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12일 동안 매일 세편 가까운 영화를 봤다. 눈이 피로한 나머지 영화제 후반부에는 안구건조증에 걸려 슬픈 장면이 아닌데도 눈물을 흘렸고, 옆좌석의 할배 기자들로부터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칸에서 본 영화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작품 다섯편과 가장 실망스러웠던 작품 한편을 각각 꼽았다.
장영엽
BEST
<섭은낭> 범상치 않은 무협영화를 보게 되리라고 생각했고, 역시 그랬다. 허우샤오시엔의 무협영화에서는 액션이 아니라 인물이 먼저다. 대만 배우 서기의 과묵함과 초연함을 닮은 <섭은낭>의 여주인공은, 21세기 무협영화의 새로운 고전으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몇번이고 다시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아름다운 작품.
<사울의 아들> 헝가리 출신의 이 신예감독은, 개인이 체감하는 경험이 시각적인 요소로부터만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올해 칸에서 본 그 어떤 영화보다 사운드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작품. 전체가 아닌 부분에 주목하는 과감함과 제한된 형식으로 이야기를 밀어붙이는 야심만만한 연출력이 그의 차기작을 기대하게 한다.
<영광의 무덤> 가끔, 아니 종종,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화는 영상•설치미술의 확장된 버전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영광의 무덤>에는 올해 칸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설치물이 등장한다. 잠든 이들의 병상에 놓여 있는, 빛의 구조물. 보는 이들을 꿈의 세계로 인도하는 이 구조물은 <인셉션>의 팽이만큼이나 강렬한 정서적 체험을 선사한다.
<캐롤> 잘못 다루면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섬세한 감정들을 어떻게 다루고 풀어내야 할지에 대한 토드 헤인즈의 대답이 궁금하다면, <캐롤>은 그 최적의 답변이 될 수 있다. 멜로드라마의 고전적인 요소와 장치들을 유려하게 직조해낸 그의 성취가 오스카에서는 보상받을 수 있길.
<산허구런> 이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펫숍보이스의 <Go West>가 흐른다. 그러나 영화 속 시간의 간극인 25년이라는 세월이, 같은 노래를 얼마나 달리 들리게 할 수 있는지 <산허구런>은 알게 해준다. 40대를 살아가고 있는 지아장커가 전하는 시간과 인생에 대한 성찰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쩐지 가장 오랫동안 마음에 남는다.
WORST
<씨 오브 트리스> 어느 미국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였다면, 과도한 플래시백은 눈감아줄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구스 반 산트의 영화다. 인물과 이야기, 그리고 이 영화적 요소들을 담아내는 방식에 대한 그의 무뎌진 감각이 걱정스럽다.
김성훈
BEST
<섭은낭> 무협영화인데 숏을 잘게 나누지 않고 롱테이크, 롱숏으로 찍었다. 그 롱테이크, 롱숏이 그 어떤 무협영화 속의 빠른 숏과 클로즈업보다 빛난다. ‘무’(武)가 아닌 ‘협’(俠)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에서 <섭은낭>은 태도를 다룬 무협영화다. 마크 리 촬영감독의 카메라에 담긴 자연경관이 무척 아름다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사울의 아들> 촬영은 주인공 사울의 클로즈업숏과 시점숏만으로 이루어졌는데, 유대인의 울부짖음, 아우슈비츠수용소 소음 등이 화면 밖 소리와 맞물리면서 그 어떤 와이드숏보다 생생하고 리얼하다.
<내 어머니> 새로운 형식도, 예술적 성취도 없다. 난니 모레티의 영화 중 가장 평범한 축에 속하는 드라마다. 하지만 자신의 분신인 주인공 마게리타를 통해 어머니 얘기를 하는 이 영화의 애잔함에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칸에서 본 영화 중 가장 슬픈 작품.
<산허구런> 첫 장면부터 낯설었다. 배우 자오타오가 다른 배우들과 함께 <Go West> 음악에 맞춰 군무를 춘다. 갑작스러운 영사 사고 때문에 그 장면만 두번 봤다. 현대 중국의 현실을 그려왔던 지아장커와 밝은 미래를 꿈꾸는 노래 <Go West>는 어째 좀 안 어울리지 않나. 그런 그가 2025년 중국의 미래를 스크린에 펼쳐낸다.
<시장의 규칙> 자본주의 사회에서 힘없는 개인이 꺼낼 수 있는, 아주 신사적인 ‘빅엿’이 있는 영화. 아주 조용하지만 윤리적인 반항을 담은 엔딩이 꽤 근사하다. 주인공을 연기한 뱅상 랭동의 사실적이고 절제된 연기가 서사를 묵직하게 끌고 간다.
WORST
<나의 왕> 상영이 끝나자마자 여성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확인부터 했다. 뱅상 카셀이 연기한 난봉꾼 남편과 살면서 온갖 고통을 감내하느니 차라리 이혼하는 편이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