화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태들을 바라보면서 많은 영화인들은 “김세훈 위원장이 선임되면서 우려했던 일들이 결국 터졌다”고 입을 모은다. 잘 알려진 대로 김세훈 위원장은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학과 교수였고, 박근혜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김광두 교수가 원장을 맡고 있는 국가미래연구원 연구위원 출신이다. 곧 영진위 부위원장으로 선출될 거라는 얘기가 도는 김종국 비상임위원 역시 뉴라이트 계열인 한국문화미래포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한 바 있다. 그가 주도한 (사)시민영상문화기구는 조희문 영진위 전 위원장이 재임했던 2010년 영상미디어센터 운용자 특혜 시비에 휘말린 적 있다. 지난 2월5일 영진위 제1차 정기위원회에서 임명된 박환문 신임 사무국장은 지난 대선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문화가 있는 삶 추진단’에서 김세훈 위원장과 함께 추진위원으로 활동한 바있다.
영화 경력이 전혀 없는 그가 영화 진흥 사업을 구상하고 실행하는 영진위 사무국장이 된 것을 두고 말들이 무성하다. 김의석 전 위원장 체제 때 영화계의 추천을 받아 임명된 김인수 사무국장이 지난해 8월 임기가 끝난 뒤 새로 연장해 불과 얼마 전까지 영진위 살림을 무리 없이 꾸려왔기 때문이다. 김세훈 위원장은 김인수 전 사무국장의 수행을 받아 영화계 여러 행사를 다니고, 원로 영화인들과 만나 “잘해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윗선’으로부터 사무국장 교체 오더를 받고 태도가 돌변한 것이다. 김세훈 위원장 체제의 영진위를 두고 영화인들이 “조희문 2기”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위원장, 부위원장, 사무국장 모두 뉴라이트 계열로 꾸려져” 파행으로 치달았던 조희문 시절의 영진위가 다시 재현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다.
그럼에도 선임된 지 불과 한달밖에 지나지 않은 김세훈 위원장이 등급분류 면제추천 개정,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과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의 폐지 같은 굵직한 사안 두 가지부터 급하게 처리하려는 건 의문이다. 상식적으로 지금은 업무를 파악하고, 조직을 개편하고, 영화계 여러 구성원을 만나는 게 우선이 아닌가. 그런데 영진위는 “앞의 두 가지 사안이 이미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던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계 안팎에서는 “윗선이 김세훈 위원장을 앞세워 영화계 길들이기에 이미 개입한 게 아닌가”라고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한 영화인은 “현재 정권에 독립영화는 곧 좌파영화이자 (국가에 대한) 전복영화이다. 그래서 정권은 표현의 자유를 제한해 검열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서병수 부산시장이 <다이빙벨>(감독 이상호•안해룡, 2014) 상영이 부산영화제 이용관 집행위원장에 대한 사퇴 권고의 직접적인 사유임을 자인했고, 역시 ‘2015 으랏차차 독립영화’ 상영 전에 상영될 예정이었던 김선 감독의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이하 <자가당착>)가 상영등급을 분류받지 못하면서 등급분류 면제추천 개정과 관련한 움직임이 벌어진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은가”라고 덧붙였다. 한 제작자 역시 “<천안함 프로젝트>(감독 백승우, 2013)나 <다이빙벨> 같은 작품들 때문에 현재 정권이 보기에 영화계는 컨트롤이 안 되는 대표적인 집단인 거다.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 때문에 전주국제영화제를 엄청 흔든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영진위는 정권의 아바타다. 1차관이 인사 발령이 나면 새로 온 그들이 표현의 자유 제한을 비롯해 영화계 길들이기 작업을 진두지휘할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용산참사 소재 <소수의견>은 왜 개봉하지 못하나
불합리한 규제를 철폐하고 문화를 융성하는 것을 정부 기조로 삼은 박근혜 정권에서 불고 있는 ‘검열의 광풍’은 아이러니하다. 동시에 어디선가 본 풍경이다. 지난 2012년 당시 민주통합당 정청래 의원이 공개한 ‘문화권력 균형화 전략’ 문건이 그것이다. 그 문건의 ‘좌파세력에 대한 정부지원금 평가 및 재조정’이라는 항목에 따르면, “문화부 및 기재부의 엄격한 사업결과평가를 통해 2009년도부터 좌파단체 지원 예산을 근절”이라고 적혀 있는데, 이것은 최근의 예술영화전용관 운영지원 사업과 다양성영화 개봉지원 사업의 폐지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윗선에서 영화계 길들이기 작업을 지시한 게 사실이라면 저 문건을 토대로 했을 가능성도 높다.
검열과 지원 예산 근절을 통해 표현의 자유를 침해당하고 있는 독립영화계, 영화제와 달리 CJ, 롯데, 쇼박스, NEW 4대 메이저 투자배급사들은 “알아서 몸을 사리는 분위기”다. 자사 라인업을 편성할 때 정권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지난 2013년 여름, <감기>는 개봉 직전 배급사를 기존의 CJ엔터테인먼트에서 영화의 제작사 아이러브시네마로 바꾼 적 있다. “<감기>가 100억원 이상의 제작비가 투입된 대형 프로젝트이다 보니 제작사로서는 CJ가 배급하는 <설국열차> 흥행이 <감기>의 스크린 확보에 영향을 끼칠까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게 공식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당시 구속 기소된 이재현 CJ그룹 회장과 관련해 “그룹 안팎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정(치)권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목적”이라는 목소리도 있었다. <감기>에는 분당국회의원을 비롯해 정부 수뇌들이 어리석은 행동을 하고, 미국과 전시작전권 문제로 갈등을 빚는 장면을 포함하고 있었다.
한편,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손아람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화로 만든 <소수의견>(배급 CJ엔터테인먼트) 역시 <변호인>(2013)보다 더 빨리 촬영을 시작해 후반작업을 이미 끝냈음에도, 그로부터 1년여의 시간이 지나기까지 아직 개봉을 못하고 있다. CJ엔터테인먼트는 “배급 시기를 결정하지 못해 미루고 있는 것일 뿐”이라고 밝혔지만, 검찰이 은폐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법정에서 치열하게 겨루는 영화의 내용이 정권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알아서 몸을 사렸다”는 얘기도 영화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NEW 역시 CJ가 투자 문제를 비롯해 여러 이유로 배급을 포기한 <연평해전>(감독 김학순)을 새로 제작해 올해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이에 대해 한국영화산업전략센터 최현용 소장은 “기업마다 정권에 트집잡힐 만한 아킬레스건이 있다. 4대 메이저 투자배급사 라인업에 정권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이 한두편씩 있는 이유도 알아서 기는 분위기가 이미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 2월11일 상암동에 위치한 CJ E&M센터에서 문화창조융합센터 개소식이 열렸다. CJ를 포함해 SM, YG, JYP, 제일모직, 신세계푸드, 네이버, 다음, 카카오 등 64개 기업이 함께 창작자들의 아이디어를 비즈니스 모델로 만들 수 있게 사업화 단계를 지원하고, 해외 판로 개척도 지원하겠다는 사업이다. 개소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은 “우리 모두 힘을 합쳐서 문화로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어가자”고 말했다. 그가 한 말에서 ‘우리’에 한국영화도 포함되어 있는 것일까. 최근 영화계에서 벌어지는 일들만 보면 그렇지 않은 듯하다. 50개 이상의 한국영화단체들은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표현의 자유 침해와의 전면전을 선포했다. 문화 융성 강국을 꿈꾸는 21세기 대한민국에 다시 검열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