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디오 지브리(이하 지브리)의 간판을 거는 순간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들이 있다. 거대한 환상, 푸근한 작화, 모험과 동심,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향수 등. 30년 가까이 지브리 작품을 사랑했던 관객의 기대라 해도 좋겠다. 무엇보다 ‘토토로’의 푹신한 배, ‘포뇨’의 둥그스름한 파도, ‘라퓨타’ 거신병의 완만한 곡선은 오직 지브리만의 것이다. 그 이미지들만으로도 이미 마음의 빗장이 풀린다.
대개 일관된 경향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하기 마련이지만 빼어난 전통은 종종 가능성을 제한하는 딱딱한 틀로 작동하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 지브리는 창작‘집단’이라기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동의어처럼 인식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상상력이 워낙 빼어나고 넓은 까닭에 그 한계를 넘으려는 시도는 드물었다. 간혹 있었던 시도도 이런저런 이유로 번번이 좌절됐다. 이것은 스튜디오의 생명력 문제다. 후계자를 양성하지 못하는 한 1세대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가 펜을 놓는 순간 지브리도 멈출 수밖에 없다. 그런 줄 알았다.
미야자키 없는 최초의 지브리 애니
“세상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의 고리가 있어. 안쪽과 바깥쪽. 나는 바깥의 인간이야.” 겉보기엔 평범한 12살 소녀 안나는 스스로 바깥의 인간이라 믿으며 세상과 벽을 쌓는다. 겁에 질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침묵하거나 가시를 세우거나. 안나는 자신의 껍질 안쪽으로 들어오려는 이들에게 공격적인 언사를 내뱉고 그때마다 자기혐오를 더해간다. 소녀는 왜 그토록 자신을 부정하고 세상을 믿지 못하는 걸까. 영화 중반에 이르러 밝혀지는 이유는 단순해서 더 설득력 있다. 자신이 입양되었다는 사실, 어쩌면 양부모는 자신을 사랑해서 입양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 존재근거를 부정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이 연약한 소녀의 세계를 뒤흔들고 있다. 흔한 성장담에 가까운 이 작품이 남달라 보이는 건 일차적으로 사소한 사건을 다듬어가는 지브리 특유의 세밀함, 그리고 중층적인 이야기 구성 덕분이다. 하지만 그보다 눈길이 가는 건 올곧지만 서툰 소녀의 고민이 현재 지브리의 근본적인 고민과 겹쳐 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추억의 마니>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다카하타 이사오의 입김이 닿지 않은 최초의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다. 그간 세대교체를 위한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젠 미야자키의 공식적인 은퇴와 함께 물러설 곳이 없어졌다. 어떤 식으로든 2세대 지브리의 색깔을 보여줘야 할 때, <바람이 분다>(2013)의 미야자키 하야오와 <가구야 공주 이야기>(2013)의 다카하타 이사오의 바통을 이어받은 이는 <마루 밑 아리에티>(2011)를 연출한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이다. 영국 아동문학의 걸작인 조앤 G. 로빈슨의 <거기 마니가 있었다>(When Marnie Was There)를 꺼내든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지만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 어렵다 생각하고 접어두었다. 10년간 이미지로만 남아 있던 프로젝트는 “<마루 밑 아리에티>에서 못다 한 것이 있다”라는 말 한마디에 요네바야시 감독의 손으로 넘어갔다.
사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온전히 요네바야시의 작품이라고 부르기 어렵다. 그를 감독으로 전격 발탁한 건 순전히 미야자키의 의지였고 각본 역시 미야자키가 도맡아 썼다. 당시 요네바야시에게 허락된 콘티 작업 시간은 겨우 4개월이었음을 감안하면 그가 원작을 완전히 소화해 자신의 색을 입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체계화된 지브리 공정 시스템 안에서 자신의 역할에 충실한 쪽에 가깝지 않았을까. 반면 <추억의 마니>는 온전히 자신의 색깔로 재구성한, 처음부터 끝까지 요네바야시의 손을 거친 첫 각본이다. 스스로 납득이 가는 이야기가 나올 때까지 매달리다 보니 각본과 콘티에만 꼬박 20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이야기를 해체하고 자신의 색을 입히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이다. 실제로 <마루 밑 아리에티>에 비해 <추억의 마니>의 각색 폭은 훨씬 크고 적극적이다.
조용한 세대교체
무엇보다 <추억의 마니>는 제작방식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했다. 그동안 지브리는 감독의 머릿속에 있는 이미지를 우선 스토리보드로 옮기고 이후 구체적 설정을 추가하는 방식을 따랐다. 미야자키가 “한장의 이미지에서 작품을 출발시키는” 타입의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추억의 마니>의 원작을 접한 미야자키의 최초 이미지는 ‘습지에 접한 유럽풍의 저택, 푸른 창문, 저택에 갇힌 금발의 소녀’였다고 한다. 요네바야시 감독은 미야자키의 머릿속에 잠든, 불가능한 이미지에 매달리지 않았다. 대신 실사영화 경험이 있는 미술감독 다네다 요헤이를 영입해 그림 콘티보다 미술 디자인을 먼저 완성시켰다. 실사에 가까운 자세한 설계도를 짜고 가상의 공간을 사실적으로 구축한 것이다. 이후 완성된 디오라마(영화 촬영을 위해 만든 축소 모형과 풍경) 안에 인물을 배치해 실사영화를 찍는다는 개념으로 접근했다. 여느 지브리 작품 못지않게 판타지적인 설정으로 가득함에도 유독 사실적인 드라마처럼 느껴지는 이유 중 하나다.
안도 마사시의 귀환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노노케 히메>(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의 작화감독이었던 그는 한때 미야자키의 총애를 받았지만 이후 미야자키와 다른 색깔을 추구하며 지브리를 떠났었다. <킬 빌> <하나와 앨리스> 등 영화미술로 명성을 쌓은 다네다 요헤이, 돌아온 탕아 안도 마사시의 영입은 “독자적인 색깔을 찾겠다”는 감독의 선언처럼 들린다. 동시에 “다카하타와 미야자키가 없어도 건재한 지브리”를 만들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지금껏 지브리에서 나고 자란, 지브리의 적자 요네바야시 감독이기에 가능했던 작지만 큰 한 걸음이다.
조용한 성장, <추억의 마니> 프로젝트와 작품 속 주인공 12살 소녀 안나는 그렇게 닮았다. <추억의 마니>는 사람들과 눈도 맞추지 못하던 한 소녀가 비로소 눈을 맞출 수 있기까지의 과정을 따라가는 이야기다. 작지만 큰 한 걸음을 정성껏 표현하는 것. 요네바야시 감독의 저력은 바로 그 섬세한 손길에서부터 시작된다. 가령 현실에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그림을 통해 세상을 관찰하던 소녀 안나는 습지 한가운데의 저택으로 향할 때면 그 나이 또래 소녀 같은 활기를 띤다. 영화는 마니와의 만남이 환상의 세계에 속하는 일이란 걸 굳이 숨기지 않는다. 안나 자신도 이것을 일종의 꿈이라 믿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는 한바탕 요란한 퍼레이드나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마니를 만나러 갈 때면 습관처럼 땅바닥을 바라보던 안나의 시선이 천천히, 그리고 가만히 정면을 응시한다. 이 별거 아닌 눈동자의 움직임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짓는 지표의 전부다. 안나를 예민하게 관찰하지 않는 이상 발견하기 힘든 사소한 변화. 하지만 덕분에 안나의 1인칭 시점으로 자연스런 몰입이 가능하다. 이제까지의 지브리가 ‘전지적 미야자키 시점’이었음을 부정할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지브리 특유의 작화를 유지하되 새로운 제작방식으로 ‘요네바야시의 시점’을 도입한 <추억의 마니>는 조용한 혁명의 신호탄이자 초석처럼 보인다. 겉으론 큰 변화가 없는 듯 보여도 이 한 걸음의 의미는 크다.
크고 작은 변화는 곳곳에 자리한다. 소년과 소녀의 사랑과 모험은 이제 없다. 대신 외로움에 지친 한 소녀와 또 다른 소녀의 아름다운 교감이 중심에 자리한다. 소녀와 소녀의 우정이라는 점에서 가볍게 백합물(여성 동성애나 그에 가까운 스토리가 주가 되는 영상, 도서 등)의 정서도 언뜻 보이는데 사실 성적 긴장감은 거의 없기 때문에 큰 의미는 두지 않아도 좋다. 그보다는 한 소녀의 내적 성장을 심도 있게 따라가는데 심리의 변화를 잡아나가는 소소한 장치들이 아름답고 탁월하다. 특히 지브리 작품답게 숨 막히게 아름다운 작화, 치밀한 배경 묘사는 압권이다.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작은 마을은 소금기가 적고 그다지 덥지 않은 공기마저 정확하게 재현해낸다. 웅장한 습지 저택부터 아늑한 집안 냄새, 아기자기한 소품들까지 생명을 띠고 있는 듯 생생하다. 그 자체로 환상의 세계를 목격하는 경이로운 체험이라 할 만하다. 여기에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건을 더하는 건 낭비다. 잔잔하게 가슴을 울리는 음악 사이 시린 달빛을 어깨에 두른 소녀들의 왈츠를 보는 순간 안나와 마니의 교감은 말 그대로 ‘그림처럼’ 완성된다.
당신의 마니는 만나셨나요?
요네바야시 감독은 지브리 작화의 장점은 고스란히 살린 채 정서적으로 한층 깊게 파고들었다. 미야자키의 지향점이 동심이었다면 요네바야시의 시선은 유리처럼 아슬아슬해 보이는 청소년 시기를 향한다. 요양차 친척집에 내려간 안나가 특별한 친구 마니를 만나고 마음을 연다. 두 사람만의 비밀을 만들고 행복한 시간을 공유한다. 여기서 둘의 만남은 현실과 환상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진다. 그간 지브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의 고리’를 통해 안쪽과 바깥쪽, 현실과 환상을 선물해왔다. <추억의 마니>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양쪽 세계를 오가는 경계의 폭을 최대한 좁혔다는 데 있다. 요네바야시 감독은 눈에 보이는 화려한 마법 대신 고요하지만 가슴속에 천천히 차오르는 실감으로 화면을 채우고 싶어 한다. 마음의 문을 닫은 안나가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는 과정은 실로 사려 깊고 다정하게 묘사되는데, 큰 사건이 없어도 충분하다. 소녀들의 작은 눈짓, 몸짓만으로 미묘한 공기의 차이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차가운 달빛을 가르며 호수를 건너가는 쪽배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적막한 호수를 가득 채울 때 안나와 마니 사이에는 더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다. 관객 역시 마찬가지다.
이쯤되면 굳이 환상적인 장치나 설정을 만들지 않아도 상관없다. 현실을 꾹꾹 눌러 담은 연필의 무게가 사실적일수록 애니메이션이라는 이름의 환상도 짙어진다. 올곧고 서툰 존재들은 어찌 이리도 사랑스러운지. 안나가 마니와 함께한 시간, 물과 바람의 차가움, 따뜻한 양모의 추억이 모두 안나가 세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음의 증명이다. 자신을 향한 거짓 없는 사랑을 느낄 때 이윽고 소녀의 불안도 사라진다. 하나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성장이란 그런 것이다. 영화는 그 사실을 안나 스스로 (혹은 관객이) 깨달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다.
<추억의 마니>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의 세상은 행복하십니까. 가장 외로운 순간, 손을 잡아줄 존재가 있습니까. 누군가에겐 지루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마지막 반전이 폭풍처럼 가슴을 뒤흔드는 건 그전까지 숨 막히는 고요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말에 다다르면 따스한 눈물이, 행복의 감정이 봇물처럼 차오를 것이다. 이 영화는 지브리의 30년을 추억하며 용기 있게, 하지만 조심스럽게 다음 걸음을 내딛는다. 깊은 만큼 교감의 통로가 다소 좁아진 감은 있지만 이만하면 지브리의 미래를 넉넉히 맡길 만하다. 어쩌면 앞으로는 좀더 어른스러운 지브리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