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포스트 미야자키는 누구?
2015-03-23
글 : 황의웅 (애니메이션 연구가)
사진 : 손홍주 (사진팀 선임기자)
미야자키 하야오의 아들 미야자키 고로부터 지브리 정통파의 다크호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까지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

2013년 여름, <바람이 분다>의 주인공 목소리를 연기한 <에반게리온>의 감독 안노 히데아키가 스승 미야자키 하야오의 출세작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의 속편을 만들지 모른다는 소문이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당사자인 둘은 가능성이 없다며 소문을 일소했다. 하지만 이런 얘기가 나온 것은 스튜디오 지브리의 불확실한 후계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명감독의 퇴장을 아쉬워한 사람들이 그를 이을 마땅한 인재를 무의식중에 갈망했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재정 문제로 휴식기에 들어간 지브리의 현 상황에서 당장 그 출현을 바라기는 무리다. 하지만 그것을 향한 움직임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면 포스트 미야자키에 도전했던 그들은 대체 누구였을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그 포스트 미야자키의 인물사를, 혹시 지브리의 마지막 장편이 될 수도 있는 <추억의 마니>의 국내 개봉 즈음에 정리해본다.

미야자키 고로.

아버지를 넘지 못한 아들, 미야자키 고로

지브리 미술관 관장이던 그가 2006년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의 감독을 맡는다는 소식은 적지 않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족벌 체제도 아닌 회사에서 아버지 덕에 고생 하나 없이 한 자리 꿰찬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탭들의 반발도 심했다. 하지만 격렬한 비판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는 포스트 미야자키를 찾는 시험대에 올랐다. 그리고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첫 작품으로는 나쁘지 않은 성적과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대중은 그의 작품성과 실력을 의심했다. 2011년 두 번째 작품 <코쿠리코 언덕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지막이란 생각으로 제작에 죽기 살기로 임했다. 결과는 미야자키의 눈물샘을 자극했고, 흥행도 그해 일본영화 중 1위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그의 역량은 지브리라는 세계적인 스튜디오를 끌고 가기에 여전히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다. 기획자에 아버지 이름을 올린 그의 영화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중은 아버지의 후광 없이 그의 홀로서기를 지켜보며 진정한 후계자가 될지를 판단하고 싶어 한다. 이를 알기라도 하듯, 그는 지난해 지브리를 나와 다른 제작사와 <산적의 딸 로냐>라는 TV시리즈를 제작해 방영 중이다. 지브리 그림체를 그대로 유지한 채 최신 제작법을 시도한 이 작품의 실험은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포스트 미야자키 시대를 향한 진화임에는 틀림없다.

<귀를 기울이면>

지브리의 영원한 2인자, 곤도 요시후미

지병으로 지브리 작품에 뒤늦게 참가했지만, 그처럼 미야자키의 명실상부한 후계자로 거론된 이는 아직까지 없다. 일찍이 <팬더와 친구들의 모험>에서 미야자키 밑에서 일상 묘사를 그리기 시작해 1978년 <미래소년 코난>에서 미야자키 연출력의 장점을 흡수했다. <빨강머리 앤>에서는 미야자키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캐릭터 디자인과 작화감독을 맡아 명작극장 가운데 최고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리얼리즘 시대도 그가 그린 앤에 의해 열렸다. 이후에도 미야자키와는 <리틀 니모> <명탐정 홈스> 등을 통해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한다. 지브리 작품 참가는 <반딧불이의 묘>(1988)부터다. 당시 <이웃집 토토로>(1988)를 동시 개봉시켜야 했던 미야자키가 그를 영입하려고 “제작에 함께하지 않으면 나도 하차한다”라며 다카하타 이사오와 신경전을 벌인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이미 미야자키에게 수족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추억은 방울방울>(1991)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작화의 정점에 오른 그는 미야자키의 배려로 <귀를 기울이면>(1995)에서 감독으로 데뷔했다. 이 작품은 그만이 그릴 수 있는 소녀 감성을 미야자키가 그린 콘티 이상의 움직임으로 표현해 극찬을 받는다. 하지만 1998년 1월, 갑자기 찾아온 해리성 대동맥류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부재는 곧 미야자키의 후계구도에 빨간불이 켜졌음을 의미했다. 지브리의 위기론도 이때부터 나왔다.

오시이 마모루.

포스트 미야자키의 원조, 오시이 마모루

1995년 <공각기동대>로 세계적 감독 반열에 오른 그가 최초의 포스트 미야자키였다는 사실에 좀 놀랄 것이다. 그와 미야자키의 인연은 젊은 기수로 촉망받는 1980년대 초로 올라간다. 의인화한 개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명탐정 홈스>의 전신 ‘셜록 홈스’가 그 첫 만남. 처음 오시이 마모루를 중심으로 꾸려진 이 기획은 백업만 하려던 에이스 미야자키에게 어느덧 넘어갔다. 이후 <루팡 3세>의 세 번째 극장판을 제안받은 미야자키가 이를 고사하는 대신 그를 감독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하지만 각본 초고의 난해한 결말에 제작사와 배급사가 난색을 표했다. 다시 각본 수정을 의뢰받은 미야자키는 나중에 오시이의 강판을 알게 되자 감독직을 내려놓는다. 결국 ‘오시이판 <루팡 3세>’는 세상에 빛을 보지 못했다. 지브리 설립이 진행되던 1985년에는 미야자키의 만화 <잡상노트>의 한편을 원작으로 <돌격 아이언호크>란 OVA를 맡을 예정이었다. 하지만 역시 제반사정으로 기획이 중지되고 만다. 이렇게 미야자키와 계속 어긋나기만 하던 그는 이후 오히려 독자적인 노선을 걸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으로 거듭난다.

<마녀 배달부 키키>

미야자키 후계자 양성의 첫걸음, 가타부치 스나오

일본대학의 예술학부 영화과에 재학할 때 특별강사로 온 미야자키를 만나 각본가로 그의 작품에 참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리틀 니모> 제작과정에서 연출조수와 공동감독을 맡으며 기대를 모았다. 유망한 젊은 스탭으로 제작 준비반을 꾸렸던 <마녀 배달부 키키>(1989)가 결국 미야자키가 각본과 콘티를 담당하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당시 그가 감독으로 기용될 참이었지만, 스폰서 야마토운수의 의향을 받아들여 미야자키에게 자리를 내주고 연출보로 물러나고 말았다. 하지만 그는 지브리의 후계자 양성의 첫 케이스가 되었다. 이후 <아리테히메>(2001)와 <마이마이신코 이야기>(2009)를 발표하며 아동문학의 동화적 색채가 짙은 미야자키풍의 세계관을 지브리 밖에서나마 꽃피우며 아쉬움을 달랬다.

<마루 밑 아리에티>

지브리 정통파의 다크호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1996년 지브리에 입사해 줄곧 지브리맨으로 살아온 애니메이터. 그만큼 지브리 스탭들과 결속력도 좋고 미야자키가 원하는 방향도 잘 읽어냈다.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가 지브리에서 가장 훌륭한 애니메이터로 평가할 정도로 실력도 갖추고 있다. 미야자키가 기획한 <마루 밑 아리에티>(2010)에서 지브리 최연소 감독이 된 것도 그런 평가와 뒷받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내심 걱정하던 미야자키도 완성된 필름을 보고는 37살의 젊은 감독의 손을 번쩍 들어올리며 노고를 치하했다. 그의 이 첫 작품은 개봉된 해의 일본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 그에 대한 기대를 끌어올렸다. 특히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과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을 제치고 북미 지역에서 개봉된 지브리 작품 가운데 가장 높은 흥행 성적을 거두었기에, 곧 포스트 미야자키 시대가 열리는가 싶었다. 하지만 미야자키의 은퇴가 공식 발표되고 지브리가 재정난에 잠정 휴식기에 들어간다는 소문이 나돌던 2014년에 개봉된 <추억의 마니>는 흥행이 전작의 3분의 1 수준에 머물고 만다. 탈미야자키를 선언하고 만든 작품이 주목받지 못하고 흥행에 저조하니 지브리 위기론은 다시 불거졌다. ‘미야자키가 없으면 지브리는 안 되는 걸까?’라는 의문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로써 포스트 미야자키에 대한 해묵은 논쟁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다. 3월7일 ‘미타카의 숲 아니메 페스타 2015’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그는 신작에 대한 열망을 밝혔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그런 모습은 빈 하늘에 울려퍼지는 메아리처럼 들릴 뿐이다.

호소다 마모루.

미야자키 체제의 최대 희생양, 호소다 마모루

두 번째로 감독을 맡았던 <디지몬 어드벤처>의 2000년 극장판이 영상의 높은 퀄리티로 업계 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신인감독이던 그는 곧 일본 애니메이션의 21세기를 이끌 인물로 이름을 알렸다. 마침 당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맡을 차기감독감을 백방으로 찾던 미야자키는 그런 그를 직접 뽑아 일을 맡겼다. 하지만 제작은 기획 단계에서 멈추고 만다. 당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제작이 한창이던 터라 지브리에서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그는 혼자 여기저기서 스탭을 모아 힘들게 진행을 해나갔다. 그런 어려운 상황에서 미야자키가 호소다의 세계관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그동안 그린 콘티를 모두 파기한 것과 동시에 기획팀도 해체시켰다. 게다가 급여까지 밀리자 그는 “더는 이 업계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라며 지브리를 훌쩍 떠났다. 결국 미야자키가 은퇴를 번복해 다시 감독을 맡으며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그와 지브리의 맞지 않은 궁합은 이때가 처음은 아니다. 그는 젊었을 때 지브리 연수생 채용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는데, 존경하는 미야자키로부터 ‘자네 같은 사람이 들어오면 결국 자네의 재능을 사장시킬 수 있느니 포기하겠네’라는 편지를 직접 받기도 했다. 하지만 전화위복은 그의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이후 장편 대작을 줄줄이 맡아 흥행시키며 일본 영화계에서 미야자키의 대체자로 단연 손꼽히게 된다. 특히 <시간을 달리는 소녀>(2010)는 미야자키 고로의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과 같은 시기에 개봉되어 평단이나 팬들로부터 더 높은 지지와 평가를 받았다. 지브리가 제작을 멈춘 올해, 그는 신작 <괴물의 아이>의 개봉을 앞두고 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거장이 한때 믿었던 좌장, 안도 마사시

곤도 요시후미의 부재로 고민이 많았던 때, 그는 지브리에 작은 희망이었다. 무엇보다 1990년 연수생(2기 출신) 과정을 밟고 입사해 ‘미야자키의 왼팔’로 차근차근 성장해온 터였다. 단편 <On Your Mark> 이후 28살이란 젊은 나이에 <모노노케 히메>(1997)의 작화감독을 맡은 것도 그런 기대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주변의 기대대로 미야자키를 잘 보좌하며 지브리 최고의 역작을 완성해냈다. 또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작화감독으로서 임무를 완벽히 수행했다. 미야자키의 신임도 매우 두터웠다. 하지만 과중한 일에 너무 시달렸던 탓일까? “천재의 실력도 한물갔다”는 불만을 토로했다는 소문만 남긴 채 지브리를 퇴사해버렸다. 이후 무협세계의 강호 같은 애니메이션 업계를 돌며 <크리스마스에 기적을 만날 확률>(2003), <파프리카>(2006),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2011) 등 대작들에 참여하다가 뭔가 깨달았는지 2014년 <추억의 마니>의 작화감독으로 지브리에 복귀했다. 하지만 방황하는 사이, 그의 자리는 이미 요네바야시 같은 후배로 대체된 상태였다.

<고양이의 보은>

기대를 저버린 깜짝 발탁, 모리타 히로유키

<마녀 배달부 키키>로 시작해 지브리 작품으로는 단 세편에만 참여하고 2002년 <고양이의 보은>에서 감독으로 데뷔한 행운아. <이웃집 야마다군>(1999) 이후 연출을 하고 싶다는 말을 미야자키가 기억에 두었다가 직접 감독으로 지명한 것도 이례적이다. 물론 그만큼 미야자키가 그의 숨은 재능을 발견했기에 그런 깜짝 발탁도 가능했으리라. 보답이라도 하듯 그는 <장화 신은 고양이>나 <명탐정 홈스: 푸른 루비편>등 미야자키 과거 작품들의 액션을 오마주해 마니아의 향수까지 건드렸다. 결과는 개봉된 2002년의 일본영화 중 흥행 1위를 기록, 하지만 실상은 전작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의 영향권에서 거둔 성적이란 평이 중론이다. 원작 만화에는 없는 애니메이션만의 창작도 결여되어 작품성도 크게 인정받지 못했다. 그는 결국 포스트 미야자키의 궤적에서 가장 존재감이 없는 인물이 되었다. 다만 이후로도 <게드전기: 어스시의 전설> <가구야 공주 이야기> 등에서 원화를 담당하며 지브리 작품에 꾸준히 참여하는 중이다. 포스트 미야자키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지브리 작품과 엮인 인연만은 여전히 계속되는 듯하다.

<바다가 들린다>

굴러 들어온 돌의 한계, 모치즈키 도모미

스스로 지브리에 작품 제작을 적극적으로 제의한 애니메이션 연출가. 1993년 TV 스페셜 <바다가 들린다>는 그의 끈질긴 구애 끝에 실현된 작품이다. 1992년 <붉은 돼지> 발표 후 젊은 스탭들로 뭔가 만들자는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제안자였던 그가 연출가로 낙점되었다. 사춘기 러브스토리를 생생히 그리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점이 기용 이유였다. 1990년대 해적판 비디오 세대에게 제목만 대면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메종 일각> <오렌지로드> 등이 그의 전작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바다가 들린다>는 첫 방영에 17.4%라는 높은 시청률을 냈고 비디오도 15만개 이상 팔리는 등 적지 않은 성공을 거두었다. 무엇보다 미야자키가 이 작품에 자극받아 <귀를 기울이면>을 기획했다는 사실은 보이지 않는 큰 성과였다. 하지만 그의 지브리 활동은 아쉽게 그것으로 끝나고 만다. 극장용 장편영화만 제작하는 지브리의 작풍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 특히 아이들을 위한 작품 위주로 제작하는 방향은 가장 넘기 힘든 장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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