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1]
이 영화들을 기다리세요, 기대하세요
2015-06-16
글 : 장영엽 (편집장)
취재지원 : 최현정 (파리 통신원)
제68회 칸국제영화제 화제작에 대한 <씨네21>의 리뷰 그리고 영화제 결산
<바닷마을 다이어리>

“칸은 영화를 보기에는 최적의 장소이지만, 그 작품들에 대한 생각을 곱씹기에는 그보다 최악의 장소가 없다.” 매년 5월마다 칸으로 향한다는 <필름 코멘트>의 평론가 켄트 존스는 언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첫 상영이 시작되는 오전 8시30분부터 마지막 상영이 마무리되는 10시경까지, 칸을 찾은 기자들은 매일 두세편씩 상영되는 경쟁부문 영화들을 보는 동시에 산발적인 인터뷰 스케줄을 소화해야 하고, 모든 일을 마친 뒤 숙소로 돌아와서는 고국으로 보낼 기사를 작성하거나 다음날 보게 될 영화의 자료를 뒤적이곤 한다. 그런 생활을 2주일쯤 하다보면 머리에도 혼란이 찾아와, 이 영화와 저 영화의 내용이 서로 뒤섞이고 분명 극장에서 명징하게 느꼈던 감흥들은 저 너머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올해 칸에서 만난 한 외신기자는 이번 영화제에서 자신을 괴롭게 한 인물이 바로 뱅상 카셀이라며, 그가 두편의 영화(마이웬의 <나의 왕>과 마테오 가로네의 <테일 오브 테일즈>)에서 모두 난봉꾼으로 출연하는 바람에 시간이 지나 영화의 줄거리를 상기하는 데 적잖은 혼란이 있었음을 털어놓기도 했다.

전세계 영화 기자들의 운명이 비슷하다면, 칸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에 대해 본격적으로 생각할 여유를 얻는 건 아마 지금부터일 것이다. <씨네21>이 신뢰하는 평론가들 역시 칸이라는 거대한 연례행사를 경험한 뒤 고국으로 돌아가 각자의 리스트를 사려깊게 선정해 보내왔고(63쪽 참조),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매체나 개인 블로그에 장문의 리뷰를 올리기 시작했다. 영화제가 열리는 기간 동안은 영화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궁금해하는 독자들을 위해 SNS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면, 지금은 올해의 칸을 경험했던 모두가 어두운 극장 속에서 고군분투하며 써내려갔을 메모장을 뒤적일 시간이다. 향후 1년간 자국의 영화 관객을 만날, 전세계 다양한 지역에서 당도할 화제의 영화들을 깊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는 데에는 국적을 떠나 별다른 이견이 없을 것이다. 이 지면에서는 영화제 후반부에 가장 주목받았던 네편의 작품에 대한 보다 자세한 리뷰를 소개한다.

<디판>

지난주 첫 번째 결산기사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자크 오디아르의 <디판>에 대한 외신의 반응은 충분히 소개했다. 수상에 대한 수많은 말들이 오갔지만, 황금종려상을 차치하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디판>은 꽤 유려하게 재단된 멜로드라마이며 사회 속에 어떤 안전장치 없이 던져진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남는지에 대한 자크 오디아르의 지속적인 관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영화가 ‘디판’이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과정은 여러모로 그의 전작 <예언자>를 떠올리게 한다. 그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말리크 엘 제베나와 마찬가지로, 디판은 어떤 인물인지 잘 가늠할 수 없는 상태로 관객을 만난다. 보는 이들이 그에 대해 알 수 있는 유일한 정보는, 그가 스리랑카 반군 출신이었으며 내전을 경험했고 동료들의 시체를 태우는 아픔을 경험했다는 것 정도다(이 모든 정보는 <디판>의 짧은 오프닝 시퀀스에서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미 죽은 사람의 여권 속 이름인 ‘디판’으로 프랑스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그는 갱들이 활보하는 프랑스 근교 지역에서 새로운 형태의 폭력과 마주하게 된다. 프랑스에 살지만 프랑스어를 하지 못하고, 불법으로 망명한 자신의 처지가 들킬까 두려워 제대로 된 직장을 얻지도 못하는 그가 점차 낯선 사회의 룰을 배워나가고 스리랑카에서 함께 망명한 여자, 소녀와 긴밀한 관계를 이뤄나가는 과정이 마치 게임 스테이지를 단계별로 돌파하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하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자크 오디아르가 <예언자>(2009)와 <러스트 앤 본>(2012)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갑자기 장르적으로 변모하는 <디판>의 후반부는 <예언자>가, 결함 있는 인물들이 인간적인 유대와 교감을 나눈다는 설정은 <러스트 앤 본>이 더 잘해냈던 것들이다. “모든 것들은 무난하게 진행되고, 우리는 인물들의 운명에 의해 감동받지만 영화는 중반부에 길을 잃고 후반부에 이르러 액션영화로 선회하며, 미완성의 느낌을 남긴다”는 프랑스 주간지 <레 인로큡티브르>의 평에 일정 부분 동의하는 편이다. <디판>은 영락없는 자크 오디아르의 영화이지만, 그가 지닌 개성과 장점들이 충분히 다듬어지지 않았다는 느낌을 준다.

<테일 오브 테일즈>

아시아영화들의 약진

올해 경쟁부문 상영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던 프랑스영화들에 대한 아쉬움을 상쇄하는 건, 주요 부문에 초청된 몇편의 아시아영화들이다. 지난 중간 결산 기사에서 이미 소개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와 더불어 대만 감독 허우샤오시엔의 <섭은낭>과 지아장커의 <산허구런>, 그리고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광의 무덤>이 그 작품들이다. 이중에서도 가장 먼저 언급하고 싶은 작품은 허우샤오시엔의 첫 무협영화이자 그의 8년 만의 귀환을 알리는 <섭은낭>이다. 9세기 당나라의 전기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어린 시절 납치돼 암살자로 길러진 녜이냥(서기)이 임무에 실패한 뒤, 자신의 사촌이자 한때 약혼했던 연인(장첸)을 죽여야 하는 상황에 직면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섭은낭>의 주요 줄거리로 잘 알려진 이 내용은 사실 이 영화에서 그리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허우샤오시엔이 창조했고 서기가 완성해낸 이 여성 검객은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에 그렇게 집착하지도 않는다. 대신 영화는 암살자의 본질과 개성을 카메라로 육화해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허우샤오시엔은 암살자의 본질이 보이지 않는 곳에 숨어서 지켜보는 데에 있다고 믿는 것 같다. 많은 장면에서 등장인물과 풍경을 응시하듯 롱숏으로 조명하는 카메라는 늘 지켜보는 위치에 존재하는 암살자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그 방식이 숨막히게 아름답다. 더불어 허우샤오시엔이 프로덕션 디자인의 주요 소재로 사용한 실크는 촬영감독 마크 리가 포착한 자연광과 맞물려 인상적인 미장센을 완성한다. 죽여야 하는 이는 알지 못하지만 이미 그곳에 자리하고 있는 암살자의 존재감은, 관객의 시선이 등장인물에게 당도하기 위해 거쳐야 하는 여러 겹의 실크막(당나라 시대에는 이 실크천이 공간과 공간을 구분하는 ‘막’ 역할을 했다고 한다)을 통해 더욱 은밀해진다. 무협영화치고는 현저히 적다고 할 만한 액션 신도 이처럼 등장인물의 개성을 나타낼 딱 그 정도만큼만 등장한다. 허우샤오시엔은 언젠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사무라이영화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하며 “그의 영화에서 정말로 중요한 문제는 사무라이라는 기묘한 직업을 가지게 되는 과정에 대한 철학이었지, 액션 신 그 자체에 있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의 이러한 말에서 무협영화로서 <섭은낭>이 이루고자 했던 바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왕>

지아장커의 <산허구런>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광의 무덤>은 이 두 아시아 거장의 사적인 경험과 소회로부터 탄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먼저 지아장커의 <산허구런>은 늘 현대 중국 사회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그가 처음으로 호주라는 낯선 공간에서, 상당 부분 영어대사로 촬영을 시도한 영화다(물론 대부분의 장면은 중국에서, 중국어로 진행된다. 호주를 배경으로 영어대사가 진행되는 부분은 영화의 마지막 3분의 1 지점에 이르러서다). 영화는 진성과 타오, 량지라는 세 인물의 일대기를 세개의 다른 시간과 공간을 통해 들여다본다. 먼저 1999년. 밀레니엄을 앞둔 이 시기에 두 친구, 진성과 량지는 타오라는 여자친구를 동시에 사랑한다. 부유한 집안의 엘리트 출신인 진성은 자신만만하고 오만하며, 탄광촌에서 일하는 량지는 가진 건 없지만 자상하다. 타오는 결국 고민 끝에 진성을 선택하고 량지는 고향을 떠난다. 2014년, 결혼했던 타오와 진성은 헤어졌고 타오는 자신보다 더 형편이 나은 전남편에게 아들의 양육권을 넘긴다. 탄광촌에서 오래 일한 량지는 병을 얻는다. 2025년 이야기의 주인공은 진성과 함께 호주로 이민간 타오의 아들이다. 그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중국에 남겨두고 온 친엄마를 그리워하며 중국어를 배운다. 그는 중국어 학원에서 만난 연상의 교사와 사랑에 빠진다.

지아장커는 36살에 경험한 아버지의 죽음과 자신이 40대에 접어들며 경험하게 된 인생의 다양한 감정들이 이 영화를 연출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 그의 연출 의도 때문인지 중국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 군상 각자의 면모에 집중했던 전작과 달리 이 영화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 따라 같은 등장인물이 어떠한 변화를 겪게 되는지가 더 중요하다. 지아장커의 오랜 협력자이자 영민한 배우 자오타오의 역할이 이번 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간은 흐르고 모든 것들은 변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물질적인 이유로 선택했던 모든 결정들은 미래에 더욱 후회스러운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지아장커는 개인의 질문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는 데 장기가 있는 감독이며 <산허구런> 역시 사적인 질문에서 출발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사회가 직면했던 과거의 모습과 더불어 현재, 미래에 대한 거장의 근심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산허구런>

유럽영화에 대한 아쉬움

마지막으로 소개할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영광의 무덤>은 그의 영화인생 1막을 마무리하는 상징적인 작품이 될 것 같다. 최근 몇년간 타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정치적 사태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이 타이 감독에게 예술적 한계를 느끼게 했던 것 같다. 조국에 작별을 고하는 마음으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 자신의 고향인 콘 카엔으로 돌아가 만든 이 작품은 그곳의 오래된 병원과 그 병원에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잠들어 있는 병사들, 그리고 그중 한 병사를 간병하는 중년 여성 젠의 이야기를 다룬다. 고향인 콘 카엔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 오래된 병원이 배경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여러모로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2006년작 <징후와 세기>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이 있지만, 같은 장소와 비슷한 공간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이 영화는 <징후와 세기>보다 훨씬 애상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다. 그건 아마 앞으로도 더 나아지지 않을 타이의 현실에 대한 연출자의 서글픈 감정이 이 작품에 깊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전작과 마찬가지로 꿈과 현실, 영혼과 육신, 망자와 산 자가 경계 없이 뒤섞여 있는 <영광의 무덤>은 그의 가장 좋은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타이에서의 한 시기를 마무리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리베라시옹>은 ‘대륙의 표류’라는 기사를 통해 올해 칸에서 소개된 유럽영화들에 대한 아쉬움을 전하는 한편, “그런데 아시아영화들은 산더미처럼 몰려오는 세계화된 자본에 많은 부분 종속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언할 수 없고 특별한 자신들만의 색깔을 지키려 한다”고 말했다. <씨네21> 또한 이 의견에 동의하며, 이어지는 지면에서 고유의 개성을 지켜나가고 있는 아시아 거장들과의 만남을 소개하면서 올해 영화제의 전반적인 면모에 대한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내년에는 이 특별한 리스트에 한국 감독의 이름도 포함되었으면 하는 기대감도 함께 덧붙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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