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지브리라는 ‘낮’의 얼굴
2015-03-23
글 : 김일림 (대중문화 연구자)
전후 일본의 상상력 시스템은 애니메이션을 통해 어떻게 성장했는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함께 성장했고 미야자키의 은퇴와 더불어 한 시대를 마감 중이다. 이번 스튜디오 지브리의 제작부문 해산 결정을 흥행 부진과 경영 악화 탓으로만 미루는 건 단순하고 게으른 해석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문화에서 지브리가 차지하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지브리가 어떤 변화의 과정을 겪어왔는지를 살펴본 후에야 이번 결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를 위해 김일림 필자에게 스튜디오 지브리가 일본 애니메이션에 남긴 족적과 의미에 대한 정리를 부탁했다. 찬찬히 읽어보면 큰 그림이 보인다.

새삼스럽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한국 사회에서 ‘일본’은 금기였다. 1998년에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계기로 ‘일본’은 비로소 평범한 외국이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뜨거운 감자는 단연코 애니메이션이었다. 우려와 달리 일본 애니메이션 개방으로 인해 한국 영화 시장의 판도가 흔들리는 일은 없었다. 폭력성과 선정성이 큰 문제가 된 적도 없었다. 다만 일본 애니메이션의 영향력은 일상적이고 공식적이 되었다. 그 중심에 스튜디오 지브리가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이는 없을 것이다. 지브리는, 일본과 공식적으로는 문화적 냉전상태에 있던 ‘한국인’의 일상에, 안데르센 동화처럼 위화감 없이 자리잡았다.

그래서 <추억의 마니>가 스튜디오 지브리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는 소문은 번복의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큰 의미로 다가온다. 이 글은 전후 일본 사회가 구축한 대중문화 시스템의 한축인 스튜디오 지브리의 역사와 의미를 살피고자 한다. 스튜디오 지브리를 설립했던 청년들이 노인이된 지금, 그 위상 역시 변해왔다. 한국에서 ‘일본’이라는 금기와 마지막까지 얽혀 있던 분야가 ‘애니메이션’이었다면, 그 금기가 무장 해제된 지점에 지브리가 있다. 일본 사회와 지브리의 관계를 살피는 작업은 그래서, 결국 우리를 살피는 작업으로 귀결된다.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아메리카니즘의 산물, 만화영화

20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일본 사회에서 만화영화는, 미국 자본주의의 산물로서 비판받았다. 일본의 1세대 만화영화 평론가 이마무라 다이헤이(1911∼86)에 의하면 “만화영화는 아메리카니즘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예술이며, 그 아메리카니즘이란 기계 기술의 찬미”였다. “뽀빠이와 미키로 대변되는 미국 애니메이션 뒤에는 미국 자본주의의 세계 지배 욕구가 있다”는 시각은 20세기 전반 일본 사회에 퍼져 있었다. 만주인과 조선인에게 만화영화를 가르쳤다는 자부심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오랫동안 디즈니 콤플렉스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1940∼50년대에 데즈카 오사무가 디즈니의 <밤비>와 <미키마우스>를 저작권 허가 없이 모작해서 발표한 사례를 봐도 미국, 특히 디즈니는 일본의 만화영화 업계에서 오랫동안 커다란 그림자였다. 실제 1958년 이마무라 다이헤이는 “(만화영화) 시장은 미국은 세계 전체, 도에이는 일본과 오키나와뿐인 걸 생각하면, 행랑 빌려주고 안방 빼앗길 법한 달갑지 않은 제휴”라며, 일본의 애니메이션 하청작업을 비판한 바 있다.

미국 문화는 태평양 전쟁기에는 정복해야 할 대상, 패전 이후에는 일본 사회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중 만화영화가 단순한 하위문화 이상의 문맥에서 해석된 것은 미국과 일본의 역학관계, 그리고 일본 근현대사에서 비롯된 특수성 때문이다. 현실과 허구를 동일한 논리에 놓고 해석하는 이른바 ‘오타쿠 문화’는 이러한 틈새에서 꽃피운다. 오타쿠적 관점은 상상력을 매개로 현실과 허구의 관계를 전복시키며 수많은 작품과 담론을 생산해왔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스튜디오 지브리는 <기동전사 건담>에서 시작되어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정점을 찍은 오타쿠 문화와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 오타쿠적 애니메이션 문화는 미국에 의해 제어되었던 금기를, 상상력을 통해 실현하는 장으로서 기능했다. 반면 스튜디오 지브리는 동심과 동화를 내세운 ‘낮’의 얼굴을 하고 있다. 다소 거칠게 정리하자면, 20세기 후반 만화와 애니메이션으로 촉발된 ‘제2의 자포니즘’은 오타쿠 문화와 스튜디오 지브리를 양축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아나키즘과 생태주의 등과 같은 가치를 표방하면서 탈정치적인 색깔을 만들어갔다. 이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탄생 경위와 전개를 살피지 않으면 안 된다.

잘 알려져 있듯 스튜디오 지브리는, 출판사 도쿠마 쇼텐의 투자로 1985년 설립되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노동쟁의 끝에 도에이 동화를 퇴사한 이후다. 이후 <루팡 3세> <팬더팬더> <알프스 소녀 하이디> <미래소년 코난> 등에 참여하던 하야오는, <루팡3세: 카리오스트로의 성>을 만들면서 <아니메쥬>의 기자 스즈키 도시오(1948∼)를 만난다. 이를 인연으로 1982년 2월호부터 <아니메쥬>에 만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연재하고, 이 만화가 동명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어 1984년에 개봉된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이 작품을 계기로 탄생했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바이다.

흔히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와 동일시되지만, 프로듀서 스즈키 도시오와 도쿠마 쇼텐의 사장 도쿠마 야스요시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일본 공산당원이었던 도쿠마 야스요시(1921∼2000)는 1943년 요미우리 신문사에 입사했으나 1946년 퇴사하고 인쇄업을 시작했다. 도쿠마 야스요시에게 수차례 미야자키 하야오의 재능을 설득하여 회사를 설립하도록 이끈 것이 바로 스즈키 도시오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재능과 스즈키 도시오의 프로듀스 능력, 그리고 도쿠마 야스요시의 결단으로 탄생한 시스템이다. 이러한 삼위일체 속에서 스튜디오 지브리는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들은 전후 민주주의의 공기와 1960년대 후반 전개된 전공투의 분위기, 경제 성장기의 풍요로운 공기를 공유하고 있었다. 패전을 딛고 성장하던 일본 사회의 공기 속에서, 현실과 정치, 역사적 해석에서 가능한 한 벗어나 동심과 함께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와 같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특색은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루팡 3세>

오타쿠의 배타성과 지브리의 보편성

21세기의 오타쿠 문화는 롤리타 콤플렉스와 섹슈얼리티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반면 미소녀를 성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물론 오타쿠 사이에서 상호교류하는 과정도 극히 폐쇄적이다. 이러한 오타쿠의 배타성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지브리는 오타쿠 문화와 선을 긋고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해왔다. 일본 애니메이션 문화는 오타쿠의 배타성과 지브리의 보편성을 축으로 전개되어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과정에서 패전 이후 고착되었던 미국과 일본의 역학관계는 적어도 대중문화 분야에서는 전복되었다. 미국과 별개의, 아니 오히려 미국을 능가하는 일본의 대중문화가 전세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일본어 ‘아니메’가 배타적인 뉘앙스를 포함하게 된 것도, 오타쿠적 애니메이션 문화의 배타성과 지브리의 보편성이 서로 상호보완하며 산업구조를 구축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주의와 이데올로기, 전체주의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했던 스튜디오 지브리는 <코쿠리코 언덕에서>(2011)와 <바람이 분다>(2013)에서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단지 일본적인 일상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를 재해석하거나 전체주의적 관점을 드러낸 것이다. 애니메이션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순정만화인 원작과 전혀 다른 문맥을 가진다. 3•11로 침체된 일본 사회에, “힘내서 나아가자”는 쇼와 시대의 활력을 덧칠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주의적 학생회를 묘사한 핵심 장면에서는 “과거를 부정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던진다. ‘우리’가 숭고한 가치를 향해 나아가는 장면은, 전체에서 벗어난 개인을 묘사했던 지브리의 초기 작품 경향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 나아가 <바람이 분다>는 정치적 해석을 최대한 배제하고자 했음에도, 결과적으로 ‘소년의 꿈’을 매개로 태평양 전쟁기를 재해석하고자 한 작품이 되어버렸다. 두 작품은 지브리가 구축한 보편성이 ‘애국’과 ‘우리’를 말하기 위한 도구로 기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현실과 역사에 대한 개입은, 오타쿠적 상상력과 지브리의 보편성이 최근 접점을 이루는 지점이다. 공식적 역사를 재해석하고 현실에 개입하는 움직임이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에서도 파편화된 방식으로 등장한다. 지브리를 탄생시켰던 전후 민주주의의 공기가 더이상 정체성이 되지 못하는 시대다. 이는 비단 미야자키 하야오 개인의 문제라기보다 일본 사회에서 대중문화가 지닌 위상과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브리의 시스템은 창립 멤버의 노령화와 경영 환경의 변화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미야자키 하야오와 지브리의 분리

스튜디오 지브리가 해체를 고려하고 있다는 사실은, 지브리가 지향하던 유토피아적 노동환경의 중도 하차를 의미한다. 도에이 동화의 노동환경에 문제를 느끼고 나온 미야자키 하야오의 의지 때문일까, 스튜디오 지브리는 유례없이 모든 직원이 정사원이었다. 실제 스튜디오 지브리의 노동환경은 물리적으로도, 또 분위기적으로도 이상적이었다. 도쿄 교외에 위치한 유럽식 건물에, 애니메이터들이 언제든지 먹을 수 있도록 쿠키와 케이크가 놓인 곳이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지브리는 하청 없이 자사 직원만으로 작품을 제작해왔다. 바로 이 요소가 경영에 걸림돌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재능과 스즈키 도시오의 프로듀스 능력, 그리고 도쿠마 야스요시의 마인드가 결합해 구축한 전후 일본의 상상력 시스템이다. 미국을 극복한 일본 대중문화의 ‘낮’의 얼굴이기도 하다. 지브리는 이제 1세대와 거리를 두고 해체 혹은 변화의 국면으로 접어들려고 한다. 지브리가 어떠한 형태로 변하든, 창작자들이 만들어내는 작품이 기대되는 것은 물론이다. 다만 상상력이 ‘국가’에 얽매이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다. <추억의 마니>는 ‘국가’에 얽매인 작품이라고 할 수 없다. 충분히 감동적이다. 그러나 파편화된 장면이 어떠한 전체상으로 결합될지는 아직 모를 일이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