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내가 등장했던 그 시대는 이제 끝난 것 같다”
2015-06-16
글 : 장영엽 (편집장)
<섭은낭> 허우샤오시엔 감독
허우샤오시엔 감독

8년간의 기다림은 헛되지 않았다. 허우샤오시엔의 첫 무협영화 <섭은낭>은 예상대로 연출자의 면모를 쏙 빼닮은, 오직 허우샤오시엔만이 만들 수 있을 무협영화였다. 화려한 액션 신도,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솟구치는 무술 고수도 이 영화엔 없다. 다만 사랑했던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임무를 어떻게든 수행하려고 애쓰는 과묵하고 아름다운 여협객이 있을 뿐이다. 그녀의 머뭇거림과 차분한 성정을 따르려는 듯 조심스럽게 움직이는 카메라는 때때로 무협영화치고 너무도 고요한 이 작품의 침묵을 깨는 강렬한 감흥의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이 영화로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허우샤오시엔을 만났다. 애초 20분으로 예정됐던 인터뷰는 40분 가까이 진행됐고 허우샤오시엔은 질문마다 길고 사려깊은 답변을 덧붙였다. 수년간의 기다림과 다양한 실험 끝에 그가 획득해낸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에 40분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섭은낭>을 완성하는 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

=나는 오랫동안 이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8년간 나는 대만의 몇몇 영화제 조직위원회- 타이베이영화제, 금마장영화제- 에 몸담게 되었다. 처음에는 2, 3년 정도만 참여하려 했는데, 이 행사들이 제대로 운영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영화제 자체를 재조직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8년 동안 이 두 영화제를 업그레이드하는 데 힘썼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가 너무 오랫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또 이 영화를 만든다면 꼭 주연으로 캐스팅하고 싶었던 배우 서기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이상 미룰 수 없겠다는 생각에 <섭은낭>을 만들게 됐다.

-기존의 무협영화들과 어떤 차별성을 두려 했나.

=어떤 작품을 만들든 리얼리즘은 내게 늘 중요한 문제다. 촬영한 장면이 내가 보기에 충분히 리얼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나는 그 장면을 써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게 바로 우리가 종종 <섭은낭>을 찍던 도중 촬영을 중단했다가 다시 영화 찍기를 반복한 이유다. 편집실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떤 장면이라도 나에게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으면, 그게 연기의 문제이든 기술적인 문제이든 나는 그냥 그 장면을 들어낸다. 편집실에서 살아남는 장면이 꼭 시나리오에 기반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장면이 모호하게 끝난다 해도, 나는 상상의 여지를 위해 그 장면을 사용하기도 한다.

-<섭은낭>에는 무협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중에서의 액션이나 화려한 결투 장면이 없다. 그건 의도적인 선택이었나.

=그런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기술에 너무 의존하면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게 될 것 같아서다. 이 영화에 필요했던 건 리얼리티에 가까운 액션이었다. 그게 <섭은낭>을 만들며 가장 힘들었던 점이다. 왜냐하면 힘과 충돌을 이치에 맞는 방법으로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싸움에는 충분한 의미도 있어야 했다. 무술감독이 처음 나에게 무협영화의 격투 신들이 어떻게 설계되는지에 대해 얘기했을 때, 나는 즉시 깨달았다.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등장인물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등 기존 무협영화의 액션 신은 나에게 전혀 흥미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내게 있어서 캐릭터의 개성은 등장인물들이 싸우는 방식에 정확히 반영되어야 했다. 모든 캐릭터는 그들만의 특별한 자질을 가지고 있고, 그 점이 액션 시퀀스에 반영되어야 했다.

-이 작품은 흑백으로 시작해 컬러로 전환된다. 그러한 선택의 이유가 궁금하다.

=프롤로그를 흑백으로 찍어야겠다는 건 본능적인 선택이었다. 아마도 나는 주인공의 과거를 다루는 데 오래된 촬영 방식인 흑백영화가 적합하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흑백으로 찍은 다음,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연대기적으로 사건이 진행될 때 비로소 영화는 컬러로 전환된다. 흑백으로 프롤로그를 촬영한 건 과거와 현재시제를 구분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섭은낭>의 주인공은 녜이냥(Nie Yinniang)이다. 이 캐릭터는 당나라 시대의 단편소설 <녜이냥>에 기반하고 있다. 이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하게 된 계기는.

=당나라 시대의 소설은 매우 간결하고 상징적으로 쓰여졌다. 이들 소설에서 각각의 인물은 무언가를 의미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나의 상상력을 자극한 건 ‘녜이냥’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녀의 성인 ‘녜’(Nie)는 세개의 귀를 상징한다. 그녀의 이름 중 ‘인’(Yin)은 ‘감춰진’이라는 뜻을, ‘냥’(niang)은 ‘여성’이란 뜻을 지닌다. 이 이름을 처음 소설에서 보았을 때 나는 여성 암살자를 떠올렸다. 시야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이며, 평소에는 눈을 감고 있지만 언제나 무언가를 듣고 있는 인물 말이다. 그래서 주변의 소음을 감지했을 때, 그녀는 눈을 뜨고 숨어 있던 장소에서 뛰쳐나와 임무를 완수한다는 설정이었다. 하지만 주연을 맡은 서기는 높은 곳을 무서워했고 나무 위에서 뛰어내리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애초 구상했던 인물을 약간 수정해야 했다.

-이 영화에는 클로즈업 신이 거의 없다. 심지어 녜이냥이 싸우는 장면에서조차 종종 당신의 카메라는 롱숏으로 그녀를 조명한다. 대개의 무협영화들은 인물의 동작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빠른 편집을 선호하는데 <섭은낭>은 그렇지 않다.

=나는 언제나 롱숏으로 촬영하는 걸 선호한다. 확장된 숏은 더 많은 것들을 담을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등장인물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 놓인 사물과 풍경까지, 하나의 숏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게 좋다. 나는 액션을 극적으로 편집하는 것이 물리적인 움직임에 대한 집중력을 분산시킨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나는 배우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현장에서 만들어내는 무언가를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늘 배우들이 보이지 않는 위치에 멀찍이 떨어져 그들을 촬영하고, 스탭들 또한 배우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 쓰는 편이다. 감독으로서의 내 역할은 현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받아들이는 것이고, 가능하다면 그것의 정수를 포착해내는 것이다.

-<섭은낭>의 어떤 장면들은 마치 중국 회화에서 생명력을 얻은 듯 아름답고 정교하다. 이 영화의 미학적 성취를 위해 어떤 고민을 했나.

=당나라 회화를 통해 당시의 의상과 생활상 등을 참조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내가 주목했던 건 자연 그대로를 화면에 담아내는 것이었다. 세트에서 촬영하는 건 내가 정말로 원치 않은 일이었다. 자연의 빛과 바람을 가능한 한 그대로 카메라에 담고자 했다. 이 영화에 가장 알맞은 빛과 바람을 포착해내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고, 어떤 때에는 최적의 자연환경을 기다리느라 몇주간이 소요되기도 했다. 그리고 프로덕션 디자인의 기반이 되는 것은 실크였다. 당 왕조 때, 그들은 다양한 유형의 드레이프와 커튼을 칸막이로 사용했다고 하더라. 이 영화를 보면 그저 평범한 침대조차 일종의 막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소품은 실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미술감독이 시나리오를 보고 주요 재료를 실크로 정한 다음, 한국과 인도에서 많은 양의 실크를 사왔다. 실크의 훌륭한 점은, 어떤 조명 아래서 촬영했을 때 정말로 아름답게 보인다는 거다. 그게 바로 이 영화의 룩을 완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당신은 이 영화를 필름으로 촬영했나 아니면 디지털로 촬영했나.

=나는 이 영화를 필름으로 찍은 다음 나중에 디지털로 변환하는 작업을 거쳤다. 왜냐하면 이제 대만의 모든 후반작업 시설은 디지털화되었기 때문이다. 디지털로 색을 보정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영역의 일이었고, 디지털을 배우고 실험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디지털로 작업한 결과물이 필름으로 작업하는 것보다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에드워드 양과 당신은 대만영화의 뉴웨이브를 이끌었고, 그 이후에 차이밍량이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대만영화의 새 흐름을 주도하는 젊은 세대 중 언급하고 싶은 사람이 있나. 최근의 젊은 대만 감독들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

=최근의 대만영화계를 돌아보면 내가 영화를 만들던 때와 시스템에 있어 많은 변화가 있는 것 같다. 예술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은 투자받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고, 내가 등장했던 그 시대는 이제 끝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 새로운 세대의 감독들은 편집과 이야기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 같다. 그래야 투자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규칙을 거스르는 사람들은 이제 저예산, 디지털로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젊은 감독들은 디지털로 영화 만들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는 자오 더인(미디 지)이라는 대만 감독이 이런 고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든 이들에게 특수효과와 최첨단 기술로 무장한 영화가 대안이 될 수는 없다. (플립 휴대폰을 보여주며) 디지털도 잘 모르고, 전자기기도 잘 못 다루는 나 같은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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