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2>(2011)를 향한 혹평은 어쩌면 전초전에 불과했는지 모른다. <메리다와 마법의 숲>(2012)에 들어서면서 픽사의 아성이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공주 이야기, 시대극, 여성감독 등 온갖 새로운 시도로 점철된 작품을 만들면서 픽사는 무슨 정신에서인지 정작 자신들의 가장 큰 특징인 ‘이야기’는 쏙 빼놓고 왔다. 미안한 얘기지만 디즈니 공주치고 메리다만큼 타깃층의 지지를 얻지 못한 공주도 없었다. 개봉 당시 드림웍스의 <슈렉>(2001)의 박스오피스를 넘어서며 디즈니의 경영 부진을 만회해줬던 <몬스터 주식회사>(2001)의 성과도 프리퀄인 <몬스터 대학교>(2013)에 이르러 무참히 깨졌다. 평작이라 평가해줄 법도 하지만 무소불위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의 타이틀을 붙이기엔 영 민망한 수준이었다(로튼토마토 신선도 96%의 시리즈는 프리퀄에 와서 78%로 뚝 떨어졌다. <토이 스토리> 시리즈와 <업>(2009)의 감동적인 정서를 만들어낸 픽사를 향한 애니메이션 팬들의 낙담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때마침 픽사의 구조조정 문제까지 불거져나왔다. 픽사는 제작 중인 텐트폴영화(제작사 라인업 중 흥행이 가장 확실시되는 작품)인 <굿 다이노서>의 작업 지연을 구실로 내세웠지만 시설 축소를 비롯해 직원 1200명의 5%에 달하는 스탭 60명의 대량 해고는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물론 전세계를 발칵 뒤집어놓은 <겨울왕국>(2013)의 성공을 빼놓고 픽사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다. 하지만 ‘픽사의 DNA’가 흐름에도 <겨울왕국>은 어디까지나 디즈니의 수장인 존 래세터의 색채가 전면에 드러난 작품이자, 디즈니의 막강한 배급력을 과시한 디즈니의 인장이 새겨진 작품이었다. 픽사라는 새 옷을 입고 화려하게 부활한 디즈니와 픽사가 이 성공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디까지나 다를 수밖에 없었다. 픽사 내부에서 제기된 위기론이 불거진 게 <겨울왕국>의 기록적 흥행 즈음이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2006년 월트 디즈니가 픽사를 인수 합병한 이래 줄곧 과도기를 겪어온 픽사의 정체성 찾기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위기의 실체는 명확했다. 픽사를 상징하는 독창적 스토리의 생산 중단에 대한 반성, DVD 시장 와해로 인한 시장의 변화가 그것이었다.
픽사의 15번째 작품, 20주년 기념작이 된 <인사이드 아웃>(2015)은 “속편 제작 대신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개발하는 데 매진하겠다”는 픽사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작품이다. 심기일전, 고군분투의 자세로 임한 결과물은 통했다. 인간의 감정 상태를 의인화한 오리지널 스토리를 기반으로 소녀의 성장기는 감성과 기술력이 어우러진 픽사의 장점을 고스란히 체화한 수작이다. “마음이야말로 전세계 관객 누구에게나 통하는 보편적인 재료”라는 피트 닥터 감독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한 후 11살 소녀의 뇌구조를 들여다본 평단은 말 그대로 열광했다. 경쟁섹션이 아닌 비경쟁부문인 갈라섹션 상영에 대해서 ‘만약 경쟁으로 갔다면 분명 황금종려상 수상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참으로 ‘픽사스러운’ 작품을 향한 지지와 호평이 이어졌다.
‘픽사의 부활’이 각 기사의 타이틀을 장식했다. 디즈니의 자본력을 얻는 대신, 픽사의 정체성을 잃었다는 지난한 비판 역시 불식됐다. 픽사에 디즈니와의 합병 이후의 시간은 갑작스런 환경 변화로 슬픔이 감정을 온통 지배했던 <인사이드 아웃>의 소녀 ‘라일리’의 감정 상태가 아니었을까. 사춘기의 성장통을 겪고 성인이 된 픽사. 그다음 작품을 기다린다.