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타]
미야자키 감독보다 관객을 먼저 생각했다
2015-03-23
글 : 송경원
<추억의 마니> 연출한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감독
<추억의 마니>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기대를 짊어진 감독들이 있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도 그중 한명이다. 첫 작품 <마루 밑 아리에티>(2010)에서는 성실함과 탄탄함을 증명했지만 본인이 색깔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했다. 짐작건대 <추억의 마니> 앞에는 스튜디오 지브리라는 이름보다 요네바야시 히로마사라는 수식어가 먼저 붙을 것 같다. 지브리의 과거와 미래를 이을 징검다리가 될 그에게 시시콜콜하게 질문을 던졌고 꼼꼼한 답변을 건네받았다. 차분한 듯 핵심을 찌르는 어른스러움. 요네바야시 히로마사 스타일이다.

-영국 작가 조앤 G. 로빈슨의 동명의 아동문학 작품을 원작으로 했다. 전작 <마루 밑 아리에티>도 영국 아동문학이 원작이었는데.

=스즈키 도시오 프로듀서가 책을 가져왔다. 애니메이션으로 그리기에는 어려운 소재라 한번 거절했지만, 이야기가 갖고 있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좋았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고리가 존재하며, 그 내면과 외면에 대해 생각하는 주인공이 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결정했다. 영국 아동문학은 높은 정신성과 희망이 있어서 좋아한다. 다만 친밀감을 끌어낼 필요가 있어 무대는 일본으로 바꿨다.

-안나는 여자아이지만 겉모습은 지브리 영화 속 남자주인공을 닮았다.

=여성적인 느낌이 적으니 겉모습은 중성적일지도 모르겠다. 안나는 행동이나 마음을 드러내기 싫어하는 아이라 디자인이 점점 수수해졌다. 하지만 예민한 감성과 관찰력이 있는 아이여서 눈의 표현에 공을 들였다. 참고로 마니도 일본인으로 바꿀까 했지만 환상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고 싶어 금발 소녀로 제작을 진행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지만. (웃음)

-전작 <마루 밑 아리에티>는 작화만큼 사운드 디자인이 도드라진다. 이번에는 주제곡 <Fine on the Outside>가 정말 인상 깊었다. 스튜디오 지브리 최초의 외국어 주제가다.

=효과음보다는 음악이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추억의 마니>는 <마루 밑 아리에티>와 비교했을 때 전반적으로 음악이 강조되지 않도록 했다. 꿈과 현실을 오가는 장면을 음악으로 조절하기 위해서다. 주제가는 개봉 직전까지 정해지지 않아서 굉장히 힘들었다. 그 시기에 우연히 지브리 미술관에서 프리실라 안의 콘서트 음악을 들었는데 이번 작품에 딱 들어맞겠다고 느꼈다. 특히 미공개작이었던 <Fine on the Outside>는 프리실라 안이 직접 썼는데, 원작 소설을 읽고 그녀가 추천해줬다. 안나의 마음을 그대로 부른 노래였고 운명이라 느끼며 주제가로 채택했다. 프리실라 안은 어머니가 한국분이라 그런지 매운 음식을 굉장히 잘 먹는다. 힘들었다. (웃음)

-얼핏 단순하지만 상당히 중층적인 이야기다. 소녀와 할머니의 이야기로도 읽을 수 있고, 두 소녀의 우정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편으론 심리치료 과정으로도 보인다.

=큰 틀은 안나의 성장담이다. 극적인 변화는 아니다. 눈을 맞춰서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못했던 소녀가 비로소 모두와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과정이다. 인간은 갑자기 성장하지 않는다. 안나의 작지만 큰 한 걸음을 정성껏 표현하는 것이 이번 작품의 첫 번째 목적이었다. 원작에서 마니는 전반에서만 나오고, 후반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안나는 다른 가족과 지낸다. 분량을 잘라야 해서 후반에 나오는 ‘가족과의 시간’을 어쩔 수 없이 잘랐다. 마니가 나오는 신도 후반에 넣었다. 그 결과 보다 현실과 꿈이 교차하는 신기한 이야기가 된 것 같다.

-전반적으로 비애가 깔려 있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아주 짧고 사소한 한순간이다. 석양이 지는 아름다운 시간은 한순간, 청춘이 빛났던 순간도 한순간. 이번 작품에서는 그 한순간을 편집하여 영상으로 제작할 수 있어 행복했다. 이번 작품의 무대는 홋카이도 동쪽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세토우치 지역을 제안했지만 <벼랑 위의 포뇨>(2008)와 겹치는 관계로 포기하고 원작의 영국 이미지에 가깝게 홋카이도를 무대로 했다. 특별히 신경 쓴 부분은 하늘이다. 지금까지의 지브리 작품과 달리 이번 작품은 대부분 날씨가 흐린 상태인데, 안나의 기분과 이어지듯이 표현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판타지와 리얼리즘의 경계에서 균형감 있게 전개된다. 특히 마니의 존재는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보다보면 현실이었으면 하는 강렬한 기대를 자아낸다.

=애니메이션은 다양한 표현양식으로 정보를 정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실사보다 본질에 가깝게 그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령 애니메이션에서 계란프라이를 잘랐을 때 노른자가 살짝 나오거나, 혹은 물에 맨발을 담글 때 그건 단순히 그림이 아니다. 관객은 그림과 움직임을 통해 자신이 체험했던 기억을 재현할 수 있어야 한다. 애니메이션의 리얼리즘이란 그것을 도와주는 것이다.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상승효과는 거기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추억의 마니>의 경우, 마니와 보내는 시간을 환상적으로 보이고 싶었기에 안나가 오감으로 느끼는 것, 안나를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을 것을 재현하는 데 보다 심혈을 기울여서 그렸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화는 여전히 3D가 줄 수 없는 따뜻함을 준다. 2D 작화를 유지, 고수하는 이유가 있나.

=일단 2D 그림은 그린 느낌과 인상을 직접적으로 전달하기가 쉽다. 이건 내가 손으로 직접 그리는 애니메이터여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내게 있어 애니메이션은 만화의 연장선이다. 물론 3D도 애니메이터 기술이 향상되어 이제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하고 있다. 다만 디즈니와 비교되니 답하기가 좀 힘들다. (웃음) 한쪽 구석에서 2D로 만드는 것이 나로서는 이상적인 일이지만 애니메이션의 3D화는 점점 진보할 것이다. 그 흐름은 분명하다.

-지브리 작품에는 꼭 먹는 장면이 나온다. 이번에도 저녁 식탁에서 함께 밥먹는 모습이 그렇게 푸근해 보일 수 없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나오면 마음도 풀리고 그만큼 대화하기도 쉬워지지 않나. 또한 일상적인 행동을 통해 등장인물이 어떤 사람인지 표현하기에도 좋다. <추억의 마니>에서는 안나가 제대로 식사 준비를 돕는 부분을 주목해서 보면 재미있을 것이다.

-역대 지브리 작품 중 가장 어른스러운 느낌이 나는 것 같다. 여전히 지브리 특유의 작화를 선보이지만 한편으로는 ‘포스트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 작품에서 어려웠던 점은 전부 다 보고 난 뒤, 다시 한번 영화 내용을 되새겨봐야 한다는 부분이었다. 이야기에는 이중의 의미가 담겨 있는 부분들이 있다. 소설이라면 바로 뒤 페이지로 돌려서 볼 수가 있지만 영화는 보는 도중 기억을 상기시키기 힘들다. 이 부분을 조금 의식하면서 감상해주길 바란다. <마루 밑 아리에티>의 경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기획자로 각본에 도움을 준 것 외에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을 의식해서 제작한 부분도 있다. 때문에 두 번째 작품을 제작할 때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어떻게 생각할까?’보다 ‘관객이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들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실사영화 프로듀서로도 활약 중인 미술감독 다네다 요헤이나 작화감독 안도 마사시의 힘을 빌려 지브리 같지만 지브리 같지 않은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다. <추억의 마니>는 지브리 제작의 마지막 작품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 내가 무어라고 확언할 수 없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향후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과 스즈키 프로듀서가 하기 나름이다. 현재는 나를 포함, 스튜디오 지브리 제작 스탭은 해산한 상태다. 하지만 영화제작이란 게 원래 기획마다 스탭들을 새로 구성하는 거니 그냥 옛날 스타일로 돌아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장편이 아니라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도 아직 더 제작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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